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다리 위의 러셀
그러나 헤이그에서의 러셀은 이 ‘의미의 경계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반박했다. “의미 있는 명제와 의미 있어 보이는 사이비 명제 사이에 당신이 직접 그은 경계선에 따르면, <논리철학논고>는 온통 무의미한 명제들로만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같은 명제는 ‘총체적 세계’와 연관된 명제와 도대체 무엇이 다릅니까?”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두 명제는 다음과 같다.
나의 명제들은 다음의 점에서 하나의 주해작업이다. 즉 내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먼저 나의 명제들을 통하여(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그것을 뛰어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6.54)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7)
<논고>의 마지막 두 명제에서 유추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에게 한 대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지 않았을까? <논고>는 유의미한 것을 전혀 ‘말하지’ 않지만 뭔가를 ‘보여 준다’. ‘다른 세계’, 즉 다른 세계관을 보여 준다. 더 명료하고 더 진실하고 덜 왜곡되고 더 놀랍고 더 의미 있는 세계관. 토대가 없지만 그래서 더 자유로운 세계관.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특정 질문에 대해, 특히 철학적 질문에 대해(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경험’했기 때문에), 더는 근거를 대기 위해 숙고할 필요가 없으므로 더 자유롭다. 총체적 세계가 어떻게 ‘현실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지 근거를 대지 않는 세계관. 그러므로 또한, 이념과 이념에 대해 의심이 없는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그러나 러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자신이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 첫 번째 칸에 올라 멈춰 있는 것 같았고, 계속 올라가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러셀은 한 편지에서 헤이그에서의 논쟁을 이렇게 요약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완전히 신비주의자가 되었습니다.”
▲ 버트란트 러셀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단순한 철학자, 수학자가 아니라 당대의 지식인 대부분이 별다른 문제의식을 표출하지 못했던 제1차세계대전의 광풍 속에서도 전쟁 반대를 위해 고군분투한, 투철한 사상가, 투사였다.
$$$$$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
러셀이 <논리철학논고>의 서문을 쓰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논고>의 출판은 쉽지 않았다. 사실 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한다면 누가 총체적 세계와 연관된 명제가 유의미한지 헛소리인지 관심을 갖겠는가? 철학이란 게 단순한 낱말을 둘러싼 허영 가득한 다툼이고 명제의 유의미에 대한 의심이 어떻든 상관없는 거 아닐까?
그러나 근대 철학의 자기이해와 주요 문제들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심지어 몇몇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좌우된다. 데카르트와 근대 철학 전체에 주입된 의심만 보더라도 그렇다. 세계가 정말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묘사하는 특징으로 존재할까? 세계가 혹시 전지전능한 사탄의 요술은 아닐까? 한 마디로, 세계가 과연 존재할까?
중대한 물음처럼 들린다. 절대적이고 실존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인식론적 기본 물음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서, 사이비 물음으로(고전적인 헛소리로) 정체가 드러나고, 그러므로 명료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고개를 돌리는 편이 더 낫다고 선언된다.
대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물음도 말로 표현될 수 없다.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릇 어떤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면, 그 물음에 대한 대답도 마땅히 가능하다.($6.5)
물을 수 없는 것을 의심하려 한다면, 회의주의는 반박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이란 오직 물음이 성립할 때만 성립할 수 있고, 물음이란 대답이 성립할 때만 성립할 수 있으며, 이 대답이란 무언가가 말해질 수 있을 때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6.51)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를 해소하거나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밀쳐두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물음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로운 것이다.($6.522)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로운 것이다.(6.44)
어떻게 보면 비트겐슈타인도 하이데거처럼,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감탄에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하이데거와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총체적’ 세계는 두말할 것 없이 ‘무언가’의 단순한 현존을 묻는 명료한 물음에, 본래 의미가 언어로 먼저 표현되어야만 하는 심오한 철학적 수수께끼가 들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방향의 모든 시도가 조만간 언어적 헛소리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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