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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발터 벤야민 선집

by 내오랜꿈 2007.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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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깊이읽기]감성은 섬세, 사유는 견고한 산문가 
▲ 발터 벤야민 선집 1~3 … 발터 벤야민 | 길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출처 : <경향신문> 2007 12 07 


발터 벤야민(W Benjamin)의 사유는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지닌다. 그러나 간단치 않다. 뛰어난 사상가가 흔히 그러하듯,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은 첨예하게 현실분석적이면서도 비의적이며, 이런 형이상학적·신학적 요소는 다시 ‘현재적 인식 가능성’ 속에서 사회의 변혁 가능성을 끈질기게 추구한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쓰인 글의 주제는 무척 다양하다. 그는 근본적으로 마르크시즘적 문예이론의 자장 안에서 움직이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가 유물론적 문예론의 재구성이나 매체미학, 지각이론이나 비평론 등으로 고갈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인식의 방법이나 현대성의 이해, 자본주의 체제 분석과 상품사회론, 문화정치론과 도시학 나아가 글쓰기의 실천성도 이것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적어도 역사를 조화로운 동질적 시간이 아닌 ‘억압과 야만의 연속사’로 보는 한, 그래서 이 재앙의 보편사가 비판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거나, 또 현대적 삶의 근본특징이 경험의 파편화에 있다거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새로움이란 ‘이미 있어 왔던 것들의 영원한 반복’일 뿐이라거나, 이런 반복성은 상품물신주의에서 온다든가, 혹은 사진이나 영화, 연극과 같은 현대예술이 어떻게 대중과 만나고 이때의 영향미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또 좀더 일반적으로 대도시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글과 기억과 행복은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등에 대해 고민하는 한, 우리는 벤야민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벤야민의 글은 무척 까다롭다. 그것은 직설적이기보다는 비유적이고, 문장과 문장의 논리는 자주 비약하며, 그 때문에 의미는 마치 비늘처럼, 부채살처럼 응축되어 있다. 사상의 지형은 체계적이기보다는 비체계적이지만, 그렇다고 사유의 일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파편적이고 이질적이다. 이것은 그가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운동, 특히 초현실주의자와의 교류를 통해 폐허나 꿈의 가치, 몽타주 기법 등을 배웠고(영향관계), 유대인 지식인이자 재야비평가로서, 또 국적상실자로서(1933년 이후) 나날을 위기 속에 살아야 했던 실존적 경험으로 인한 것이었다(전기적 사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데, 어떻게 글이 반듯하게 발표될 수 있었겠는가. 또 체계란 파시즘적 일사불란함이기도 했다.(이른바 ‘체계강제(Systemzwang)’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은 여기에서 배운 것이다.) 이 땅에서 그의 번역이 지체되었거나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온 이유는 이 점에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나온 세 권의 벤야민 번역서는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최성만 교수 등 세 명의 벤야민 전공자가 해낸 것이고, 특히 오랫동안의 준비와 기획 아래 전체 10권 선집(원전은 총 14권이다) 중 첫 성과물로 나온 까닭에 더욱 기대된다. 각 권은 그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주요 글 또는 주제를 제목으로 달고 있고, 각각의 해제 아래 관련 글이 수록되어 있다. 수없이 퇴고를 거쳐야만 정갈하게 되는 벤야민의 우리말 육성을 좀더 온전한 전도(全圖) 아래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권 ‘일방통행로/사유 이미지’는 정치적·성찰적 비평에세이고, 2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는 매체미학과 관련된 글 모음이다. 3권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베를린 연대기’는 문학적·자전적 에세이다. 



흥미로운 사실의 하나는 번역자가 첫 권으로 ‘일방통행로/사유 이미지’를 택했다는 점이다. 기술복제나 역사철학에 관한 문제적인 글도 좋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보들레르나 프루스트 등에 대한 글이고, 이런 문학론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은 ‘사유 이미지’와 같은 글이다. 거기엔 개인의 내밀한 사연 이외에 엄혹한 시대적 상황 또한 스며 있다. 벤야민을 제대로 읽으려면 우리는 자주 숨을 멈추어야 한다. 한 문장 문장씩 음미하듯 읽어야 하고, 읽는 도중 자주 책장을 덮어야 한다. 이 글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벤야민이 얼마나 감성적으로 섬세하면서도 사유적으로 견고했던 사람인가를, 그는 참으로 뛰어난 산문가임을 생각하게 된다. 강령이나 테제 없이도 이 같은 울림을 주는 작가는 희귀하다. 

벤야민 수용과 관련하여 우리가 갈 미래의 길은 여러 단계다. 우선 정확하게 번역해야 하고, 이런 번역서를 바탕으로 믿을 만한 안내서가 여러 권 나와야 한다. 그 사상과의 비판적 대결이 있어야 하고, 좋은 단행본도 쌓여야 한다. 학위논문이 아닌, 더 보편적인 이론지평에서 재해석한 우리말 단행본 저서는 아직 없다. 그와 같은 문예이론가는 이 후에 나올까? 한국에서의 벤야민 완성은 그때가 될지도 모른다. 

(벤야민 선집 관련 인터뷰 기사는 아래 한겨레 참조) 

“베냐민 번역, 학계 미국 편식 깰 토대됐으면” 
인터뷰 / 베냐민 선집 마무리 단계 최성만 교수 

한승동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05 

내오랜꿈 ----------------------------------------------------------------


베냐민... 뭐, 원칙대로 표기하겠다는 건 좋은데, 이미 벤야민으로 통용되고 있고, 그렇게 표기한다고 크게 잘못인 것도 아닌데 굳이 베냐민으로 밀고 나가야 하나? <한겨레>의 괜한 '고집'이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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