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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베냐민, 비트겐슈타인

치직의 이발사 -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by 내오랜꿈 2019.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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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가 어려운 이유.

 

철학 활동은 '다른 세계'로 가는 이 길을 안내할 때, 사고를 설명하는 철학 활동이 없으면 언제나 이 길을 방해하고 모호하게 하고 얽히고설키게 꼬아놓고 심지어 차단할 위험성도 있는 수단, 즉 언어를 이용한다.

 

<논리철학논고>가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 상이한 언어 형식으로 자신의 사고를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절대적인 명확성과 오해 불가능성을 기반으로 하는 수학적 논리와 추상적 '상징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은유적이고 시적인 비유적 '역설적 언어'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베를린과 맨체스터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고, 케임브리지에서 러셀에게 철학을 공부했다. 논리적 계산과 추상적 상징에 능숙했다. 그리고 빈 모더니즘의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 칼 크라우스의 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등.

 

칼 크라우스의 회의론은 인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적 가치를 의심한다. 빈 모더니즘의 핵심 질문! 언어가 결국 맞서 싸워야 하는 질병인가? 아니면 유일한 치료방법인가? 언어가 진정한 세계 인식과 자기 인식을 방해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가?

 

$$$ 사실의 그림

 

<논리철학논고>의 출판은 외면 받았다. 구원투수는 버트런드 러셀.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출판을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호텔방에서 러셀을 만나 나흘을 토론한다.

 

러셀 : ‘말하다(sagen)’보여주다(Zeigen) 사이의 중요한 차이에 대해 세 가지 논점을 종이에 적었다면, 종이에는 아주 명확히 세 가지 논점이 적혀 있으므로 세계에는 적어도 세 사물이 있다.”는 명제가 이제 사실이고 유의미한 것 아닌가.

 

비트겐슈타인 : 세 논점이 적힌 종이와 관련하여 유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종이에는 세 논점이 있다라는 명제뿐이다. 이것은 세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의미할 뿐 아니라, 러셀의 손에 있는 종이가 명확히 보여주듯이 또한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따르면, 유의미하고 그래서 사실일 수 있는 명제는 사실의 그림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이런 그림/명제를 언어적으로 이해하면 이렇다. 그림이 참된 명제/그림이 되려면 어떤 종류의 사실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야 하는지를, 그림의 내용이 명확히 보여준다.

 

그림이 모사하는 것이 그림의 의미이다. ($2.221)

 

그림의 참과 거짓은 그림의 의미와 현실이 일치하느냐 불일치하느냐에 있다. ($2.222)

 

명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상형문자를 생각해보자. 상형문자는 그것이 기술하는 사실들을 묘사한다. ($4.016)

 

그 명제가 주장하는 사실의 그림이 실제로 세계에 존재하면, 달리 표현해서 명제가 주장하는 것이 또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면 그 명제는 확실히 참이다. <논고>의 첫 두 명제에 따르면 그렇다.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1)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1.1)

 

세계에 세 논점이 있다같은 러셀의 명제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논고>의 두 명제에서 밝혔듯이 (총체적) ‘세계자체는 사실이 아니라, 그저 사실들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총체적 세계와 연관된 명제를 유의미하다고 보지 않는 주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세계 자체가 사실이라면, (단지 하나의 사실인) 세계는 (총체적) 세계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면 세계는 특정 원소들의 집합으로(사실들의 총체) 정의되는 동시에 스스로 집합의 한 원소로(하나의 사실) 정의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확신에 따르면 집합이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는 논리 형식, 논리적 혼돈과 궁극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모순으로 이끈다.

 




이러한 집합이론의 패러독스에 대한 사례는 러셀이 1918년에 고안한 치직(Chiswick)의 이발사를 들 수 있다(논리학의 오래된 패러독스인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와 유사한 형식이다). 치직에 사는 모든 주민은 스스로 제 머리를 깎지 못하고 이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는 단 한 명뿐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발생한다. 이 이발사의 머리는 누가 깎아줄까?

 

모순 없는 대답은 불가능하다. 이발사는 스스로 제 머리를 깎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주민의 머리를 깎아주는 '유일한' 이발사이면서 동시에 '모든' 주민이라는 집합에 속한다. 만약 그가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깎으면, 주어진 집합의 정의인 "스스로 제 머리를 깎지 못하는 모든 주민의 머리를 깎아준다에 모순된다. 치직의 이발사가 대머리라고? 농담 삼아 웃을 수 있지만 이때 발생하는 불가피한 집합 이론의 혼돈과 모순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실들의 총체로 정의된 세계가 스스로 사실이 되면 안 되는 비트겐슈타인의 근거는 '언어철학적 이발사'라 할 수 있다. <논리철학논고>에 따르면, 세계 자체가 사실이 아니면 총체적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유의미한 명제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세계에 세 사물이 있다같은 명제도 있을 수 없다. 또한 세계가 있다또는 세계가 없다같은 명제도 있을 수 없다.

 

세계에 세 사물이 있다는 명제는, 헤이그의 호텔방에서 러셀이 아무리 흔들어대더라도 유의미하다고 말 할 수 없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 지점에서 한 단계 도약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이 명제가 선언하는 내용은 아주 명확하고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로 드러난다. 바로 세 논점이 종이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확하고 모순 없이 말로 표현될 수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정말로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6.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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