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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베냐민, 비트겐슈타인

삶에 목적이 필요할까 - 비평가로서의 삶

by 내오랜꿈 2019.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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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냐민 – 삶에 목적이 필요할까?


베냐민에게는 한 이념을 표현하는 철학의 기술이 곧 삶의 기술이다. 칸트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곧장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는 실존구상. 


베냐민의 사유는 논리적으로 설명된 세계 구축이라는 이상 대신 모순된 동시대성을 탐색하는 데 기초를 둔다.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자리에, 순간을 누리는 도취와 방종을 진정한 감각의 순간으로 인식하며 종교성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철학으로 이 모든 것의 밑그림을 그린다. 베냐민의 역사철학은 마르크스주의처럼 구원의 순간을 만들어 내거나 예언하지 않으면서 구원 가능성을 열어둔다.



▲ 발터 베냐민                             ▲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 표지



$$ 프리랜서 비평가로 - 베냐민


“한 사람의 성향, 그러니까 그의 반응 방식이 세세히 알려져 있고, 세상의 사건이 그 사람에게 미칠 영향들이 알려져 있다면, 그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수행할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운명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 → 정말 그럴까? 정말 이런 방식으로 인생이 결정되고 예측될 수 있을까? 고유한 운명까지도? 인간이 자신의 삶을 구성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나 될까?


베냐민이 보기에 초기 낭만주의 사상가의 주요 동력은 비평활동이, 비평하는 주체(예술비평가)와 비평되는 객체(예술작품) 모두를 변화시킨다는 데 있다. 주체와 객체 모두 비평 과정에서 변한다. 이상적인 경우 진리의 방향으로 변한다. 


비평을 통해 예술작품이 끊임없이 보완되고 완성되어간다는 베냐민의 명제는 예술비평의 기능을 “판단이 아니라 작품의 완성, 보완, 체계화”로 본다. 이로써 예술비평가는 예술작품의 공동 창조자로서의 지위를 얻는다. 이것은 예술작품은 본질적으로 고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그 존재와 의미가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한다고 보는 관점을 전제로 한다. 한 작품의 본질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그렇다. 실제로 끊임없이 자신을 비평하는 것이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생각으로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증명하는 아주 특별하고 놀라운 능력이 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을 생각할 줄 안다.” 우리는 모두 매우 고유한 인지 과정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비평되는 객체(생각된 생각)와 비평하는 주체(생각하는 생각)는 변화할 뿐 아니라 실제로 일치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비평은 예술작품을 반성하게 하고, 자의식과 자기인식으로 이끄는 실험과 같다. … 비평이 예술작품의 인식인 한, 비평은 예술작품의 자기인식이다. 비평이 예술작품을 판정하는 한, 비평은 예술작품의 자기 판정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다.”(<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


베냐민의 ‘낭만주의 예술비평 개념’의 핵심이다. 베냐민은 이 일에 평생을 바치고자 했다. 이 활동이, 스스로를 ‘완성되어 가는 작품’으로 인식하는 그에게 뭔가 효력을 낼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생각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즉 모든 인간은 스스로 그런 작품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비평적으로 점검하고 인식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을 비평, 또는 간단히 철학이라 부를 수 있다. 베냐민에게 비평은, 곧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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