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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다른 곳을 사유하자』 - 지식의 ‘횡단자’들 조명

by 내오랜꿈 2007.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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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지식인론'에 관한 책이 갑자기 유행하는 느낌이다. 지난 번에 인용한 [지식인을 위한 변명] - 여전히 유효한 사르트르의 지식인론이나 [책과 삶] 침묵은 禁, 저항하고 비판하라 같은 책들... 

라피에르의 이 책은 앞의 두 책과 같은 류의 '지식인론'에 관한 책은 아니다.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통행', '이주' ,'이동', '이산', '혼합', '전환' 등 총 6개의 장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는 것이 조금은 특이하다. 오히려 이 책보다 인상적인 것은 <교수신문>에 실렸던 김정한의 서평이었다.


지식의 ‘횡단자’들 조명 … 깊은 ‘쟁점’ 없어 
기획서평_ 『다른 곳을 사유하자』 
니콜 라피에르 지음 | 이세진 옮김 | 푸른숲 | 2007

김정한 / 서강대 박사수료·정치학 
출처 : <교수신문> 2007년 10월 01일 


 
자신의 존재조건 때문에 대학에서 밀려나거나 주변인으로 배제되고, 망명을 경험해야 했던 지식인들. 라피에르는 이들을 배제, 망명, 주변인의 경험을 통해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어 창조적인 사유를 전개할 수 있었던 지식인으로 명명하면서 이들이 펼친 ‘실천적 사유’의 흔적을 더듬어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의 책에는 쟁점이 없다. 왼쪽부터 몽테뉴, 만하임, 벤야민, 아렌트, 베유. 

책장을 정리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다양한 색깔을 지닌 책들을 깔끔하게 분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분과학문별로 책들을 분류하다보면, 어디에 꽂을지 애매해서 적당히 우겨 넣어야 할 책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기도 한다. 어쩌면 분과학문의 경계를 벗어난 통합 연구의 필요성을 이보다 더 적절히 드러내주는 일상 사례도 없을 듯하다. 『다른 곳을 사유하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회학·인류학·역사학 등을 아울러 다문화연구에 매진하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자,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다학문연구센터 공동책임자이며, <코뮈니카시옹>의 공동편집자인 저자의 소개말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행보를 따라가는 이 책도 다 읽은 다음 어떤 칸에 꽂아야 할지 망설이게 만든다. 

정해진 길과 안정된 삶을 벗어나 사회적 위계와 국경을 횡단하며 “다른 곳을 사유하자”는 라피에르의 전언도 여기에 부합한다. 그것은 친숙한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이주하고 자유롭게 떠돌면서 외부의 사유를 견지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차별과 편견에 사로잡힌 사회적 장벽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삶과 사유를 실천한 지식인들을 ‘노마드(nomad) 지식인’, ‘의식 있는 파리아(paria)’, ‘횡단자(traversier)’ 등으로 명명한다. 그들은 사회의 이방인이자 주변인이며 소수자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수많은 지식인들 가운데 비교적 낯익은 이름들만 추려보자면, 이 계보에 속하는 이들은 몽테뉴에서 시작해 짐멜, 벤야민, 아렌트, 만하임, 사이드, 베유 등을 거쳐, 호보(hobo, 뜨내기 노동자)와 디아스포라(diaspora) 및 서발턴(subaltern) 연구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 조건 때문에 대학에서 밀려나거나 주변인으로 배제되거나 유배·망명을 겪어야 했던 자들이고, 바로 그 때문에 학문의 경계와 국경선을 유랑하며 창조적인 사유를 전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라피에르에게 비판적 지식인은 곧 ‘이동한 사람’이다. 물론 ‘이동한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 동일하지는 않다. 가령, ‘학출노동자’인 위장취업자는 강한 윤리와 용기를 갖고 노동자의 삶으로 이동하긴 했지만, 언젠가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제한적인 이동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계급 상승을 성취하는 전향자는 계급적 이동 과정에서 지적 창조성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공적 지식인으로서 지배 엘리트의 역할에 안주할 때 도식화된 시각과 진실 왜곡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이는 저자가 “전향자이자 전향자의 아들”인 부르디외를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이 책에서 그녀가 시종일관 비판하는 지식인은 부르디외가 유일한데, 그간 부르디외가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인식된 것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 책은 엄격한 학술서가 아니라 에세이이며, 그것도 ‘프랑스 에세이’라는 데 유의해야 한다. 과학과 문학이 딱히 구별되지 않는 프랑스식 담론을, 수사학을 중시하는 에세이로 녹여냈다고 생각하면 대략 어떤 모습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지식인들의 삶은 주마간산 격이고, 삶과 사유의 관계도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른다. 따라서 오늘날의 정세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조건이나 역할 등과 같은 까다로운 쟁점에 관해 깊이 있는 논의를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실망스럽겠지만, 저자 스스로 ‘기분 전환의 책’이라고 하듯이 에세이는 에세이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에세이로 즐기기만 하기에도 조금 껄끄러운 대목이 없지 않다. ‘좋았던 옛 시절’에 비판적 지식인은 곧 좌파 지식인이었고, 이는 좋든 싫든 하나의 역사로 남아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다른 곳을 사유하는’ 지식인의 계보에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곳을 사유한’ 좌파 지식인이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은 라피에르가 뭔가를 부당하게 생략한다는 의문이 들게 한다. 그들 또한 지배 욕망과 정착을 거부한 사회의 이방인·주변인·소수자일 뿐 아니라, 철학·경제학·정치학 등을 넘나들며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국제주의를 주창하며 국경선을 극복하고자 한 ‘이동한 사람’이 아닌가. 

이에 대해 아마 라피에르는 좌파 지식인이 결국 ‘이동’을 중단하고 ‘정착’했다고 응수할 것이다. 예컨대 그녀는 부르디외 비판에서 드러나듯이 직접적인 현실 참여에 부정적이며, 또한 공산당에 가입한 루카치가 아니라 당 가입을 거부한 만하임에게 호의적이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식인이 되어 특정 당이나 계급을 방어하는 데 가담하지 않겠다는, 좀더 의미심장한 거부”를 선택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좌파 지식인과 노마드 지식인의 결정적인 차이는 당 가입 여부, 혹은 더 일반화시켜 말하자면 정치조직에 대한 태도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러나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이 연구실에서 다른 곳을 사유하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면, 사회를 변화시키고 대중들과 마주치기 위해 지식인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조직(당이든 아니든)이 아닌가. 

좌파 지식인의 핵심 화두는 지식인과 노동계급의 마주침이었고, 공산당은 대중들과 마주치기 위한 필수 매개였다. 물론 좌파 지식인들은 스탈린주의와 냉전체제의 확립과정에서 탈당이나 침묵을 선택해야 했지만, 대중들과 마주치기 위해 정치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에는 여전히 진실의 흔적이 묻어 있다. 그 치열했던 역사의 한 자락은, 일생 동안 ‘공산주의 지식인’으로 살아온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는 몰락해가는 중유럽을 경험하며 자유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지식인이 냉전체제에서 일어난 공산당의 학살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당을 떠나지 못했던 여정을 흥미롭게 드러낸다. 홉스봄이 마지막까지 강조하는 것도 정치조직이다. 좌파 지식인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는 정치조직이 없다면 지식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라피에르에게 되물을 것이다.

비판적 지식인은 끊임없는 외부의 사유를 통해 창조적인 지식의 영역을 넓혀가야 하며, 또한 정치조직을 매개로 한 대중들과의 마주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 대학제도는 점차 지식인들의 연구공간에서 멀어지고 있고, 이미 오래 전에 설 자리를 잃은 공산당을 대신해 대중들과의 마주침을 담보해줄 정치조직의 존재는 아직 불투명하다. 이 책의 전언처럼 비판적 지식인이 곧 노마드 지식인이라면, 이제 그는 어디로 떠날 것인가. 비판적 지식인은 안정적인 연구 공간과 더불어 자신의 이론적·정치적 견해와 함께 할 수 있는 정치조직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대중들과 마주칠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김정한 / 서강대 박사수료·정치학 



필자는 서강대에서 ‘91년 5월투쟁 연구: 대중과 폭력’으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대중운동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대중과 폭력: 1991년 5월의 기억』, 역서로는 『제국이라는 유령: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론 비판』, 『폭력의 세기』,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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