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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꼬뮨주의 선언> - 코뮨주의, ‘우정의 정치학’

by 내오랜꿈 2007.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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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 공산주의와 다른 ‘우정의 정치학’ 
연구공간 수유+너머 ‘코뮨주의 선언’ 펴내 

강성만 기자
출처 : <한겨레신문> 2007년 12월 12일 


»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들이 안산의 이주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구원들은 지난해 이후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피해가 예상되는 농민·노동자 및 이주노동자들과 연대 모임을 갖고 집회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실천 활동을 펼쳐 왔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제공



적대 아닌 긍정적 사유 바탕 대중의 자발성 중시
일상 속 대안적 실험들의 소통·확산이 세상 바꿔
 

21세기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코뮨주의’는 매우 익숙한 단어다. <문화/과학> 동인과 조정환씨로 대표되는 자율주의 평론 그룹, 연구공간 ‘수유+너머’ 등이 이 용어를 새로운 미래사회 모델을 담는 그릇으로 애용하고 있다. 

이 용어의 부상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패배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실패한 체제인 스탈린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공산주의(코뮤니즘) 대신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현실 사회의 코뮤니즘은 물질적 생산과 분배 등 생산력주의에 과도하게 치우치면서 마르크스가 애초 생각한 ‘코뮨’이 주는 상상력을 제약하고 있다는 점도 다른 요인이었다. 마르크시즘을 마르크스주의라고 바꿔 부르듯이, 코뮤니즘을 코뮨주의로 대체시켜 자신들의 미래 변혁 모델을 담은 것이다. 

그렇다면 ‘코뮨주의’의 정확한 실체는 무엇인가? 코뮨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 가운데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이 질문에 응답했다. 이 단체가 최근 펴낸 <코뮨주의 선언-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고병권·이진경 외 지음, 교양인)은 코뮨주의의 이념적 지향을 정치·철학 등 여러 각도에서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다. 

» ‘코뮨주의 선언’

이들은 자신들의 ‘코뮨주의’가 “현실 자체에 대한 변혁의 지향”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이념임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 이념은 역사 속에 묻혀버린 ‘공산주의’와 반대물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이질적이다. 코뮨의 정의에서부터 차이는 드러난다. “다양한 차이들, 여러 특이점들이 소통하며 공통된 것을 생산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코뮨이라고 부른다.” 

옛 ‘동지들’처럼 사유화와 자본주의 화폐 경제에 반대하고 혁명을 꿈꾸지만 궁극적 목표로 가는 길은 다르다. 이 책의 부제인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이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기존 마르크스정치학은 모든 차이와 대립을 계급 적대로 환원했다는 점에서 ‘적대의 정치학’이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대신 어감상 정반대인 ‘우정의 정치학’을 내세운다. 적이 아니라 친구에서 시작해야 하며, 부정적 방법이 아니라 긍정적 방법으로 사유하자는 것이다. 

“긍정적 감응이 발생하고 지속된다면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적대 관계를 가로질러 우정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했다. 경제적 대립이나 정치적 적대조차도 우정을 막는 결정적인 경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함께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는” 코뮨은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방법은 일상의 구체적 실험이다. 대중은 “특정한 촉발이 주어지면 갑자기 솟아오르며 거대한 힘과 운동을 만들어 나아가는 자발적 흐름”이라는 것이다. 

전위가 아니라 이 ‘자발적 흐름’이 혁명을 만들어나가는 주체라는 설명이다. “대중의 일상적 삶을 바꾸고, 감응과 감각을 바꾸고, 습속의 무의식을 변혁하는 것이 의식화보다 훨씬 더 혁명에 긴요한 직접적 동력”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에너지, 음식, 정보, 지식, 정서 등을 다른 코뮨과 어떻게 소통할지 고민하는 일상의 대안적 실험이 중요하다. 여러 대안적 실험들을 소통하고 확산시킬 때 “세상이 바뀐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국가를 독점의 영역으로 규정하면서 ‘국가적 공공성’이란 개념에 부정적이다. 이런 견해는 혁명에서 국가 권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문화/과학> 동인의 사유와 크게 다르다. <문화/과학> 동인들은 국가 권력이 엄청난 사회적 자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중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 뒤 그 기능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아래로부터의 대안사회 건설 원리는 위로부터의 국가 개입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는 “삶 속에는 비자본주의적 요소가 많다”면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줄이고 싸워나가는 일상 속의 대안적 실천이 중요하며 국가가 중요한지 아닌지는 그 이후의 문제”라고 말했다. 고 대표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겠냐?”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하겠다고 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내오랜꿈 ------------------------------------------------------------------------------------------ 

이들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면 역시 그들의 '집'으로 들어가봐야 한다. 궁금하신 분들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홈페이지(http://www.transs.pe.kr/)에 들러보기 바란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건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곡해된 프리즘으로 이들을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이들이 펴낸 <소수성의 정치학>에 대해 언급하면서 '소수성의 정치'에서 '전위'를 찾아내는 무지함을 용감하게 표출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의 그 어느 '연구집단'도 새만금 반대투쟁의 일환으로 삼보일배투쟁이나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투쟁에 집단적으로 참가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나 역시 왜 이들의 실천적 모습이 하필 이러한 문제에 발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표방하는 '꼬뮨주의'를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핵심으로 참여하고 있고, <꼬뮨주의 선언>의 공저자의 한 사람인 이진경씨와의 대담이다. 상당히 오래전(2,000년)의 대담이지만, '꼬뮨주의'의 사상적 모태는 이때부터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일차적으로는 1997년의 <맑스주의와 근대성>에서 이미 그가 말하는 '꼬뮨주의'의 기본적 골격이 갖추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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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뮨주의에 대한 단상 
[인문학데이트] ⑨ 이진경 

글 고명섭 기자 사진 김진수 기자
출처 : <한겨레신문> 2000년 07월 20일 


인문학 데이트 아홉 번째 초청자는 이진경(37)씨다. 이씨는 약관 25살 때 쓴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으로 1980년대 대학가에 마르크스주의 원전 학습 열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학생운동 조직사건에 연루돼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출감 뒤 왕성한 필력으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강의와 공부를 하고 있는 그를, 같은 공간에서 강의를 한 바 있는 권보드래(31) 서울대 강사(국문학)가 만나 <수학의 몽상> 등 그의 저서들을 놓고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눴다. 편집자 

'근대에 묶인 사람'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도 없습니다 

권보드래=수유연구실에서 만난 지 1년 반쯤 됐죠? 이렇게 데이트를 겸해서 인터뷰를 해보는 건 처음이군요. 

이진경=낯설게 만나면 아는 얘기도 흥미로울 수 있겠지요? 

=저서가 여러 권이던데, 사람들은 여전히 80년대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80년대 학번에겐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으로, 90년대 학번에겐 <철학과 굴뚝청소부>로 기억돼 있다더군요. 

=두 책에서도 드러나지만, 이진경의 글에는 80년대와 90년대의 단절이 선명하다는 평가가 많은데요.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던 80년대의 저와 `탈주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90년대의 저 사이에 단절이 있는 건 분명하지요. 하지만 80년대 운동권의 삶이란 어찌 보면 그 시대에 가장 전형적인 탈주의 삶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당시 `도바리친다'는 말이 일상화돼 있었는데, 이 말은 군대나 경찰 같은 국가권력과의 대결이고, 지배적인 가치체계와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전복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연속적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고 미셸 푸코나 질 들뢰즈 같은 사상가들에게로 옮아간 데서도 그걸 알 수 있을 듯한데요. 

=옮아갔다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와 `접속'시킨 거라고 합시다. 사회주의의 붕괴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로는 설명이 안 돼요.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마르크스주의, 여기엔 틀림없이 근본적인 어떤 공백이 있는 겁니다. 이 공백을 메우려면,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는 불가능하고 마르크스주의 외부에서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죠. 가령 거기서 저는 경제적 생산양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주체생산양식'이 있다고 본 것인데, 푸코나 들뢰즈가 그것을 사유할 수 있는 개념과 이론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붕괴 이전의 사회주의는 무엇이었습니까? 

=생산양식 차원에서 보자면 분명히 사회주의였죠. 그러나 근대적 삶의 방식이 여전히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생산양식이 바뀌어도 근대인을 생산하는 주체생산양식은 바뀌지 않았던 겁니다. 

=그것이 선배님이 코뮨주의라는 주제에 대해 연구하려는 이유인가요?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코뮨주의는 코뮨(공동체)이란 말에서 나온 것인데, 함께하는 삶, 그런 삶을 만드는 관계와 삶의 방식 문제를 새롭게 개념화하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물론 같은 말의 번역어인 공산주의라는 말이 있지만, 이건 함께 생산한다는 뜻의 경제주의적 개념이어서 코뮨주의와는 다릅니다. 

=공산주의만큼 강력한 코뮨주의도 없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건 기존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는 언제나 연기될 뿐, `결코 오지 않는 미래'예요. 현실의 사회주의는 코뮨주의적이라고 하기 힘들구요. 근대적 삶이 만들어낸 무의식적 습속을 바꾸지 않는 한, 그걸 바꾸기 위해 새로운 인간관계와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새로운 종류의 주체는 만들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광범위한 인간 변혁이 필요하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다시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적 주체와 다른 새로운 주체는 어떻게 형성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요, 명령과 복종에 길들여진 근대적 삶을 깨나가는 삶의 방식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를 자본주의적 관계로 포섭하는 화폐 내지 가치법칙에 대한 투쟁을 벌이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본에 구매된 활동인 노동을 극소화하고, 자신의 생산적 능력을 확장하는 자기활동을 극대화하는 것도 그렇구요. 노동조합에서든, 당에서든, 공동체운동에서든 말입니다. 

=선배님이 말하는 그런 운동은 일상적이고 항상적이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게 어려운 건 이미 익숙한 우리 자신의 습속, 생각, 행동을 바꾸기가 힘들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을 바꾸면 쉽고 신나는 일일 수도 있지요. 여기서 중요한 건 안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존의 삶을 반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시켜나가는 자율적이고 집합적인 실천이 코뮨주의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했거나 무슨 무슨 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진보적으로 살고 있다고 하는 생각이 착각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를 빌려 말하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 코뮨주의적 실천을 `탈주'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탈주가 무엇인지를 좀더 명확히 이야기해주시면…. 

=탈주는 도피가 아니라는 걸 먼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탈주는 차라리 지배체제로부터 모든 사람들을 벗어나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거부하는 부정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긍정이에요. 하지만 대개 기존의 지배적 체제는 그것을 가로막지요. 그래서 탈주자는 지배적인 체제와 투쟁할 수밖에 없지요. 

=최근 <수학의 몽상>이란 책을 쓰셨는데, 거기에서도 근대성과 관련한 선배님의 문제의식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을 계산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수학입니다. 운동을 계산하는 것이 근대 과학혁명의 출발점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전혀 상이한 것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찾아내며, 여기서 독창적 사유가 발전합니다. 그것이 수학의 강력한 힘일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형식적인 틀을 씌우려는 노력 또한 공존했어요. 특히 19세기 이후 `엄밀성'이란 말은 다양한 모습의 수학들을 어떤 형식요건에 따라 가위질하는 재단사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수학을 가두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해요. 저는 근대 수학사를 통해서 수학의 그런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근대 수학에 대한 비판이 모든 수학에 대한 적대는 아니란 거군요? 

=그래요. 마찬가지로 근대를 넘어서자는 뜻의 근대 비판이 근대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적대는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근대성의 지반에서 탄생한 요소들을 탈근대적 배치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인 거죠. 

=최근 들어 동아시아철학, 한국철학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특별하다고 할 건 없는데, 먼저 우리 자신의 삶과 역사로 혁명을 사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지요. 우리 자신의 사유방식, 삶의 방식을 연구해야 한다고 할 때 동양철학은 그리로 들어가기 위한 문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다른 한편, 그것은 근대적 삶과 사유에 대한 일종의 `외부'인 셈인데, 그런 만큼 근대의 외부를 사유하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섭니다. 

권=선배님 활동의 장인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유를 통해 삶을 변경시키는 노력이 필요하고, 자신의 삶을 실험과 실천의 대상으로 삼는 아방가르드적 문제의식이 필요한데, 연구공간 `너머'가 그런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율주의적 활동방식과 공동의 삶을 모색하는 실험을 여러 각도에서 모색하고 있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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