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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베냐민, 비트겐슈타인

군중 속의 고독 - 하이데거의 자기이해

by 내오랜꿈 2019.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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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중 속의 고독

 

하이데거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군중 속의 고독이란 표현이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아내가 옛 대학친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고백에 대해 답하는 장문의 편지 속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시간을 초월해야 하는 위대한 소명은 언제나 외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고, 부자, 학자, 열광을 받는 자들이 느끼는 외로움과는 정반대로, 다른 사람이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바로 외로움의 본질이오.

 

오직 그에게만 주어진 초인적인 문제를 온전히 스스로,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해받지 못한 채 해결해야 하는 운명을 선고하는 위대한 외로움에 대한 낭만적인 비유. 천재적인 사회 부적응자. 이것이 하이데거의 자기이해다. 이른바 군중 속의 고독’.

 

하이데거는 창밖을 지나는 인간이 기계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던 데카르트 철학이 근대 철학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인식했다. 데카르트와 회의적 사고실험, 데카르트와 생각하는 자, 그리고 마침내 모든 확실성의 근거인 생각하는 주체(“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와 순수 인식론으로의 철학 축소, 데카르트와 물심 이원론(세계를 정신과 사물로 나누는) 데카르트는 그 자체로 철학의 적이고, 데카르트의 사상을 전환점으로 서양철학이 영구적으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이제 시간을 초월하는 위대한 소명으로 주어진 하이데거의 과제는, 새 시대의 주체 철학과 인식론이라는 사악한 마법에서 그리고 순전한 합리성과 자연과학의 고착에서, 국가와 문화와 모든 전통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서양의 동시대인 전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세계관과 자아상에 잡혀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그 잘못된 세계관과 자아상이 수백 년에 걸쳐 계몽의 빛으로 가는 진정한 도약으로 환호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출판을 위해 사투하던 1919년에 하이데거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새 시대의 주체철학과 인식론의 틀에서 벗어나 논리정연하게 사색하기 시작한다.

 

하이데거의 첫 번째 근본적 통찰은 상자는 없다(There is no box)!“였다. 생각하는 주체를 현실과 분리하는 소위 유리막은 없다. 분리된 경험을 하는 벽난로 켜진 거실 같은 내부 공간은 없다. 데카르트의 외부 세계 회의론, 회의론과 직결된 현실이 어떻게 실재하는가의 물음,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절대적 분리, 이 모든 것은 순전히 가짜 문제이자 가짜 가정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로서 그에게 열려 있는 것들, 무엇도 분리되지 않고 의심의 여지도 없이 발생하지 않는 그 무엇을 추구하고 찾아내려 노력한다.

 

하이데거의 그 무엇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따르자면 신비한 것이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를 묻는 질문에서 비로소 제대로 드러난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 능동성과 수동성, 안과 밖의 이원론 너머에 있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이데거 자신에게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평생에 걸쳐 그것을 표현할 낱말을 찾는다. ‘존재한다라는 표현의 진짜 의미를 묻는, 일반적이며 무엇보다 모든 내용상 편견에서 벗어난 물음. 이보다 더 간단하고, 일반적이며, 무엇보다 전제조건 없이 단순하게 묻고 답할 수는 없다. 그렇다. 비트겐슈타인처럼 드러난다’. 뭔가가 현재 여기에존재한다. 전체 세계가 존재한다. 여기까지는 비트겐슈타인이나 하이데거의 인식은 일치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여기까지는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 <존재와 시간> 표지



$$ 잘못된 곳에 올바른 삶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 후로도 기꺼이 계속해서 존재한다의 의미에 대해 사색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결연한 의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한 남자(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진정한 인식으로 도약하게 이끄는 물음을 사색했던 반면, 다른 남자(비트겐슈타인)는 예상되는 헛소리와 언어적으로 만들어진 사이비 물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철학의 근본 오류가 이론화를 근원적인 것으로 가정한 데 있다고 보았다. 특히 현실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를 묻는 데카르트식 회의가 그러한데, 이 물음 자체가 이미 이론적으로만 나오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 역시 이미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런 물음이 철학과 맞지 않다고 확신했다.

 

모든 현실성을 이미 여러 차례 변형시키고 왜곡시킨 환경의 현실성을 묻는 것은 모든 진짜 문제를 거꾸로 뒤집는 것과 같다. 바깥 세계의 현실성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짜 방법은, 그것이 결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모순성임을 통찰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게 1차적으로 주어진 것은 현실이 아니라 환경이다. 그리고 이 세계라는 환경은 항상 근원적 의미가 있는 전체 지시이고, 이 지시를 따라가면 결국 의미의 전체 세계에 닿게 된다. 세계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유도된 이론적 접근만을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전체 세계 접근에서 본래 의미를 스스로 저버리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의미의 퇴색이라고 불렀다. 세계, 타인, 자기 자신의 의미의 퇴색. 데카르트의 창문 은유처럼, 세계, 타인, 자기 자신 모두가 이론이라는 불투명한 유리를 통해서만 인식된다. 조작된 세계와 잘못된 기반의 상호 관계에 있는 잘못된 삶. 아도르노의 유명한 문장을 인용하자면, 잘못된 곳에 올바른 삶은 있을 수 없다.”

 

하이데거의 사상은 모든 삶의 상황에서 순정성과 정직성을 호소하며 또한 고유하게 경험된 환경, 즉 각각의 고향, 고유한 자연풍경, 전통, 관습, 사투리 그리고 그것에 속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유기적인 뿌리내리기와 안착하기를 열렬히 호소한다. 인간이 오로지 자신이 태어난 곳, 자신만의 고유한 환경에서 진정으로 내적이고 온전하게 진실로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벌써 이 모든 것의 민족적 순정성신념적 본질성이라는 의미가 보이지 않는가? 여기서 이미 아우슈비츠 비극의 단초가 잉태하고 있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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