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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베냐민, 비트겐슈타인

『일방통행로』 - 기억의 책 속에서 불러내는 사유 이미지

by 내오랜꿈 2016.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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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누구나 한 번쯤 읽었거나 들어보았을 법한 문장이다. 누군가 출처 없이 인용했을 수도 있고, 자주 접하다 보니 익숙한 문장이 되어 마치 자신의 기억 속에 저장된 것처럼 끄집어내 썼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가 어디 한둘일까만 내가 알기에 이 문장은 벤야민의 『일방통행로』(p.119)가 원출처일 것이다. <아크 등(燈)>이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는데 딱 이 한 문장만 쓰여 있다. 왜?라는 의문부호를 연상시키는 단순한 의미일 수도 있을 것 같고, 무슨 대단한 철학적 '아포리아'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일방통행로』에서 하나의 표제어에 한 문장만 쓰여 있는 것은 이 <아크 등(燈)>과 <남자용>이라는 표제어가 붙은 곳 뿐이다. <남자용>에는 "설득은 비생산적인 것이다."라는 문장이 붙어 있다. 이 문장 자체만 가지고는 도대체 이게 표제어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남자용>이라는 표제어보다 앞서 나온 <주유소>란 글에서 "삶을 구성하는 힘은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p.69)고 서술하고 있는 것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벤야민은 <주유소>란 단편을 통해 문학의 효과를 이야기하면서 신념 내지 설득이 아니라 사실로부터 구성한 사유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라는 걸 강조하고 있다. 곧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더 적합한 형식들, 예컨대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pp69~70)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도 <남자용>이라는 표제어와의 매칭은 여전히 미완이거나 생각하기 나름일 것이다. 




다시 <아크 등(燈)>으로 돌아가 보자. "누군가를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할까? <남자용>이라는 표제어와는 달리 이 문장은 앞뒤 연관성이 모호하다. 단지 바로 뒤에 나오는 <발코니>라는 단편에 비슷한 이미지의 또다른 '아포리아'를 던져줄 뿐이다.


제라늄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무엇보다 그들의 이름에 매달린다.

아스포델  사랑 받는 사람의 배후에서는 성(性)의 심연이 가족의 심연처럼 닫힌다.

선인장 꽃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했으면서 옳다고 우길 때 기쁨을 느낀다.

물망초  회상 속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축소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관엽식물  결합하기 전에 장애가 생기면 나이가 들어 밋밋하게 함께 사는 모습에 대한 상상이 곧바로 그 자리에 나타난다.

(pp 119~120)


벤야민의 글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자유로운 단상을 통해 사유이미지를 쌓아 올린다. 『일방통행로』만 하더라도 60편의 표제어와 사유 사이의 간격은 천차만별이다. 표제어와 단상이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도 있고 몇 번을 읽어도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것도 있다. 사유의 여백이라고 할까? 마치 여백을 남겨두어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채우게끔 하려는 듯이. 물론 그런 건 아닐 터인데 벤야민을 읽다 보면 이 여백을 채우려 애쓰게 된다. 그러다 보면 몇 개의 표제어로 몇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려 해도 어딘가 모를 미묘한 여운과 끊어낼 수 없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읽으면 또다시 새로이 사유하게 된다. 지금 사유하는 나는 이미 그때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벤야민 읽기는 언제나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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