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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한나 아렌트 -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정치철학자의 삶

by 내오랜꿈 2007.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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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전기를 다루는 서평을 읽으면서 책이 왜 이렇게 두껍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올해 들어와 읽은 다른 전기들에 생각이 미쳤다. 그 책들을 펼쳐보니 <빌헬름 라이히> 787쪽,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1,055쪽 , <존리드 평전> 701쪽, <노신 평전> 421쪽, <이탁오 평전> 589쪽, <밥 말리> 507쪽(이 책은 활자가 다른 책들에 비해 1포인트 정도 작은데, 보통의 활자로 치면 600쪽이 넘는다) 등이다. 

그러고 보니 철학자나 정치사상가들에 관한 전기는 대부분 엄청난 분량이었던 것 같다. 2권으로 나누어 번역된 미셸 푸코나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도 800쪽 분량이었고, 호치민 전기도 1,000쪽 가량 됐으니... 

하지만 대부분 책값은 2~3 만원 정도였었는데(제일 두꺼웠던 <괴벨스>가 35,000원이었다), 한나 아렌트 전기는 신기록을 세운다. 할인받아도 50,000원이다. 완전 허걱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정치철학자의 삶 
한나 아렌트 전기 번역출간 / 홍원표 옮김 / 955쪽 / 5만5천원

김승욱 기자
출처 : <연합뉴스> 2007년 11월 29일 


(서울=연합뉴스) = "이 책은 대작이다", "그는 마르크스와 견줄만 하다". 1951년 출간된 '전체주의의 기원'에 쏟아진 비평가들의 찬사는 대단했다.

   1963년 출간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악(惡)의 본질을 해부했다. 이 책은 '악의 문제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로 평가받았다.

   '전체주의의 기원'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저자이자 '제2의 로자 룩셈부르크',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정치철학자'로 불리는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전기가 최근 번역.출간됐다.

   미국 컬럼비아대 정신분석재활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중인 엘리자베스 영-브륄이 펴낸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펴냄)'는 1천 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으로 아렌트의 일생과 사상을 풀어냈다.

   아렌트는 독일 하노버 근교에서 태어났다. 그의 몸에는 아버지 파울 아렌트와 어머니 마르타 아렌트로부터 물려받은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렌트는 일생동안 유대인임을 의식했고 이는 그의 사상에 바탕을 이뤘다.

   18살이 되던 해 마부르크대학교에 진학한 아렌트는 평생 동안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한 남성을 만난다. 아렌트는 자신을 가르친 마르틴 하이데거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유부남이면서 17살이나 연상인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사랑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25년 여름 아렌트는 아무리 깊은 관계를 맺더라도 하이데거가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당신은 왜 나에게 손을 내미는지요?/ 부끄럽게, 그것이 마치 비밀이라도 되나요?/ 당신은 우리의 포도주를 알지 못할 만큼/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인가요?'
비록 하이데거와의 사랑은 지속되지 못했지만 하이데거와 아렌트는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훗날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없었다면 '존재와 시간(1927년 출간된 하이데거의 대표작)'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아렌트는 공부를 계속해 1928년 칼 야스퍼스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독일 생활은 전체주의의 광풍에 휘말려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1933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됐다 풀려난 아렌트는 파리로 도피했으며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1년은 아렌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해였다. '전체주의의 기원'이 출간된 해이기도 했지만 바로 그 해에 아렌트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33년 이후 아렌트는 18년 간 무국적자였다.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유명세를 탄 아렌트는 놀람과 불편함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스승인 야스퍼스에게 "일주일 전 저는 신문의 표지인물이 됐다는 것과 신문 판매대에서 제 자신을 목격한 것에 대해 선생님께 어떤 편지를 써야 하는지요?"라고 물었다.

   아렌트는 텔레비전 대담에 출연할 때도 등 뒤에 카메라를 설치할 것을 요구할 정도로 얼굴이 공개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피했다. 자신의 기질과 성향은 정치행위나 공적인 삶에는 부적합하다는 이유에서였다.

   1960년 5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에서 이스라엘 비밀경찰은 아이히만이라는 남자를 체포했다. 그는 유대인 대량학살의 집행자였다.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으로 이송돼 특별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선고 받는다.

   아이히만의 재판 소식을 들은 아렌트는 대학 강의를 모두 취소하고 '뉴요커'지의 재정지원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의 재판을 참관했다.

   아렌트가 관찰한 아이히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깨닫지 못한 자였다. 그는 전혀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머리에 뿔난 괴물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

   미국으로 돌아온 아렌트는 뉴요커지에 악의 평범성을 파헤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5차례 연재했으며 이를 정리해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1975년 아렌트는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며 자식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몰려들었지만 지적인 동료라 부를 만한 사람은 열렬하게 사랑했던 하이데거 정도였다. 나치에 협력한 이유로 곤경에 처해있던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세상을 뜬 지 1년 뒤인 1976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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