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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베냐민, 비트겐슈타인

번역자의 과제 - 신의 언어(언어 일반)에 이르는 길

by 내오랜꿈 2019.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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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의 과제

 

1920년의 베냐민. 생활력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계획조차 없는 28살의 예비 프레카리아트. 그는 스스로를 분명히 천재라고 여겼겠지만 세계는 이 천재를 환영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이 즈음에는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을 터. 이때부터 반복되는 베냐민의 인생 패턴이 있다면, 그것은 정확히 잘못된 시간에 정확히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감각이라 할 수 있다. 전후, 인플레가 극심하던 시기에 베냐민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산 일부의 조기상속을 주장하여 거금 3만 마르크를 미리 상속받았지만, 불과 3년 만에 베냐민 가족은 샌드위치 하나조차 살 수 없게 된다.

 

결국 교수자격 취득을 위한 언어철학 논문 계획을 내려놓고(그의 계획은 묘하게도 1916년에 발표된 하이데거의 교수자격 취득 논문과 거의 유사했다), 보들레르의 <파리 풍경> 번역 작업에 착수한다. 이때 서문으로 쓴 <번역자의 과제>는 베냐민의 글 가운데 오늘날까지 가장 유명하고 또한 체계적으로도 명확한 글로 통한다. 실제로 <번역자의 과제>에는 베냐민의 독창적 언어철학의 핵심이 들어 있다.

 

도대체 한 편의 시는 무엇을 말하는것일까? 시는 무엇을 전달하는가? 그 시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전달할 것은 거의 없다. 시에서 본질적인 것은 전달이나 진술이 아니다. 그럼에도 매개(전달)하고자 하는 번역은 전달 외에는 아무것도 매개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니까 비본질적인 것만 전달할 수도 있다.(<번역자의 과제>, 122)

 

시에서 언어의 본질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그 본질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능력이 아니라면,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실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면, 진정한 번역자의 과제 역시 원작의 내용을 가능한 한 그대로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데 있지 않다. 그렇다면 번역자의 진정한 과제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원작과 번역문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식비판이 모사론의 불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전개하는 사고 과정과 전적으로 유사한 의도를 갖는 어떤 숙고를 해볼 수 있겠다. 그러한 인식비판을 통해 인식의 객관성이 현실 모사에 있다고 본다면, 인식에 객관성이란 없고, 심지어 객관성을 요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번역의 최종적 본질이 원작과의 유사성에 있다고 보고 그것을 추구한다면, 어떤 번역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번역자의 과제>, 127)

 

베냐민의 주장에 따르면, 한 작품을 번역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번역을 해서는 안 되고, 가능한 한 원문과 똑같이 모사해서도 안 된다. 그럼 어떻게? 모호함을 약간 걷어내고 표현하자면, 오늘날까지 번역의 이상적 구호로 여겨지는 가능한 한 원문에 충실하게, 필요한 만큼 자유롭게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진정한 인식은 어디에 있고 새로운 철학적 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베냐민은 이를 후설의 현상학과 프레게의 언어철학적 차이를 토대로 한다. 프레게는 이를 지시체의 차이라 했고, 후설의 현상학 용어에서는 말해진 것의 의도말하는 방식의 차이로 불린다.

 

샛별저녁별의 차이가 대표적 사례다. 이 둘은 하늘에 뜬 같은 별, 즉 금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프레게의 용어로 표현하면 지시체는 같지만 은 다르다. 같은 대상의 다양한 이름들이 그 대상의 다양한 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땐 새벽하늘에서 비추는 별빛을, 또 어떨 땐 저녁 하늘에서 비추는 별빛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말해진 것의 의도(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의 의미에서) 두 경우 모두 같다. 그러나 말하는 방식은 다르다.

 

다양한 언어들은 소리와 기호에서 다양할 뿐 아니라 세계를 보는 방식도 다양하다. 그렇다. 같은 대상()이 각각 살짝 다르거나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얻는 독창적인 방식이라 말해도 좋으리라. 같은 대상과 연결되지만 표현 방식은 다르다. 그리고 여기서 베냐민은 언어철학자로서 피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한다. 서로 다른 언어의 두 단어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언어적으로, 이를테면 이라는 개념을 통해 결정되고 규정된 것일 뿐이다. 샛별과 저녁별의 경우, 두 기호는 금성을 가리키지만 또한 단지 금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렇게 정의되는 기호에 불과하다. 두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 또는 베냐민의 표현대로 언어 체계와 관련된 대상의 진정한 정체성은 모든 언어 일반으로서의 참된 언어라는 전제 조건을 기반으로 한다. 베냐민에게 참된 언어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신의 언어가 이상적인 참된 언어이다.

 


▲ 국역본 <번역자의 과제> 표지


모든 언어와 모든 의미의 토대에 있는 근본적인 표현양식 또는 공통언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세계가 언어와 똑같은 논리 형식을 가졌다고 생각했고, 하이데거는 세계가 이미 늘 경험된 과거로 (언어적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반해 베냐민은 순수 언어또는 참된 언어가 신의 언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질문을 역사철학적으로 풀었다. 그러므로, 말을 하고 연구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진정한 목표이자 과제는, 신이 사물이 본질을 파악할 때 보여준 이름 붙임과 언어의 직접적인 일치(신은 사물의 모든 면을 드러내는 딱 맞는 표현을 언제나 찾아낸다)에 가능한 한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가능한 한 세계의 모든 면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언어를 창조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론은 막을 내리고, 시인은 그들의 고유한 언어로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그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애쓴다. 시인이 원작에서 선택한 말하는 방식을 위한 정확한 자리를 번역어에서 찾아낼 때, 번역자의 신성한 작업은 이 목표에 정확히 도달한다. 그러므로 원작 언어의 말하는 방식으로 번역어를 풍부하게 만들고 넓혀나가는 일이 번역자의 과제.

 

번역자의 과제는, 원작의 메아리를 깨워 번역어 속에서 울려 퍼지게 하는 말해진 것의 의도를 찾는 것이다. 번역은 번역자의 메아리가 원작의 메아리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에서(번역어의 숲에서) 원작을 외치는 것이다. 다수의 언어를 하나의 참된 언어로 통합하는 것이 번역 작업의 위대한 동기이기 때문이다.(<번역자의 과제>, 133~134)

 

말하자면 참된 언어는 모든 언어의 이상적인 목표다. 모든 사물의 본질을 명확하고 확실하고 세세하게 드러낼 언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해, 신이 부여한 낱말 또는 이름을 찾아내는 언어. 번역자의 과제는 곧 인간의 과제이다.

 

인간은 이름을 붙이는 존재이고, 그래서 순수 언어가 인간에게서 발현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모든 자연은 소통하는 한 언어 속에서 소통하고,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인간 속에서 소통한다.

 

그러므로 베냐민의 해결책은, 모든 인간 언어의 근본에 있는 참된 언어를 찾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매우 고유한 의미에서 자기 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개개인은 이라는 단어를 매우 개인적이고 고유한 연상과 연결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언제나 번역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이해의 모든 형식이다. 베냐민처럼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다르고, 다른 사람에게 보들레르와 같은 프랑스 시인이다. 베냐민에 따르면, 수많은 섬세한 번역 작업으로 풍성해진 이상적인 참된 언어는 세계의 모든 면을 가장 정밀하고 정확하게 반영하는 일종의 모나드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신의 언어와 생각이 그렇듯, ‘참된 언어는 본연의 세계와 구별될 수 없을 터이다. 어떻게 보면 베냐민에게는 다소 나르시시즘적 자아도취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인간적인 삶의 형식은 곧 말하기 형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상징형식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기본 형식이다. 언어는 개개인의 자기 이해와 세계 이해의 기반이다. 무엇보다 명백하게 논쟁 활동인 철학은 언어 안에 존재하고 언어 형식으로 활동한다. 1920년대, 비트겐슈타인, 베냐민, 하이데거는 모두 철학 활동의 기반인 언어 형식에 대해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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