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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Note

5. 1914 : 한 마리 늑대인가, 여러 마리 늑대인가? 2장 - (1)

by 내오랜꿈 20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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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과 욕망 : 욕망하는 기계에서 욕망의 다양체로 (1)


1. 분열분석의 대상 : 무의식


『천의 고원』의 두 번째 고원인 「1914 : 한 마리 늑대인가, 여러 마리 늑대인가?」의 표면적인 주제는 '늑대인간'에 관한 프로이트 분석을 비판하고, 이를 통해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것이나 그 내용이 포괄적이거나 상세하지 않다. 그럼에도 독립적 고원으로 다루는 이유는 정신분석과 대비되는 분열분석이 대상으로 설정하는 ‘무의식’에 대해 언급하고, 이를 그들의 이전 작업인 『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전신분열증』를 이 책의 하나의 고원으로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하는 지점. 이는 『천의 고원』의 부제가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2’로 명명된 데서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전작인 『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전신분열증』의 욕망과 관련된 개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욕망으로서의 무의식 : 『안티 오이디푸스』


1) ‘정신분석학’에서의 욕망의 개념

* 프로이트의 욕망 - 한마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① 모든 욕망은 본질적으로 성욕이다. : 모든 다양한 비-성적 욕망은 성욕이 승화된 것이고, 리비도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그 대상을 바꾸어버린 욕망이다.


② 모든 욕망은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다. : 모든 성욕은 본질적으로 어머니에 관한 성욕이고, 어머니와 자려는 욕망이며, 어머니의 남근이 되려는 욕망이라는 것. 이를 실현한다면 인간의 모든 질서는 파괴될 것이다.


③ '동물적인 욕망'으로의 일방적 귀결을 완충하려는 아버지에 의한 일차적인 욕망의 억압은 문명화된 모든 인간적 질서의 출발점이다. 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억압되거나 승화된다. : 이렇게 억압된 ‘무의식’은 꿈, 환상 등의 변형된 형태로 다시-나타나거나(re-present) 승화된 형태로 현실에 다시-나타나게 된다. “삶은 무의식이 펼쳐지는 극장이 된다.”(129쪽)


2)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의 개념


* 욕망=‘하고자 함’

들뢰즈/가타리는 프로이트와 달리 욕망이란 ‘하고자 함’이고, 따라서 그것이 성욕으로 제한될 이유가 없다고 봄. 놀고자 함, 사유하고자 함, 말하고자 함, 새로운 방식으로 살고자 함 등등 모든 ‘하고자 함’이 바로 욕망이라는 것.

욕망은 인간과 생물체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것은 어떤 활동을 하기 위해 .... 생산적 능력” (p131)으로서 ‘기계’ 개념으로 연결. 이 기계는 생명이나 유기체에 대립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접속하여 어떤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어떤 활동을 하기 위해 만나고 접속하는 신체들에 속하는 것이고, 그 신체들을 접속하여 작동하게 만드는 요인(기계)이며, 그러한 작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하는 그런 결정적 요인(생산)이며, 어떤 신체들이 접속하여 에너지나 힘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게 하는 생산적 능력이다.”(131쪽)

따라서 욕망과 기계는 서로 대립되거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접속하는 항에 따라 다른 기계가 된다는 것은 다른 욕망, 다른 의지가 작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욕망하는 기계’ 라는 개념이 창안된다.


* ‘욕망하는 기계’, ‘일반화된 기계주의’, ‘욕망하는 생산’


“욕망은 기계고, 기계들의 종합이며, 기계적 배치다. 즉 욕망하는 기계다” (A0, 352)

이렇게 기계가 욕망하고 욕망이 기계화되는 역설적인 개념으로 새로운 기계와 욕망 개념, ‘일반화된 기계주의’를 제창한다. 결국 욕망은 직접적으로 현실적인 ‘기계’를, 실재적인 것을 생산한다. (유물론적!) --> ‘욕망하는 생산’ 개념으로 연결. ==> 욕망의 경제를 다루는 리비도 경제학은 생산의 경제를 다루는 정치경제학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정치적!)

욕망은 표상이나 환상을, 다시 말해 현실적이지 않은 어떤 대상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직접적으로 현실적인 ‘기계’를, 실재적인 것을 생산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고, 아무 것도 기호화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기계란 바로 우리가 그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이고,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 때 사용하는 수단이며, 그것들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AO, 342) 요컨대 “욕망은 기계를 통해 작동하는 의지로서, 기계로서 존재하며 기계를 통해 어떤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여 현실적인 무언가를 생산한다” (134쪽)


* 반(反)생산 : 어떤 기계가 하나의 정해진 기관이기를 중단하는 것 --> 기관 없는 신체

접속하는 항에 따라 어떤 하나의 기계가 다른 기계로 변환된다는 것은 기존의 욕망, 기존의 생산을 중단하고 다른 욕망에 따라 다른 것을 생산하는 다른 기계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ex) 입이 성대와 접속하여 소리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경우 ‘말하는-기계’가 되지만, 식도와 접속하여 영양소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경우 ‘먹는-기계’가 되고, 생식기와 접속하여 성적 리비도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경우 ‘섹스-기계’가 된다.) 이는 다른 기계로 변환되기 위한 전제조건인데, 이처럼 기존의 생산을 철회 내지 중단하는 것을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반생산’이라고 하고 이는 기계가 하나의 정해진 기관이기를 중단하는 것이란 점에서 ‘기관 없는 신체’ 개념으로 연결.


요컨대 ‘기관없는 신체’란 특정한 기계가 다른 기계로, 특정한 욕망이 다른 욕망으로 변환되는 내재적 장이다. “기관없는 신체란 흐름의 연속체고, 흐름이 집중되고 분산되는 장이며, 그 집중과 분산의 양상, 그 집중의 강밀도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기관’, 다른 기계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장이고, 욕망하는 기계들이 만들어지고 변형되는 터전이며, 욕망하는 기계들의 생산에 사용되는 질료요, 질료의 흐름입니다” (139쪽)


* 무의식

1) 무의식의 동력학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무의식의 동력학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인은 ①‘욕망하는 기계’나 ‘욕망하는 생산’ ②‘반생산’으로서의 기관없는 신체.

“무의식이란 기관 없는 신체 상에서 욕망하는 기계의 생산이고, 그것의 변형이며, 그러한 생산과 반생산, 변형을 야기하는 리비도의 투여고, 그러한 투여의 양상을 규정하는 욕망의 배치”(137쪽)이다. 즉 무의식은 기관 없는 신체 위에서 리비도의 투여를 규정하는 욕망의 배치다. 따라서 무의식을 다루는 것은 (프로이트처럼) 치환되고 응축되어 표상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징후들의 기호학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물리적인 강밀도의 생산, 기계들의 생산, 기계적 배치, 그리고 그와 상관적인 언표행위들의 배치를 다루는 ‘물리학’이어야 하며, 그러한 물리적 현실로 존재하고 작동하는 권력을 다루는 ‘정치학’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무의식을 다룬다는 것은 기관 없는 신체 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욕망하는 기계는 그것이 무엇과 접속하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어떤 기계를 둘러싼 관계가 달라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욕망은 고정된 어떤 본성을 갖는 게 아니라 접속하는 이웃항의 관계에 의해 다른 본성을 갖는다. 따라서 욕망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가족적이고 성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회적인 것이다. ⇒ 정신분석학의 일자 환원에 대한 비판.


2) 무의식은 고아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오이디푸스구조 안에서의 유아의 성욕으로 환원시키려는 것과는 반대로 들뢰즈/가타리는 무의식은 고아이며, 이러한 무의식을 오이디푸스의 구조안에 쑤셔넣는 것은 환자의 어린 시절의 감정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먼저 편집증적 어른의 관념이라고 지적한다. 즉 근친상간에 대한 죄책감이란 아버지에서 아들로 투사된 감정이라고 한다. “무의식에게는 부모가 없으며, 무의식은 고아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 안에서 자신을 생산하기에 '승화'라는 개념이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 (138쪽)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욕망하는 기계와 그것이 거대한 규모의 집합체를 이루는 사회적 욕망을 구별하며, 이와 상응하여 욕망하는 기계와 사회적인 기계라는 개념을 구별하여 사용한다. 전자가 미시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거시적인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미시정치학과 선분성’을 다루는 아홉 번째 고원에서 다루는 분자적인 것과 몰적인 것의 구별에 대항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적 개념은 단순히 이항적 대립에 머물지 않는다.


3) 분열분석의 네 가지 명제

① “욕망 내지 리비도의 모든 투여는 몰적이고 사회적이고, 어떤 경우든 사회역사적 장 위에 새겨진다.” (141쪽) 프로이트는 표상들에는 시간적인 질서가 없다는 점에서 “무의식에는 역사가 없다”고 했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은 사회ㆍ역사적 조건에 따라 상이하게 투여된다는 의미에서 “무의식은 사회ㆍ역사적이다” 라고 함.

- 18세기 이전과 이후의 성욕의 예. (성적인 욕망의 투여조차)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에 따라 상이한 양상으로 이루러진다. 에피스테메?

② “사회적 투여에서 계급 내지 이해의 선의식적 투여는 욕망 내지 집단의 무의식적 리비도 투여와 구별된다”(143쪽)

- 선의식적 투여와 무의식적 투여의 구별 -> 나중에 사라지는 개념.

③ “사회적 장의 리비도적 투여는 가족적 투여와의 관계에서 일차적이다.”(144쪽) 가족적 투여에 일차적인 위상을 부여했던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 리비도의 모든 사회적-성적 투여와 대상 선택은 단지 가족적인 오이디푸스에서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사회적 투여에 기반하고 있음.

- 욕망의 투여는 그 자체로 사회적인 것으로, 욕망이 가족적 욕망이 되는 것은 18세기 후반, 혹은 19세기의 특정한 사회적 조건,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의해 야기된 것뿐이다.

④ “리비도의 사회적 투여에는 두 극이 있다 : 파시즘적이고 편집증적 투여와 혁명적이고 분열적인 투여가 그것이다”(150쪽)

--> 전자는 다양한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욕망의 흐름을 오직 하나의 방향으로 제한하고 그것으로만 쏠리게 하는 것인데 반해, 후자는 다양한 방향을 긍정하고, 심지어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촉발하는 것.


4) 분열분석의 과제

* 분열분석의 임무 : “사회적 장의 무의식적 욕망의 투여에 도달하는 것”(AO, 419)


* 과제 :

- 첫째, 오이디푸스의 일자로만 해석되는 욕망을 모든 해석을 떠나 주체 속에서 그의 욕망하는 기계들의 본성, 구성물 및 기능을 발견하는 것. “오이디푸스적 관념이나 가족 삼각형 안에 모든 것을 쑤셔 넣는 정신분석의 ‘해석’과 반대로 모든 해석을 떠나 주체 속에서 그의 욕망하는 기계들의 본성, 구성물 및 기능을 발견하는 것”(151쪽)

- 둘째, 욕망하는 기계들과 욕망의 억압 간의 상호작용 전체를 발견하는 것. “사회적 장의 리비도 투여의 본성, 이러한 투여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내적 갈등, 이러한 투여와 선의식적 투여의 관계, 이 두 가지 투여의 가능한 갈등들, 요컨대 욕망하는 기계들과 욕망의 억압 간의 상호작용 전체를 발견하는 것”(AO, 453)


3. 『천의 고원』 : 다양체로서 무의식

4. 분열분석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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