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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Note

4. 리좀:내재성, 혹은 외부의 사유 - 1장(3)

by 내오랜꿈 20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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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리좀:내재성, 혹은 외부의 사유 (3)


3. 수목적 사유와 리좀적 사유


1) 수목적 체계와 위계적 체계


* “수목적 체계는 위계적 체계로서, 의미화와 주체화의 중심을 포함하며, 조직된 기억과 같은 중심적 자동장치를 갖고 있다.”(I, 21) 위계적 체계에서 하나의 개체는 오직 상위 이웃만을 가지고, 이웃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책의 유형에서 살펴본 거처럼 리좀/뿌리, 리좀/나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다양하게 분기하는 선들이 하나의 중심으로 귀착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109쪽)이다. 수목적 체계는 위계적인 체계로서, 중심에서 가까운 것과 먼 것 간에 위계가 발생하며, 잔가지나 곁뿌리들은 중심과의 관계에서(만) 의미화되고, 그 중심을 통해서(만) 주체화 된다.

* 이 위계화된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의 중심인 일자(이데아라고 부르든, 신이라고 부르든, 혹은 근거라고 부르든, 원리하고 부르든 상관없는)를 제거해야 한다(N-1). n-1, 혹은 중심의 제거, 바로 이것이 수목적 체계와 대비되는 리좀적 체계를 정의하는 명제이다. 따라서 리좀은 비-체계가 아니라 비중심화된 체계이다. 그리고 여러 방향으로 열린 체계고, 접속되는 항들에 따라 다른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다. “체계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체계인가가 문제다.”


2) 초월성과 내재성

* 수목적 체계는 초월성의 사유체계와 결부되어 있다. 즉, 모든 것을 ‘근거(Grund)’나 ‘원인(Cause)’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사유, 그리하여 그것을 첫 번째 원인이나 원리로 삼아 모든 것을 설명하는 사유다(112쪽). 이런 사유는 자신이 찾아낸 첫째 원리를 모든 것을 설명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제1원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형이상학. 이것은 이상적 본질에 도달하려는 그리스적 태도에서 연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초월성(transcendance)은 유럽에 고유한 질병이다.”(I, 24)

* 반면, “내재성은 유목적 세계의 고유한 사유방식이다.”(I, 24) “연기적(緣起的, dependent)인 관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거나, 어떤 것이 무엇과 관계하느냐에 따라 본질이 달리지고 관계의 질(가량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 달라진다는 생각은 오직 상호간의 내재적인 관계에 의해 모든 것을 포착한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인 사유”(113쪽)라고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수목적 사유가 어떻게 서구의 사유를 지배하게 되었을까?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서양과 동양과의 차이점 속에서 찾고 있다(숲과의 관계, 성과 관련된 태도, 관료제). 그들에게 ‘동양’이란 유목민이 그렇듯이 매끄러운 공간을 구성하는 가운데서만 존재하는 질적인 어떤 것으로 초월성에 대비되는 내재성, 홈 패인 것에 대비되는 매끄러운 것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


cf. '홈 패인 공간'이 구획하고 계산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를 두는 원거리 공간이라면, '매끄러운 공간'은 신체로 직접 달라붙어 직접적으로 감응(Affect)하는 근거리 공간이다.


3) 리좀 속의 수목, 수목 속의 리좀

* 위에서 ‘나쁜’ 서양에 대비되는 ‘좋은’ 동양처럼 들뢰즈/가타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주요 개념들(정착민/유목민, 홈 패인 것/매끄러운 것, 국가장치/전쟁기계, 수목/리좀 등)은 이항대립적이며 가치평가를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이분법은 아니다. 실제로, 이항적인 개념 각각이 상반되는 개념의 쌍을 가지고 있으며, 양자가 서로 겹치거나 포개지기도 하고, 이항적 개념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좋은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며, 그렇기에 안주하고 안심하는 사이에 어느새 반대편에 포획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이항적 대립선이 고정적이거나 항구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은 특히 탈주선이 허무주의적 색채를 띠게 될 때, 어떠한 선분성의 선보다도 더 위험하고 끔찍한 사태를 야기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매끄러운 공간이 우리를 구하는데 충분하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II, 292)


* 이원론을 파괴하기 위해 이원론적 개념을 이용 : 리좀과 수목의 상호적 발생계기를 다루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임. “리좀 안에는 수목적인 마디들이 있으며, 뿌리 안에는 리좀적인 압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두 모델의 대립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워지고 부숴지는 모델에 관한 것이며, 끊임없이 연장되고 파괴되며 다시 세워지는 과정”(I, 26)이다. 여기서 이들의 이분법적 개념 자체가 해체됨.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이원론을 파괴하기 위해 이원론적 개념을 이용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에 덧붙여, 기존의 가치척도를 해체하고 새로운 가치의 ‘산종(散種)’을 찬양하는 데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이, ‘좋음/나쁨’이라는 윤리학적 이분 범주의 불충분성을 알면서도, 사용하고선 버리고 다시 사용하는 식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평가는 단순한 상대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절대주의’다. 이를 통해 그들은 ‘다원론=일원론’이란 마술적인 공식에 도달하려함. 만약 이것에 성공한다면, 그들은 내재성의 장 안에서 펼쳐지는 장대한 일의성(univocité)의 철학에 이를 수 있다.(119쪽)


4. 내재성의 장

* 리좀은 출발 내지 기원이나 종말 내지 목적에 결부된 사유가 아니라 중간 내지 ‘중도의 사유’이다. “리좀은 출발점이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간(間)존재요 간주곡이다.” “중간은 결코 평균이 아니라, 반대로 사물들이 속도를 취할 수 있는 표면이다. 사물들 사이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또 상호 이동하는 국지화될 수 있는 관계를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수직적인 방향이며 하나와 다른 하나를 포함하는 운동이고, 시작도 끝도 없는, 두 둑을 무너뜨리고 중간에서 속도를 취하는 개울이다”(I, 31)


※ 들뢰즈/가타리와 데리다 비교 2 : 중도(milieu)의 사유와 사이(entre-là)의 사유


고원(plateau)과 ‘중도’(milieu) : 표현과 행동을 초월적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가치에 따라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평가하는 것. 중도(‘中道)의 사유.


중도의 사유(들뢰즈/가타리)와 사이의 사유(데리다)는 매우 미묘한 차이를 갖는 듯하다. 여기서 차이는 ‘사이’라는 말과 ‘중간’이라는 말의 차이라기보다는 중간 내지 사이에서 무엇을 보는지, 그것을 통해 무엇을 하는지 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그 사이, 그 여백을 통해 그것을 사이에 두고 있는 연쇄를 ‘가르고’ 끊으며 해체하며, 거기서 새로운 의미의 산포를 본다. 반면 다른 들뢰즈/가타리에게 그것은 접속의 지대며, 새로운 선이 접속되고 ‘부가’됨으로써 기존의 것을 다른 것으로 변이시키고, 새로운 무엇을 생산한다.


‘산포’는 이 새로운 생산의 가능성 내지 잠재성을 뜻하지만, 새로이 생산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다만 기존의 결합을 분리시킬 수 있는 여백의 잠재성에 주목한다. 반면 산포에 만족하지 못하는 들뢰즈/가타리로서는 여백이 포함하는 이질성과 잠재성보다는, 거기에 무언가 다른 것, 외부적인 어떤 선을 접붙여서 전체 선의 배치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버리는데 더 관심이 있다. 이로 인해 유사하게 이질성과 환원불가능한 차이에 말을 할 때조차도 그들은 접속, 외부성, 탈주선, 탈영토화에 대해 관심을 갖는 반면, 데리다는 기존의 통일성과 초월성을 해체하는데 관심을 갖는다. 나아가 접속의 문제로서 ‘중간’ 내지 여백을 보는 들뢰즈/가타리로서는 접속되는 항들의 신체성에 대해 관심이 가지만, 여백 자체가 소중한 데리다는 여백의 비판적 가능성이 신체성으로 귀착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이것이 데리다가 ‘기관 없는 신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이유고, 신체적인 것조차 텍스트로 변환시키는 이유며, 신체적 변환 자체에 대해 별 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 아닐까?).


* 리좀은 일자적 중심을 제거함으로써 내재성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내재성 속에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의 고정된 본질, 내적인 본질이 없으며, 다만 다른 것(외부!)과의 관계에 따라, 접속한 이웃과의 관계에 따라 그 본질이 달라진다고 본다는 것을 뜻함. 이런 이유에서 내재성은 ‘외부’라는 개념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외부의 사유고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리좀은 외부와의 접속이란 원리를 통해 ‘외부’를 통해 사유한다는 점에서 내재성의 구도를 형성하고, 내재성의 원리에 따라 접속 가능한 양태들 전체의 장을 ‘내재성의 장’ 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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