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 <논리철학논고> 완성
1914년 여름. 빈 최상류층 아들, 유럽에서 가장 큰 기업의 후계자, 이미 세기의 철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던 케임브리지 대학생은 전쟁 발발 며칠 만에 상등병으로 자원했다. 갈리시아, 러시아, 이탈리아 최전방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총을 쏘며, 보초를 서는 긴 밤에 자신의 걸작, <논리철학논고>―철학의 큰 발걸음이자 마지막 걸음이라고 스스로 확신했던 작품―를 완성했다.
이 걸작으로 그는 무엇을 성취했을까?
“나는 본질적인 점에서 (철학의) 모든 중대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이 책이 지닌 가치의 두 번째 측면은, 이들 문제가 해결됨에 따라 성취한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이 책 스스로가 보여준다는 데 있다.”(<논고>, 16~17)
인생의 실질적인 조건, 삶의 의미와 가치와 희망을 주는 모든 것에 대해 이 '철학책'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바로잡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째서 철학이 근본적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지, 어째서 논리적 결말, 주장, 타당한 이론이 삶의 참된 물음을 건드리지조차 못하는지를,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작품으로 명확히 보여주었다고 믿었다.
<논리철학논고>가 논리적 언어분석으로 제시한 ‘내적한계’ 영역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은 오직 사실 세계뿐이고, 이 영역에서만 사실을 의미 있게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세계를 성질 그대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자연과학, 즉 비트겐슈타인의 확신처럼 “철학과는 아무 상관없는 어떤 것”의 과제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문제 또는 진정한 철학적 해법은 다음과 같은 확신에, 더 정확히 말해, 다음과 같은 느낌에 존재한다.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당연히 아무런 물음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해답이다.($6.52)
삶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의 소멸에서 발견된다.($6.521)
실증주의적 시대정신은, 의미 있게 말할 수 있고 주어진 상황에서 의심 없이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른바 사실)만이 삶에 의미가 있다고 확신했던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과학적인 세계관의 근본적인 방법인 논리적 분석을 이용해 정확히 그 반대를 증명해 보였다. 우리가 사는 삶과 세계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접근 방식은 엄밀히 과학적이지만, 그의 윤리는 실존주의적이다. 선한 삶은 객관적인 근거가 아니라 주관적인 결정을 기반으로 한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는 ‘말로 표현되지’ 않고,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행위에서 ‘드러나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1919년에 바로 그것을 하기로 결정했다.
비트겐슈타인의 군 생활을 돌아보면, 전체가 자살 시도처럼 비칠 정도로 그는 언제나 가능한 한 최전방에 가능한 한 가장 위험한 전장에 자원했다. 그는 강박처럼 반복해서 <전쟁일기>에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기록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죽음에 노출되는 한계상황에서 그는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대면한다. 1916년 여름 갈리시아 전장에서 쓴 <전쟁일기>를 보면, 키르케고르와 톨스토이의 논리적 언어분석과 기독교적 실존윤리가 전쟁 동안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 얼마나 밀접하게 맞물렸는지가 드러난다.
행복하게 살려면, 세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다.
나는 그러면, 나를 구속하는 것 같은 이른바 타인의 의지와 일치를 이룬다. 달리 표현하면, ‘나는 신의 의지를 따른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나쁜 삶의 최고 징후이다.(<전쟁일기>, 169)
선과 악은 ‘주체’를 통해서 비로소 등장한다. 그리고 그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고, 세계의 경계에 있다.
선과 악은 확실히 세계가 아니라 자아다. 자아, 나 자신은 심오한 비밀이다.(<전쟁일기>, 174)
전쟁도 철학도, 그의 인생자체였던 수수께끼와 불행에서 그를 해방하지 못했다. 그는 달라져서 돌아왔지만, 해답을 얻어 오진 못했다. 이탈리아 전쟁 포로로 ‘캄포 카시노’에 있던 몇 달 동안, 그는 내면에 남은 혼돈과 싸우기 위해 매우 급진적인 계획을 준비했다. 첫째, 형제자매에게 전 재산을 넘겨주기. 둘째, 다시는 철학하지 않기. 셋째, 정직한 노동으로 살기 그리고 가난하게 살기.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단 며칠 안에 이 계획을 단호하게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 <철학적 탐구> ▲ <논리철학논고>
$$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다리
“어떤 표현에 어떤 상징을 사용해도 되는지를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상징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표현해도 됩니다.”(<러셀에게 보내는 편지>)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상징은 모든 의미 있는 표현의 기본 토대이다. 그런데 왜 스스로 자신의 상징이나 마차가지인 철학자 비트겐슈타인과는 거리가 먼, 시골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삶을 선택했을까? → 우울증? 아스퍼거증후군? 동성애적 취향? ⟹ 모를 일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누나 헤르미네는 뛰어난 철학적 재능을 지닌 동생이 시골초등학교 교사로 살겠다고 하자 그것은, ‘마치 평범한 상자를 열기 위해 정밀한 첨단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비유로 답한다. ‘누나는 닫힌 창문을 통해 지나가는 사람의 기이한 행동을 보며, 왜 저러나 의아해하는 사람 같아. 밖에서 거친 폭풍이 불고 있고 행인은 폭풍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란 걸 모르는 거지.’
창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이한 행동을 보며 ‘왜 저럴까?’ 하는 의문. 이것은 거실 벽난로 앞에 앉아 의심 실험을 하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의문, <성찰>(1641)을 생각하면 된다. <성찰> 이전에 이미 플라톤의 동굴 비유는, 우리가 매일 인식하는 세계가 사실은 그림자 세계이고 가짜 세계에 불과하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한다. ‘닫힌 창문’ 뒤에 선 사람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유는, 근대 인식철학과 주체 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데카르트의 <성찰>의 방법과 동일하다.
이 획기적인 작품에서 데카르트는 그의 철학적 의심 실험을 시작한다. 거실 벽난로 앞에 앉아 처음에는 순수한 눈으로 바깥을 내다본다. 그리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창밖에 비를 맞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정말로 사람일까? 혹시 외투를 입고 머리에 모자를 쓴 ‘기계’가 아닐까? 생각하는 주체로서 각자 자신의 뇌에 갇혀 있는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무엇을 알까? 다른 사람의 내면에서 폭풍이 몰아칠까?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실제로 영원히, 완전히 고요할까?
근대 주체철학의 딜레마??? ‘고유한 경험 주체성 안에 완전히 갇힌 존재로서 바깥 세계 또는 다른 사람의 내면을 어느 정도까지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의 기본 문제를 이미지화한 결과물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라 할 수 있다. 이 책이 어려운 이유는 사유의 이미지화가 언어의 비유, 상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예컨대 <철학적 탐구>의 그 유명한 은유 또는 비유처럼. “당신의 철학 목표는 무엇인가?” - “유리항아리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파리에게 열려주는 것이다!”
이른바 바깥 세계뿐 아니라 ‘밖에 있는’ 모든 사람과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되거나 방해될 수 있다는 가정에는 서양철학의 근본적인 의심이 담겨 있다. 사물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우리를 분리하는 무언가가 있을까? 다른 사람의 진짜 경험과 감각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하는 무언가가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 또는 무엇일까?
철학은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자유로 가는 창문을 열어준다. 그는 이것을 <논리철학논고>에서 행복이라고 명명했다. 철학 활동은 닫힌 창문을 열어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를 통해 ‘다른 창문’을 열고 ‘너’에게로 가는 다리를 놓는 데 성공했고, 그리하여 정신적 고립에서 빠져나와 이해되는 존재로서의 ‘자유’로 가는 길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행복한 사람의 세계는 불행한 사람의 세계와 다른 세계이다.”($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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