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에게 현재의 역사는 인류의 '전사'였고, 그래서 그것은 다가올 역사를 위한 하나의 잠정적 시기에 불과했다. 참으로 정당한 역사는 그의 눈에 미래의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의 억압사를 인류사의 앞선 단계이게 하고, 폭력이 없는 그래서 참으로 진실된 역사를 마침내 현재적 경험이 되게 할 그런 날이 정녕 올 수 있을까? 인간다운 삶은 지금 여기에서 과연 어느 정도까지 실현될 수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이 비관적이지 않게 되기란 오늘날에는 지극히 어려워 보인다."(『가면들의 병기창』, p.498)
발터 벤야민의 사유를 따라가는 문광훈은 벤야민의 정치론을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벤야민이 그러했듯 이 구절은 벤야민의 서술일 수도 있고 문광훈의 서술일 수도 있다. 아무려면 어떨까? 벤야민의 삶보다 더 비극적으로 다가오는, 암울함을 맛보게 하는 구절이다.
벤야민은 한 번쯤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철학자인 것 같다. 현대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선가는 결국 비트겐슈타인이나 벤야민으로 회귀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난해하지만 간결하고 명확하다. 무슨 결벽증 환자인 것처럼 논리적 사고의 끝을 보려 한다. 그가 주장하는 명제를 이해하면서도 그의 글쓰기 방식은 가끔씩 사람을 열받게 만든다. 자신이 내세우는 명제의 증명이 목적이라면 핵심적 추론 몇 가지만 다루어도 될 것 같은데 그의 끝없는 언어유희 같은 수많은 추론이나 증명들의 태반은 이해하지 못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나에겐 『철학적 탐구』가 그러하다.
그에 반해 벤야민은 끝도 시작도 없다. 여기도 출입구고 저기도 출입구다. 어떤 경로를 통해 그의 사유 속으로 들어가든 상관 없다. 또한 그의 사유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결론은 없다. 끊임없는 독해만 있을 뿐이다. 그 독해의 과정, 그의 사유를 따라가는 길은 꽤나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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