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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베냐민, 비트겐슈타인

세계는 어떻게 인식 가능한가 -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by 내오랜꿈 2019.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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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제1차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에 전쟁 포로로 잡혀 있던 1918년에 완성한 <논리철학논고>를 통해 “철학의 모든 중대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확신한 비트겐슈타인은 그 후 10년 동안 철학에서 손을 떼고 오스트리아의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살았다.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1)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그 자체가 신비로운 것이다.($6.44)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6.522)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7)


그는 <논리철학논고>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릇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말해질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 그리고 <논리철학논고>에 서술된 “사고의 진리성은 불가침적이며 결정적”이라 선언한다.


비트겐슈타인                                                         ▲ <논리철학논고> 표지


<논리철학논고>는 인간이 언어로 무엇을 유의미하게 표현할 수 있고, 무엇을 표현할 수 없는지를 구별하고자 한 것


‘인간은 무엇인가?’ 칸트의 모든 비판철학은 “인간은 궁극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존재이다.”라는 명제를 기반으로 한다. 여기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란 신의 존재, 인간의 자유, 영혼의 무한성 같은 ‘수수께끼’에 해당한다. → 형이상학적 존재.


칸트는, 이런 형이상학적 수수께끼에는 정답이 없으므로 인간은 정답을 찾느라 고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가능한 한 많이 경험하고(인지), 가능한 한 자유롭게 결정하고 행동하며(윤리), 영혼의 무한성을 얻을 자격을 증명하고자(종교) 최선을 다하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칸트는 형이상학적 물음의 ‘지배기능’ 또는 ‘조정기능’을 다룬다. → 철학이란 형이상학적 물음을 사색한다는 뜻.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침묵해야 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 역시 언뜻 보면 칸트의 비판철학과 외형적인 형식은 같아 보인다. 철학을 사색하기로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인 형이상학적 의문 제기, 즉 철학하기를 철학하기로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


대답이 말로 표현될 수 없다면 그 물음도 말로 표현될 수 없다.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릇 어떤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면 그 물음에 대한 대답 또한 가능하다.($6.5)


(~)

왜냐하면 의심이란 오직 물음이 성립하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고, 물음이란 대답이 성립할 수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곳에서만 대답이 성립하기 때문이다.($6.51)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즉 자연과학의 명제들-그러므로 철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어떤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누군가가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그가 그의 명제들 속 기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였음을 입증해주는 것. 이것이 철학의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6.53)


$$ 칸트철학의 세계관과 토대 – 카시러, 하이데거 논쟁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공간과 시간을 핵심 개념으로 하는 뉴턴의 세계관을 기초로 한다. 이 세계관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뒤집힌다. 공간과 시간은 서로 독립된 범주가 아니며, 일반적으로 말하는 선험, 그러니까 모든 경험보다 앞서지 않는다. 이는 ‘상대성이론’(1905)보다 먼저 다윈의 ‘진화론’(1859)에 의해서 그 단초가 주어진다. 시간 발달에서 벗어나 영원히 미리 정해진 인간 본성에 대한 타당성을 제거한 상태였기도 하다. 모든 종의 발달이 우연이라는 다윈의 자연선택설, 그리고 니체를 통해 역사의 흐름이 목적적이고 심지어 합리적이라는 전망이 힘을 잃었다. 칸트의 선험적 연구 방법의 시작점인 자의식의 완전한 투명성 역시, 아무리 늦게 잡아도 프로이트의 이론이 등장하면서부터 의심스러워졌다.


칸트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 뒤에 침묵하고 있는 질문. 곧 인간은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야만 하는 존재. 그렇다면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카시러 – 상징의 동물. 공유되는 상징체계를 통해 인간이 자신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형이상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하이데거 – 일반적으로 공유되는 상징체계가 아니라 아주 개별적인 감정, 바로 ‘두려움’이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만든다. 인간의 존재방식은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의존한다. 원치 않게 던져진 일회적인 역사적 상황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유한성 인지를 통해. 따라서 하이데거에게서 철학의 과제는 인간에게 두려움의 진짜 나락을 보여주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것. 

→ 나찌와 손잡은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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