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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스쳐지나듯 일독했는데, 무엇인가 무릎을 칠만한 감탄 같은 건 없었다. 시간을 두고 다른 데리다 저작들을 맛본 뒤에 다시 한번 읽어보든지 해야겠다. 아래 인용하는 강우성 교수의 글은 읽기 시작할 무렵에 스크랩해둔 글인데, 솔직한 느낌을 말하자면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완전히 번역투의 말투, 자기 것으로 소화되지 못한 어려운 이론을 억지로 설명하는 말투다. 미국 르네상스 시대 문체 연구도 좋지만, 우리 말 문체도 좀 연구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재원의 글은 읽으면 바로 이해되는 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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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와 마르크스주의의 때맞지 않은 조우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대중들의 공포』를 겹쳐 읽기 위한 사전준비
이재원(전문번역가)
출처 : <대학신문> 2007년 11월 17일
마르크스의 유령들
자크 데리다 지음┃진태원 옮김┃이제이북스┃400쪽┃1만9천원
대중들의 공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최원 옮김┃도서출판b┃588쪽┃2만8천원
▲ 삽화 : 차주영 기자
세인들의 오해와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자크 데리다의 관계는 꽤 막역하다. 가령 루이 알튀세르는 데리다의 ‘악어(cai man)’였고, 데리다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악어’였다(‘악어’란 이들의 모교인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자격시험 준비생들을 지도하는 과외교사의 별칭이었다). 그러나 세인들의 오해가 틀린 것도 아닌 것이, 마르크스‘주의’와 데리다의 관계는 겉보기에 그리 밀접하지 않았다.
물론 데리다가 1979년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렀고, 1982년에는 마이클 라이언이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라는 책을 발표해 데리다의 사유가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저서 전면에 처음 드러낸 것은 1993년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발표하면서였다.
프랑스의 역사적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데리다의 사상이 조우할 수 있는 계기는 1972~1978년과 1983~1984년에 마련됐다. 1972년 공산당은 사회당과 공동강령을 발표했고(그 결과 1978년 총선에서 공산당은 프랑스 야당의 제1좌파 자리를 사회당에게 내줘야 했다), 1976년에는 제22차 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포기했으며, 1983년부터는 공산당 지지자들이 대거 사회당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요컨대 이 기간 동안 공산당은 전후 이래로 프랑스 지성계에서 확고하게 누렸던 ‘어떤’ 권위를 잃었고, 그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을 옭아맸던 교조주의가 무너졌던 것이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데리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서로에게 ‘말조심’하게 만들었던 ‘봉쇄장치’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알튀세르가 데리다를 우호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두 편의 수고(手稿),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1982)과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1986)을 집필한 것도 이 무렵이다.
데리다의 이력에서 보면 더욱 더 직접적인 계기는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인 1990년에 찾아왔다. 이 해는 1985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발표했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이 동구권에서부터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으며 서서히 종말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는 점에서 진정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이었다. 이 가을의 끝자락이 겨울을 예고할 즈음인 1990년 초, 데리다는 전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의 고향인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그 뒤(『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외에도) 『다른 곶』(1991), 『법의 힘』(1994), 『우정의 정치학』(1994) 등 정치적 저서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고 2007년, 이제 우리 앞에서도 데리다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조우가 ‘때맞지 않게’ 되풀이되고 있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가 각각 15년과 11년의 세월을 건너 우리 앞에 나란히 도착한 것이다(사실 『대중들의 공포』의 모태는 1994년 영어로 먼저 발표된 『대중들, 계급들, 관념들』이니 이 책 역시 약 15년의 세월을 건너왔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예전에 발표됐던 책들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이 조우가 ‘때맞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등장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준거의 토대, 즉 현실사회주의가 와해된 상황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때맞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오히려 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가 그때보다 훨씬 강고해진 바로 지금 이곳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더욱 더 때맞지 않은 것이리라. 게다가 발리바르라니, 누가 지금도 알튀세리앙들을 읽는단 말인가? 이 ‘때맞지 않음’은 단순한 ‘시대착오’가 아닐까?
데리다의 이력에서 보면 더욱 더 직접적인 계기는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인 1990년에 찾아왔다. 이 해는 1985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발표했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이 동구권에서부터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으며 서서히 종말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는 점에서 진정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이었다. 이 가을의 끝자락이 겨울을 예고할 즈음인 1990년 초, 데리다는 전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의 고향인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그 뒤(『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외에도) 『다른 곶』(1991), 『법의 힘』(1994), 『우정의 정치학』(1994) 등 정치적 저서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고 2007년, 이제 우리 앞에서도 데리다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조우가 ‘때맞지 않게’ 되풀이되고 있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가 각각 15년과 11년의 세월을 건너 우리 앞에 나란히 도착한 것이다(사실 『대중들의 공포』의 모태는 1994년 영어로 먼저 발표된 『대중들, 계급들, 관념들』이니 이 책 역시 약 15년의 세월을 건너왔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예전에 발표됐던 책들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이 조우가 ‘때맞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등장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준거의 토대, 즉 현실사회주의가 와해된 상황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때맞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오히려 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가 그때보다 훨씬 강고해진 바로 지금 이곳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더욱 더 때맞지 않은 것이리라. 게다가 발리바르라니, 누가 지금도 알튀세리앙들을 읽는단 말인가? 이 ‘때맞지 않음’은 단순한 ‘시대착오’가 아닐까?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데리다와 발리바르(이제부터 이 고유명사는 ‘동시대 마르크스주의’의 환유이다)의 조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발리바르 이전에 알튀세르가 주목했던 데리다의 개념들은 ‘여백(marges)’과 ‘산포(disse′mination)’였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들을 통해 일체의 목적론을 부정한 새로운 유물론, 즉 마주침의 우발성과 혁명의 필연성을 사유하는 유물론을 구축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에서 라이언이 시도하고자 했던 바도 (비록 좀더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데리다와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일체의 ‘형이상학’(여기에는 실증주의, 자연주의, 객관주의 등을 비롯해 당/국가로 상징되는 중앙집권주의/중심주의, 자본주의의 신용체계 등이 모두 포함된다)에 대한 비판자라는 점에서 비교 가능하다는 것이 라이언의 전제였다.
발리바르도 형이상학의 해체라는 데리다의 테마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알튀세르나 라이언과 비슷하지만, 오히려 데리다의 방법론 자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들과 다르다. 데리다와 발리바르가 공유하는 이 방법론, 흔히 우리가 ‘해체(deconstruction)’라고 부르는 이 방법론을 내 식으로 풀자면 ‘아포리아(aporia)의 드러냄’이다.
데리다는 ‘정치적 전환’을 감행하기 전에도 늘 아포리아에 주목해왔다. 데리다가 형이상학을 해체할 때 즐겨 쓴 방식이 바로 이것, 즉 일체의 형이상학적 담론에 내재된 논리적 궁지(또는 결정불가능성/계산불가능성)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발리바르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개념들, 요컨대 이데올로기, 계급, 당/국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이해해왔던 방식대로의 정치 개념 그 자체가 다다를 수밖에 없는 아포리아를 드러냄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내부에서부터 ‘해체’한다.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대중들의 공포』에는 데리다와 발리바르의 이런 유사점이 책 제목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령’이 아닌 유령‘들’, ‘대중’이 아닌 대중‘들’로 표기된 제목에서부터. 복수(複數)로 표기된 이 두 단어는 그 자체의 양면성/양가성을 드러낸다(이런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데리다의 개념은 오히려 ‘파르마콘’[pharmakon]이다). 가령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무력화하려는 자들에 맞서 그 유령의 유산을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우리는 유령을 지켜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를 괴롭혔던/괴롭히고 있는 유령을 넘어서야 함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우리는 유령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극복해야 한다”). 발리바르 역시 『대중들의 공포』에서 지배계급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혁명 세력으로서의’ 대중들에 주목함과 동시에(“우리는 대중들의 급진성을 믿어야 한다”) 지배계급의 권력에 공포를 느껴 수동적이 되는 ‘반동 세력으로서의’ 대중들에게도 눈길을 돌린다(“우리는 대중들의 수동성을 주시해야 한다”).
어쨌거나 데리다나 발리바르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들의 연구 대상이 불러오는 아포리아를 해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포리아를 끌어안음으로써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여는 데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때맞지 않게’ 도착한 이 두 책의 조우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데리다는 당대의 정치지형 내에서 ‘타자’로 존재하고 있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끌어안음으로써 종교적인 것과 정치의 관계라는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갔고, 발리바르는 대중들의 야누스적 얼굴을 끌어안음으로써 반폭력/시민인륜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때맞지 않음’을 단순한 ‘시대착오’의 일회적 에피소드로 끝낼지, ‘새로운 가능성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으로 만들지는 이제 이 두 책을 읽을 우리의 몫이다.
발리바르 이전에 알튀세르가 주목했던 데리다의 개념들은 ‘여백(marges)’과 ‘산포(disse′mination)’였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들을 통해 일체의 목적론을 부정한 새로운 유물론, 즉 마주침의 우발성과 혁명의 필연성을 사유하는 유물론을 구축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에서 라이언이 시도하고자 했던 바도 (비록 좀더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데리다와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일체의 ‘형이상학’(여기에는 실증주의, 자연주의, 객관주의 등을 비롯해 당/국가로 상징되는 중앙집권주의/중심주의, 자본주의의 신용체계 등이 모두 포함된다)에 대한 비판자라는 점에서 비교 가능하다는 것이 라이언의 전제였다.
발리바르도 형이상학의 해체라는 데리다의 테마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알튀세르나 라이언과 비슷하지만, 오히려 데리다의 방법론 자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들과 다르다. 데리다와 발리바르가 공유하는 이 방법론, 흔히 우리가 ‘해체(deconstruction)’라고 부르는 이 방법론을 내 식으로 풀자면 ‘아포리아(aporia)의 드러냄’이다.
데리다는 ‘정치적 전환’을 감행하기 전에도 늘 아포리아에 주목해왔다. 데리다가 형이상학을 해체할 때 즐겨 쓴 방식이 바로 이것, 즉 일체의 형이상학적 담론에 내재된 논리적 궁지(또는 결정불가능성/계산불가능성)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발리바르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개념들, 요컨대 이데올로기, 계급, 당/국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이해해왔던 방식대로의 정치 개념 그 자체가 다다를 수밖에 없는 아포리아를 드러냄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내부에서부터 ‘해체’한다.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대중들의 공포』에는 데리다와 발리바르의 이런 유사점이 책 제목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령’이 아닌 유령‘들’, ‘대중’이 아닌 대중‘들’로 표기된 제목에서부터. 복수(複數)로 표기된 이 두 단어는 그 자체의 양면성/양가성을 드러낸다(이런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데리다의 개념은 오히려 ‘파르마콘’[pharmakon]이다). 가령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무력화하려는 자들에 맞서 그 유령의 유산을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우리는 유령을 지켜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를 괴롭혔던/괴롭히고 있는 유령을 넘어서야 함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우리는 유령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극복해야 한다”). 발리바르 역시 『대중들의 공포』에서 지배계급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혁명 세력으로서의’ 대중들에 주목함과 동시에(“우리는 대중들의 급진성을 믿어야 한다”) 지배계급의 권력에 공포를 느껴 수동적이 되는 ‘반동 세력으로서의’ 대중들에게도 눈길을 돌린다(“우리는 대중들의 수동성을 주시해야 한다”).
어쨌거나 데리다나 발리바르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들의 연구 대상이 불러오는 아포리아를 해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포리아를 끌어안음으로써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여는 데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때맞지 않게’ 도착한 이 두 책의 조우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데리다는 당대의 정치지형 내에서 ‘타자’로 존재하고 있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끌어안음으로써 종교적인 것과 정치의 관계라는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갔고, 발리바르는 대중들의 야누스적 얼굴을 끌어안음으로써 반폭력/시민인륜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때맞지 않음’을 단순한 ‘시대착오’의 일회적 에피소드로 끝낼지, ‘새로운 가능성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으로 만들지는 이제 이 두 책을 읽을 우리의 몫이다.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는 ‘해체론’의 실천성
>>확대서평 _ 『마르크스의 유령들』
출처 : <교수신문> 2007년 10월 29일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된 1993년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1992)으로 대표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부활’이 횡행하던 시점이었다. 역자가 요약하듯 당시는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적 세계질서가 세력을 과시하면서 국내에서는 갓 출범한 문민정부가 세계화’의 논리를 주창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또한 영미 학계에서 이른바 해체론을 비롯한 ‘이론’의 전반적인 퇴조가 거론되기 시작하던 시점과도 겹쳤다. 위기의식의 발로였을지 동병상련의 심정이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데리다가 역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던 마르크스를 다시 불러낸 데는 복합적인 시대의 요청과 그 나름의 진지한 문제의식이 함께 있었으리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하필 왜 마르크스이고 더구나 그의 유령들인가?
데리다의 논의가 기대고 있는 근거는 우선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의 유령을 언급한 1848년 유럽의 상황과 이 책이 출판된 1993년 시점의 세계 사이의 시대적 유비관계이다. 어쩌면 역사가 한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마르크스의 진단이 여기에도 적용가능할지 모르겠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라는 긴급한 질문 앞에서 데리다가 “이미 보았다는 느낌이 주는 곤혹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아니 각종 종말론의 범람 앞에서 데리다가 목격하는 것은 역사의 희극적인 반복이 아니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대착오”이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이 선친의 유령에 대고 맹세한 뒤 읊조리는 저 유명한 대사, “시간이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가 데리다의 마르크스론을 이끄는 화두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햄릿과 마르크스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 역시 ‘이음매가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원초적인 타락”을 증언할 뿐이다.
왜 마르크스인가
그런데 선왕 햄릿의 유령과 공산주의라는 유령의 경우에도 그러했듯이, 문제는 이 시대착오적인 타락, 이러한 어긋남 혹은 탈구가 “무언가가 썩어 있는” 전체주의의 징후인 동시에 법률주의와 도덕주의를 넘어서는 해체불가능한 정의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공간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데리다에게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마르크스(주의)가 징후로 불러내기는 했지만 가능성의 공간으로까지 발견하지는 못한 지점들을 사유하는 데 필수적인 존재, 곧 “비가시적으로 가시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데리다가 지적하듯, “정의의 탈-총체화의 조건인 필연적인 어긋남은 현재의 조건이며, 동시에 현존자 및 현존자의 현존의 조건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과도한 절망이나 맹목적인 푸닥거리는 데리다의 의제에 들어있지 않다.
데리다에게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정당한 애도작업을 통해서만 불러내는 것이 가능한데, 햄릿이 아버지의 환영 앞에서 복수를 다짐하듯 마치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가상적 유령들이 내리는 명령을 정의와 책임이라는 해체의 해체 불가능한 조건들에 대한 사유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유령학(Hauntology)의 필요성
특히 데리다에게 살아 있는 현재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껏 진정으로 존재한 적이 없는 유령 타자들의 도래가 바로 ‘자본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망령들에 의해 억압된 정의의 본 모습이며, 이는 혼란스런 이데올로기들 중에서 진리를 판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신념과 결별하는 일과 통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 유형의 분석은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남아 있지만, 무수한 근대적 또는 탈근대적 부인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기획 또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기획을 정초하는 마르크스주의 존재론이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아적 종말론을 포함하고, 포함해야 하며, 포함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불충분”한 성격을 노정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환영들이 출몰하는 탈구된 현재의 상황은 마르크스의 정신을 부활할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한 번도 주제화되지 못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도래를 표시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사실 이데올로기와 진리를 확연히 구분 가능한 것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태도에 대한 비판은 이 책 전체에 걸쳐 마르크스의 망령들과 마르크스의 정신을 구별하려는 데리다의 입장을 집약시켜 주고 있는데, 이는 자칫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성과 현실사회주의-특히 스탈린주의-의 억압성 간의 역사적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적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낯익은 비판으로 오인될 소지도 많다. 테리 이글턴이 후쿠야마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두고 “정치적으로 가장 명시적일 때 가장 인상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에 특정한 마르크스주의의 형태들을 포함시킨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가라기보다, 데리다가 제기하는 정의와 책임의 문제가 마르크스주의 정치학 및 정치 일반에 과연 얼마나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구하느냐일 것이다. ‘탈구’의 이중성을 거듭 상기시키는 데리다의 발언은 프롤레타리아 및 노동자에 한정되지 않는 모든 억압된 유령들, 즉 계급, 국가, 성, 인종을 초월한 모든 역사적인 타자들에 대한 정의에 의거해 마르크스주의를 전화하자는 쪽에 가깝다. 데리다가 자신의 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에 답하며 부연하듯이, 문제는 분석과 정치적 참여의 새로운 차원, 곧 사회적 차이들과 사회적 세력들의 대립을 가로지르는 정치적 참여의 필요성이다.
해체론은 어디로?
요컨대 데리다의 유령학은 “이질적인 것 그 자체가 서로 결합하는 곳에, 탈구와 분산 혹은 차이를 손상시키지 않고 타자의 이질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놓는 일”이 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데리다의 탈구 개념에 내장된 ‘존재의 불가능성’ 때문에 사회주의의 이상을 물질적인 사회 내에 실현하려는 미래의 모든 시도들이 선험적으로 실패할 운명에 처했다는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비판은 데리다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과도한 인정일망정 정확한 사태 판단은 아니다. 따라서 탈구의 독특성에 공감한다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전 지구에 걸쳐 모든 남성과 여성들은 오늘날 어느 정도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들”이고 오늘날처럼 기술적인 것과 미디어가 환원불가능해진 현재 상황에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모든 지식인의 책무가 된다.
그런 뜻에서 해체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속에서만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정신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시도이며, 어떠한 해체에도 환원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해체의 가능성 그 자체로서의 해체불가능한 것, 다시 말해 “어떤 구조적인 메시아주의의 형식성, 종교 없는 메시아주의, 심지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며 어떤 법이나 권리, 나아가 인권과도 구별되는 정의의 이념이자 현재 통용되고 규정되는 속성과 구별되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추구하는 시도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비판적 (탈)전유를 데리다가 해체론자로서 구상하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원격기술과학 시대의 10대 재앙들-실업, 이민, 무역전쟁, 자유 시장, 외환부채, 무기거래, 핵무기, 종족내전, 국제 폭력조직, 국제법의 비실효성-은 데리다가 내린 가장 현실적인 정치적 판단인데, 이러한 난제들은 과연 탈구의 징후인 동시에 ‘메시아적 긍정’의 가능성을 지칭하고 있는가.
마르크스주의의 자기비판과 메시아적인 정신에 공감하는 지식인들이 이 난제의 해결을 위해 연합하는 느슨한 ‘우애의 연대’는 제도나 조직이 없는 결합이다. 따라서 이 연대가 탈구된 현대 사회에서 어떤 종류의 정치력을 발휘할 것인가는 의문의 여지가 많고, 대다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반론도 이점에 집중돼 있다. 마르크스의 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해체론과 연결 짓는 고리인 ‘탈구’ 개념은 원격기술과학 시대에 어김없이 관철되는 ‘텅 빈 보편성’의 구조에 대한 사유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발상의 소산이지만, 동시에 그렇게 이음매가 어긋난 현실에 존재하는 무수한 주체들의 낱낱이 해체된 현실도 가리킨다. 물론 이러한 이중적 탈구 자체는 하나의 전략적 선택이자 정의의 가능조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10대 난제를 꼽는 데리다의 진단을 평가하건대, 정치성과 정의의 가능 조건이자 불가능의 조건에 대한 해체론적 사유의 틀이 ‘해석’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실천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해체론자의 실천이 아니라 해체론 자체의 실천성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는 것이다.
끝으로, 재출간된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은 기존의 번역, 내지는 중역들이 회피한 데리다의 독특한 언어에 한층 살갑게 다가갈 수 있는 길잡이의 역할에 손색이 없다. 다만 역자의 방대하고 꼼꼼한 주석과 용어해설 및 원문에 충실한 번역 덕택에 복합적인 데리다의 진면목을 추적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됐지만, 때로는 독서를 늦추고 사유를 더디게 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역자 자신의 재전유 노력이 좀 더 묻어나는, 좀 더 우리 입맛에 맞는 번역을 기대해본다.
강우성 / 한성대·영문학
필자는 ‘에머슨과 미국 르네상스 시대의 문체 연구’로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미국문학사』, 『이론 이후 삶: 데리다와 현대이론을 말하다』 등이 있다.
>>확대서평 _ 『마르크스의 유령들』
출처 : <교수신문> 2007년 10월 29일
데리다의 논의가 기대고 있는 근거는 우선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의 유령을 언급한 1848년 유럽의 상황과 이 책이 출판된 1993년 시점의 세계 사이의 시대적 유비관계이다. 어쩌면 역사가 한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마르크스의 진단이 여기에도 적용가능할지 모르겠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라는 긴급한 질문 앞에서 데리다가 “이미 보았다는 느낌이 주는 곤혹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아니 각종 종말론의 범람 앞에서 데리다가 목격하는 것은 역사의 희극적인 반복이 아니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대착오”이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이 선친의 유령에 대고 맹세한 뒤 읊조리는 저 유명한 대사, “시간이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가 데리다의 마르크스론을 이끄는 화두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햄릿과 마르크스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 역시 ‘이음매가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원초적인 타락”을 증언할 뿐이다.
왜 마르크스인가
그런데 선왕 햄릿의 유령과 공산주의라는 유령의 경우에도 그러했듯이, 문제는 이 시대착오적인 타락, 이러한 어긋남 혹은 탈구가 “무언가가 썩어 있는” 전체주의의 징후인 동시에 법률주의와 도덕주의를 넘어서는 해체불가능한 정의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공간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데리다에게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마르크스(주의)가 징후로 불러내기는 했지만 가능성의 공간으로까지 발견하지는 못한 지점들을 사유하는 데 필수적인 존재, 곧 “비가시적으로 가시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데리다가 지적하듯, “정의의 탈-총체화의 조건인 필연적인 어긋남은 현재의 조건이며, 동시에 현존자 및 현존자의 현존의 조건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과도한 절망이나 맹목적인 푸닥거리는 데리다의 의제에 들어있지 않다.
데리다에게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정당한 애도작업을 통해서만 불러내는 것이 가능한데, 햄릿이 아버지의 환영 앞에서 복수를 다짐하듯 마치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가상적 유령들이 내리는 명령을 정의와 책임이라는 해체의 해체 불가능한 조건들에 대한 사유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유령학(Hauntology)의 필요성
특히 데리다에게 살아 있는 현재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껏 진정으로 존재한 적이 없는 유령 타자들의 도래가 바로 ‘자본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망령들에 의해 억압된 정의의 본 모습이며, 이는 혼란스런 이데올로기들 중에서 진리를 판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신념과 결별하는 일과 통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 유형의 분석은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남아 있지만, 무수한 근대적 또는 탈근대적 부인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기획 또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기획을 정초하는 마르크스주의 존재론이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아적 종말론을 포함하고, 포함해야 하며, 포함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불충분”한 성격을 노정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환영들이 출몰하는 탈구된 현재의 상황은 마르크스의 정신을 부활할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한 번도 주제화되지 못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도래를 표시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사실 이데올로기와 진리를 확연히 구분 가능한 것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태도에 대한 비판은 이 책 전체에 걸쳐 마르크스의 망령들과 마르크스의 정신을 구별하려는 데리다의 입장을 집약시켜 주고 있는데, 이는 자칫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성과 현실사회주의-특히 스탈린주의-의 억압성 간의 역사적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적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낯익은 비판으로 오인될 소지도 많다. 테리 이글턴이 후쿠야마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두고 “정치적으로 가장 명시적일 때 가장 인상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에 특정한 마르크스주의의 형태들을 포함시킨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가라기보다, 데리다가 제기하는 정의와 책임의 문제가 마르크스주의 정치학 및 정치 일반에 과연 얼마나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구하느냐일 것이다. ‘탈구’의 이중성을 거듭 상기시키는 데리다의 발언은 프롤레타리아 및 노동자에 한정되지 않는 모든 억압된 유령들, 즉 계급, 국가, 성, 인종을 초월한 모든 역사적인 타자들에 대한 정의에 의거해 마르크스주의를 전화하자는 쪽에 가깝다. 데리다가 자신의 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에 답하며 부연하듯이, 문제는 분석과 정치적 참여의 새로운 차원, 곧 사회적 차이들과 사회적 세력들의 대립을 가로지르는 정치적 참여의 필요성이다.
해체론은 어디로?
요컨대 데리다의 유령학은 “이질적인 것 그 자체가 서로 결합하는 곳에, 탈구와 분산 혹은 차이를 손상시키지 않고 타자의 이질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놓는 일”이 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데리다의 탈구 개념에 내장된 ‘존재의 불가능성’ 때문에 사회주의의 이상을 물질적인 사회 내에 실현하려는 미래의 모든 시도들이 선험적으로 실패할 운명에 처했다는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비판은 데리다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과도한 인정일망정 정확한 사태 판단은 아니다. 따라서 탈구의 독특성에 공감한다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전 지구에 걸쳐 모든 남성과 여성들은 오늘날 어느 정도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들”이고 오늘날처럼 기술적인 것과 미디어가 환원불가능해진 현재 상황에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모든 지식인의 책무가 된다.
그런 뜻에서 해체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속에서만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정신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시도이며, 어떠한 해체에도 환원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해체의 가능성 그 자체로서의 해체불가능한 것, 다시 말해 “어떤 구조적인 메시아주의의 형식성, 종교 없는 메시아주의, 심지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며 어떤 법이나 권리, 나아가 인권과도 구별되는 정의의 이념이자 현재 통용되고 규정되는 속성과 구별되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추구하는 시도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비판적 (탈)전유를 데리다가 해체론자로서 구상하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원격기술과학 시대의 10대 재앙들-실업, 이민, 무역전쟁, 자유 시장, 외환부채, 무기거래, 핵무기, 종족내전, 국제 폭력조직, 국제법의 비실효성-은 데리다가 내린 가장 현실적인 정치적 판단인데, 이러한 난제들은 과연 탈구의 징후인 동시에 ‘메시아적 긍정’의 가능성을 지칭하고 있는가.
데리다는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의 승리가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시점에서 마르크스를 들고 나와 그 정신의 필요성을 들춘다. 그림은 레닌 동상이 철거되는 장면. |
끝으로, 재출간된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은 기존의 번역, 내지는 중역들이 회피한 데리다의 독특한 언어에 한층 살갑게 다가갈 수 있는 길잡이의 역할에 손색이 없다. 다만 역자의 방대하고 꼼꼼한 주석과 용어해설 및 원문에 충실한 번역 덕택에 복합적인 데리다의 진면목을 추적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됐지만, 때로는 독서를 늦추고 사유를 더디게 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역자 자신의 재전유 노력이 좀 더 묻어나는, 좀 더 우리 입맛에 맞는 번역을 기대해본다.
강우성 / 한성대·영문학
필자는 ‘에머슨과 미국 르네상스 시대의 문체 연구’로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미국문학사』, 『이론 이후 삶: 데리다와 현대이론을 말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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