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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Note

2. 리좀 : 내재성, 혹은 외부의 사유 - 1장(1)

by 내오랜꿈 20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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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리좀 : 내재성, 혹은 외부의 사유 - (1)


『천의 고원』 첫 번째 고원은 리좀(rhizome). ‘뿌리줄기’라고 부르는 리좀(적 사유)을 통해, 전체를 관통하는 ‘내재성(immanence)'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내재성’은 외부의 사유이고 외부에 의한 사유다. 내적인 세계를 추구할 때 자폐적이 될 수밖에 없고 관념론이 된다. 철학적 사유는 늘 그것이 관여된 외부(때론 현실이지만, 꼭 현실만은 아니다)와 결부 지어질 때만 의미가 있다.


1. 책에 관하여


1) 책이란 무엇인가?


* 책에 대하여 : 하나의 뿌리(=결론)로 귀착되는 나뭇가지 구조에 반대. 『천의 고원』의 각 장은, 다른 것과 접속되고 이어질 수 있는 길을 이리저리 갖지만, 독립적으로 읽어도 좋을 만큼 독자성을 갖는 구조. 또한 각각의 장조차 어떤 정점으로 각 부분이 귀착되는 ‘산’의 형상보다는, 정상이 없는, 하지만 평지와는 구별되는 높이와 강밀도를 갖는 고원(高原)의 형상을 부여하고자 함. 따라서 『천의 고원』의 각각의 장은 일종의 고원이고, 이 책 전체는 그런 고원들이 이리저리 이어지면서 연결되는, 하지만 어떤 하나의 결론으로 모든 논지와 문장을 끌고가지는 않는 고원들의 ‘모호한 집합’. 곧 천 개나 되는 모호한(fuzzy) 고원들 Mille Plateaux 의 집합.


* 저자에 대하여 : 어떤 책을 하나의 저자, 책이나 작품의 ‘기원(origine)’이자 독창성의 원천인 ‘저자’에 귀속시키는 것에 거리를 두려함. “우리는 혼자 말하는 경우에도 각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말하는 것이고,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배치 안에서 나름의 집합적 언사를 발하고 있는것.” (70쪽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


*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 : 저자가 단수일 경우에도 이미 저자는 복수일 수밖에 없고 대상 또한 마찬가지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감옥에 대한 책이지만, 동시에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사와 삶에 관한 책이며, 또 그런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꿈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대상, 혹은 특정한 대상에 책을 귀착시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책이란 무엇인가?

→ “한 권의 책에는 분절의 선, 선분성의 선들, 지층 및 영토성의 선들이, 또한 탈주선과 탈영토화의 선들, 탈지층화의 선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책은 하나의 배치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multiplicité)”다. (1권 8쪽) ex)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맑스의 『자본』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기호의 자의성’에 관한 명제와 맑스의 『자본』에서의 ‘가치론’을 예로 들어 탈영토화, 탈지층화, 및 재영토화를 설명하고 있다. 소쉬르의 책에서 기호의 자의성에 대한 명제는 실증주의적 언어철학의 지층을 해체하는 동시에(탈지층화운동) 새로운 기호들의 규칙(랑그)으로 재영토화한다.

그러나 ‘강아지와 개새끼’에서 드러나듯 동일한 기표가 상이한 의미를 갖게 되는 지점이 발생한다. 이른바 기표의 외부성. 그러니까 동일한 기표가 어떠한 외부를 갖는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서 상이한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 혹은 다른 기표들이 사용되는 맥락, 그 외부성에 의해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의미론과 음운론, 기의와 기표 사이에서, 그것 어느 하나로도 환원될 수 없는 지대가 있다는 것을 소쉬르의 ‘가치’라는 개념은 보여주는 셈이고, 그것은 소쉬르적 기호학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탈주선을 그린다는 것이다. 이게 “탈영토화의 첨점”,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데 출발점이 되는 지점인 것이다.


이처럼 소쉬르의 책은 상이한 속도를 갖고 흘러가는 언어학적 사유의 흐름들의 복합체고, 어느 하나의 명제나 척도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 명제들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다양체다. 그 흐름 속에서 구조언어학처럼 새로운 음운론적 언어학을 끌어내거나(야콥슨,『일반언어학 이론』 ), 라캉처럼 무의식의 언어적인 구조와 ‘기표의 물질성’을 끌어낼 수도 있고(라캉, 『욕망이론』), 반대로 그 흐름을 거슬러 바흐친처럼 음성학과 파롤이 강조된 새로운 종류의 언어학적 사유(바흐친/볼로쉬노프,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맑스의 『자본』의 경우에도 어떤 개념들을 어떤 문제의식에 연결시키면서 강조하거나 제거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책이 되는 것이다. 정통 맑스주의자, 네그리, 루카치, 알튀세가 읽는 『자본』은 하나의 책에서 연원하는 것이지만 다른 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이란 책은 그 모든 다양한 『자본』을 포함하며, 또 다른 『자본』이 만들어 질 수 있는 하나의 장이요 다양체이다.


2) 책과 외부


* “책을 하나의 주체에 귀속시키는 순간, 질료의 가공과 그것의 관계가 갖는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 책의 외부성이란 단순히 책이 씌어지는 사회·역사적 상황만을 뜻하는 것은 아님. ‘외부’란 그 책과 만나게 되는 다른 책들, 그것이 대결하고 있는 어떤 사유들, 혹은 그 책을 통해서 읽는, 우리가 대결하고자 하는 어떤 사유들, 아니면 그 이미 씌어진 상태에서 어떤 책이 새로이 만나게 되는 역사적 사건들 등이 모두 ‘외부’이다.

* 책이 외부성을 갖는다는 말은 책이 어떤 외부와 만나고 접속하는가에 따라 다른 책-기계로 작동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우리가 책에서 읽는 ‘텍스트’란 책과 그 외부가 함께 만드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책을 통해 읽게 되는 모든 텍스트는 책이 그 외부와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주름이다.(“모든 텍스트는 그 외부에 의해 접힌 주름 위에 씌어진다.” “모든 텍스트는 그 외부의 주름이다.” 79쪽)


cf) 데리다의 명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이 명제는 현실을 다루는 하나의 방법이고, 어떤 것에 새겨진 그 외부의 흔적을 통해서 그것을 포착하려는 태도이다. 이렇게 데리다는 모든 것에서 거기에 새겨진 문자들(grammes), 그 흔적을 읽어내려 한다. 그래서 자신이 하려는 것은 문자(grammes)를 다루는 문자학(grammatologie)이라고 한다.

i) 데리다에겐 모든 것이 읽어야 할 텍스트라면, 들뢰즈/가타리에겐 모든 것이 효과를 생산하며 작동하는 기계가 된다. 데리다가 모든 것을 읽고자 하는 아카데믹한 학자라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것을 작동시키고 실제적인 무언가를 생산하고자 하는 엔지니어인 셈. 데리다의 명제가 외부를 텍스트 안으로 내부화 한다면(관념론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들뢰즈/가타리는 외부성을 통해 사유하고 있다(유물론이란 '외부를 통한 사유' 이다).

ii) 데리다 : 외부를 텍스트 안으로 내부화. 흔적이란 언제나 ‘과거’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인 것, 그것을 읽어내는 작업은 일종의 ‘역사학’.


들뢰즈/가타리 : 책이든 폭탄이든 그것이 만나는 외부에 따라 다른 것이 된다고 한다는 점에서 외부성을 통해 사유하고 있다는 점. 완성된 형태의 책조차 외부에 의해 다른 것이 된다고 보는 것은 다가올 ‘장래’와 연결됨. 모든 텍스트는 책이 그 외부와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주름이다.

※ 들뢰즈/가타리와 데리다 비교

· (선험적인) 차이와 차연


· 외부의 문제 : 외부의 ‘내재성’과 외부의 ‘부재’

(eg. 접속, 기계, 배치, 주름 ;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탈주의 전략과 해체의 전략(이질적인 것들의 항상적인 공존과 접속은, 재영토화와 탈영토화의 운동을 통해서 언제나 사건화되는 방식으로 생성의 선을 그린다. 외부를 통해 변이의 선, 탈주선을 그리며, 변이와 생성을 만들어내려는 전략 ; 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성을 드러내고, 그것에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마는 균열의 지대를 찾아내서, 그것을 통해 통일성을 제조하는 경계선을 해체하고 변형시키는 전략으로서 해체)


· 생산의 논리와 산포의 논리(들뢰즈는 해체를 통해 만들어지는 의미의 산포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명시한다. 봉합 불가능한 이질성의 드러냄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만들어지는 어떤 새로운 일관성으로 통해서 새로운 배치를 창조하는 것).


· 신체의 일차성과 텍스트의 일차성 : 들뢰즈에게 비신체적인 것은 신체적인 것의 표면에서 발생하며, 신체적인 것의 인과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물론 신체적인 것을 환원하지 않지만, 언표행위의 배치와 기계적 배치를 구분하는 경우에도 모든 것은 ‘일반화된 기계주의’라는 내재성의 장 안에서 포착된다. 반대로 데리다에게 신체적인 것은 텍스트와 흔적, 문자, 에크리튀르로 환원되고, 텍스트를 다루는 문자학의 방법으로 다루어진다. ‘책-기계’와 ‘텍스트’


3) 책의 유형들


* 책은 배치이며, 그것이 만나는 외부에 대해서 어떤 효과를 생산하는 ‘기계’라는 사실을 내포. 들뢰즈/가타리는 자신들의 책을 중심화된 사유를 깨부수고 동일화하는 논리를 파괴하며, 새로운 다양체를 생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드는 데 이용해달라고 말한다. 따라서 책의 외부성, 혹은 책-기계라는 개념은 책의 문제를 실천의 문제, 이용의 문제로 보는 입장이다. 낫이 어떤 외부와 접속하느냐에 따라 농사-기계도 되고, 살인-기계도 되고, 혁명-기계도 되는 것처럼.


==>들뢰즈/가타리의 이러한 사상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들뢰즈를 무슨 플라톤주의자니 신플라톤주의자니, 심지어 파시스트니 하는 발언들이 얼마나 무식함에 기인한 용감함인지 알 수 있다. 아직도 근대적 합리성이 제공하는 로고스중심주의의 미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수많은 연구자들이 골방에 틀어박혀 이러한 ‘딱지붙이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는 현실은 천박하기 그지없는 우리 학문의 현주소라 할 수 있다.


* 책의 내부를 구성하는 상이한 양상들에 따라 책의 유형을 구분

① 책-뿌리, 혹은 세계의 이미지로서 수목적 세계로 만들어진 책 ― 하나의 일자(一者, the one)로 모든 것을 귀속시키는 모델. 결론으로 귀착되며 그것을 통해 하나의 전체성을 획득하는 장들의 유기적 체계로 구성되는 책. 유기적이고 의미화하며, 주체적인 멋진 내부를 갖는 고전적 책이란 관념과 연결. 각각의 장들을 결론을 위해 상승하는, 혹은 결론을 향해 모여 가는 그런 부분들로 구성됨(국가를 모델로 하고 있음).

② 곁뿌리 내지 총생뿌리로서 책 ― 저작집(l'OEuvres)이나 전집(Le Grand Opus). 여기서는 선형적인 방향성 안에서만 계열의 증식이나 다양성의 증대가 유효할 뿐이다. 뿌리의 통일성은 지나간 것, 혹은 도래할 것으로 존속한다. ‘저자’ 개념과 저자 기능으로서 통일성. 이를 통해 책들, 작품들은 하나의 통일성을 갖는 것으로 가정되며, 이러한 통일성을 보여주고 설명하기 위해 각각의 작품들은 해석되고 그 통일성 아래 선형적으로 계열화된다. 또한 저자 자신의 사유의 변화는 이러한 통일성의 진화적 형성과정이 된다.

-->동일한 화두라 할지라도 사회역사적 조건이 변하거나 저자 자신의 체험이 달라지면 답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통일성 대 일관성’의 구도.

③ 리좀적인 책 ― '국가 장치로서의 책에 대항하는 전쟁 기계로서의 책'. 곁뿌리들을 끌어들이며 통일하는 유일자, 일자로서 중심을 제거한 뿌리들의 망으로서 리좀. 외부를 통해 작동하는 책-기계는 외부에 따라 변이하는 책이란 개념을 낳음으로써, 책이나 사유가 하나의 모델에 뿌리박는 것을 방해하며 그때마다 상이한 외부를 향해 달리게 한다는 점에서 유목적인 사유를 촉발한다. 그럼으로써 지배적인 가치와 지배적인 삶의 방식에 반하고 국가장치에 반하는 전쟁기계가 된다. “책으로 하여금 모든 유동적 기계의 부품이 되게 하며, 줄기로 하여금 리좀이 되게 하는 배치”


각각의 장은 중심도 정점도 없는 고원이고, 그 고원 같은 장들은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음. 결론은 있지만 그것은 각각의 장들을 통합하는 중심이 아니라, 각각의 장(고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념들의 집합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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