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장. 차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여기서 인용되는 『천의 고원』의 인용은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번역본 페이지다. 김재인 번역본인 새물결 출판사본도 꼼꼼하게 읽어본 편인데,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애초에 읽은 텍스트가 수유연구실 번역본인지라 더 친근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번역에서 크게 대립되고 있는 부분은 해당 chapter에서 간략하게 언급할 예정이다. 순서는『노마디즘』의 구성을 따라가는 방식을 취한다.)
1. 『천의 고원』, 혹은 철학적 음악?
* 『천의 고원』, 그 난해함 : 『천의 고원』의 그 악명(?) 높은 난해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1)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체.
2) 들뢰즈가 자신의 메타-피직스(meta-physics)를 구성하기 위해 기대고 있는 무수한 잡학들(철학, 문학, 언어학은 물론 신화학, 경제학, 고고학, 음악, 물리학, 분자생물학 등등)이 그 원인으로 지적.
3) 그러나 『노마디즘』의 저자에 따르면, 『천의 고원』의 난해함은 무엇보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더 완고해지는 우리의 고정된 사유, 살면 살수록 더욱더 강하게 고착되는 삶의 방식에 기인”(25쪽)한다.
==> 이미 우리 자신의 사고에 자리잡고 있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이 새로운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게 한다는 의미.
* 철학으로 음악하기 : 육체의 ‘전복’으로서 리듬을 타라
1) 들뢰즈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낯선 음악을 들을 때 귀에 거슬림을 느끼듯, 새로운 사유는 우리 안의 익숙한 사유와 충돌하며, 부대끼고, 결국 퉁겨나가곤 한다. 음악의 문외한이 쇤베르크류의 현대음악을 이해하기 힘들 듯, 우리는 『천의 고원』에서 마주치게 되는 그 무수한 낯선 개념들과 새로운 사유의 방식들에 질려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자신의 책을 “오디오에 음반을 걸어놓고 듣듯이 읽어달라”(27쪽)고 당부한다. 곧, 앞 뒤 고정된 순서와 차례에 따르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취향에 따라 들어보라고 권한다.
==>이 말은 결국 어떤 책을 통해 어떤 ‘참된’ 인식에 도달하려 하기보다는 그 책을 자신의 삶에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
- 근대적인 합리성의 인식체계로 독해하지 말 것.
- 참된 인식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 읽고 자신의 삶과 접속하여 새로운 효과를 생산하면서
- 의식이 바뀌고 표상 내용이 달라져도 사실은 잘 달라지지 않는 우리의 신체를 그 신체의 모든 표면에 새겨진 무의식적인 삶의 감각을 바꾸는 계기로
- 자신한테 익숙하지 않은 사고 행동 리듬을 수용하는 능력의 증대로 키워가라는 말로 이해되어진다.
들뢰즈적인 용어로 다시 정리하자면,
- 하나의 배치로.
- 합리성과 체계의 부정이 아니라 근대적인 합리성과 체계의 부정.
- 외부와 접속하면서 가지게 되는 기계로(효과의 생산).
- 접속과 이질성, 다양성, 비의미적 단절의 원리를 가진 리좀적인 사고와 행동.
2) 철학으로 음악하기 : 들뢰즈에게 철학으로 음악을 한다는 표현은 비유 이상이다. 우선 음악은, 들뢰즈가 추구하는 ‘표상없는 사유’의 가장 적합한 예이다. 음악이 주는 감응이나 느낌은 말들 이전에 오며, 말로 표현되지 않은 채 오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어떤 느낌으로 온다. 이처럼 음악은 표상 외부에서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31쪽) 나아가 음악의 ‘리듬을 탄다’는 것은 단순히 그 음악을 이해한다거나 인식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몸으로 실행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귀가 새로운 소리를 향해 열리고, 익숙한 감각들로부터 벗어나고, 결국 우리의 습속과 신체가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으로 음악하기에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렇다.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나를 포함한) 세계를 ‘변혁’하는 방식으로서 『천의 고원』이용하기.
3) 세계를 ‘변혁’하는 방식으로서 『천의 고원』이용하기 : 전혀 낯선 것, ‘들을 수 없거나 식별 불가능한 소리’ 혹은 아예 ‘소리가 없는’, 그래서 결국 소리 없이도 있을 수 있는 음악(소음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음악)은 곧 ‘리듬’을 의미한다. 리듬을 탈 수 있다면, 느낄 수 있다면 박자에 맞추어 손가락을 까닥거릴 수 있는, 강렬한 체험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리듬은 곧 ‘표상’없이 가능한 사유로 직결된다(이는 또한 스피노자의 ‘공통개념’과도 통한다). 표상을 통한 사유는 결국 기존 관념의 동일성(정체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표상을 통한 사유, 즉 표상적인 사유가 근본적으로 동일성에 의한 사유라는 것은 이런 뜻임.
인지된 것이 없는 상태에서 낯선 그대로의 날 것을 먹는 것이 가능한지의 문제는 고착된 영역을 벗어나(탈영토화) 낯선 영역에 개입되는 혹은 내 것으로 만드는(making:재영토화)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 담력이나 모험 그 자체 의 유무(有無)를 묻고 있는 듯 싶다.
리듬을 타는 일, 들뢰즈를 즐겁게 만날 수 있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새로운 사유의 음악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유를,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새로운 사유의 감각을 촉발하고, 우리의 감각/정서를 변용시켜 새로운 사유의 리듬에 적절하게 감응하게 한다. ==>“학문을 예술의 관점에서 보고 예술을 삶의 관점에서 본다면, 다시 말해 철학도 예술도 삶의 문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문제로 본다면, 그것은 예술이나 청학, 혹은 학문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촉발/변용의 계기를 창출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의식이 바뀌고 표상 내용이 달라져도 사실은 잘 달라지지 않는 우리의 신체를, 그 신체의 모든 표면에 새겨져 있는 무의식적인 삶의 감각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32~33쪽)
지금은 귀에 낯설고 거슬리는 『천의 고원』이라는 음반도 그렇게 오디오에 걸어놓은 채 몇 번이고 귀 기울이다 보면, 언젠가 우리의 몸이 그 리듬을 타고 들썩거릴 날이 올까?
2. 들뢰즈+가타리
그들의 사건적 만남/접속 : 이질적인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리좀적이다
* 들뢰즈 - 강한 의미에서의 니체주의자이자이자 강한 의미에서의 스피노자주의자.반헤겔주의자. 철학사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하는 일련의 작업을 해왔으며, 『차이와 반복』으로 박사논문을 제출한 후 철학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철학자.
* 가타리 - 프로이트, 라깡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하던 정신분석가, 전투적 좌익활동가, 맑스주의를 현재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독창적인 사유를 펼쳐가던 좌파이론가.
==>이처럼 상이한 경력과 사상을 가진 두 사람이 ‘친구’가 되다. 들뢰즈는 가타리로부터 정치를 배웠고, 가타리의 아이디어는 들뢰즈를 통해 정교한 철학적 개념화를 얻었다. 이들의 사건적인 만남/접속을 통해 새로운 지대(場)가 열리고 새로운 사유들, 창조적 변이의 선들이 펼쳐졌다.『안티 오이디푸스』, 『카프카』, 『천의 고원』,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4권의 공동저작이 그 결과물. 그러나 이들의 ‘친구-되기’는 여기서 그친 게 아니다. 들뢰즈는 가타리를 통해 맑스와 친구가 되었고, 가타리는 네그리(『미래로 돌아가다』)와, 네그리는 마이클 하트(『디오니소스의 노동』, 『제국』)와 친구가 되었다. 들뢰즈가 철학사에서 발굴하거나 계간(鷄姦)한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칸트 같은 이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들뢰즈-가타리의 친구가 되었다.
3. 『천의 고원』에 이르는 길.
1. 1968년 이전
* 들뢰즈/가타리의 공동작업에서 들뢰즈의 몫과 가타리의 몫을 가려내는 것은 어려우며, 심지어 무의미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만남/접속이 이루어기 전을 더듬어 각자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들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그 문제의식들이 서로를 어떻게 촉발했는지, 서로간의 만남/접속을 통해 어떻게 변용되어갔는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들뢰즈, 내재성의 장 : 68혁명을 중요 기점으로 삼고 그 전/후를 비교해 볼 때, 철학자 들뢰즈가 철학사를 사유하는 방식은 이전부터 독특했음을 볼 수 있다. 그에게 철학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 철학자의 진정한 사상을 찾아내는 주석 달기도 아니요, 헤겔이나 하이데거처럼 모든 철학사를 자신의 철학으로 수렴되는 발전의 단계들로 환원하는 것도 아니다(→ 헤겔은 스스로를 종점에 위치시킴으로써 이전의 모든 철학자들을 자신의 출현을 준비한 사람들로 만듦. 하이데거는 자신이 어떤 시점을 차지하기 위해 선행하는 철학자들을 모두 ‘존재 망각의 역사’에 밀어 넣음). 오히려 그것은 기존의 메이저 철학자를 계간해서 전혀 다른 모습의 사생아를 만드는 것이요(칸트의 경우, 『칸트의 비판철학』), 기존에 주목받지 못했던 새로운 사유의 선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부각시키는 것이다(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니체의 경우). ==>“니체의 뒤를 덮쳐 사생아를 만들려고 보니까, 어느새 니체가 자신을 덮치고 있더라.”
들뢰즈에게 철학사의 탐구란, 각각의 철학자와 자신의 고유한 만남과 그로부터 생성되는 새로운 사유를 추구하는, 친구 만들기다. 내재성의 장을 철학적으로 구성할 친구들. “모순보다 더 심오한 차이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존재’가 아닌 ‘생성’을 사유(43쪽)할 친구들. 이를 위해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 개념으로부터 가장 탁월한 ‘내재성 철학’의 예를,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으로부터 차이화하는 반복이라는 개념을 이끌어 낸다.
* 가타리, 욕망과 혁명의 결합 : 가타리를 추동하는 문제의식은 이런 것이다. 이미 이론적으로 제도화되어 멈추고 굳어버린 혁명적 사유, 공산당이라는 제도적 영토에 정착하고 고착되어버린 맑스주의 운동을, 어떻게 다시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실천적 사유, 혁명적 실천으로 변환시킬 것인가(44쪽). 68혁명은 그에게 새로운 맑스적 실천이 생성될 수 있는 정치의 공간을 제공했다. 낭테르 대학의 기숙사 문제로부터 시작된 68혁명은, 일상적 삶을 사로잡고 있는 다양한 권력과 그로 인해 차단되고 억압된 욕망, 그런 억압을 당연시하는 금욕주의적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47쪽)으로 확장되었다. 이른바 욕망과 혁명의 결합이 그들의 화두였던 셈이다. 혁명조차 금욕적인 실천으로 여기는 정통적 좌파에겐, 68년에 분출된 다양한 욕망의 흐름들이 이해될 리 없었고, 그것은 단지 ‘소부르주아의 철없는 난동’ 정도로 치부되었다. 반면 가타리는 68년의 화두를 밀고 나가, 욕망과 혁명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일에 몰두한다. 화석화된 맑스주의로부터도, 프로이트-라캉으로부터도 벗어나는 새로운 탈주선을 그리면서, 가타리는 라캉적인 ‘구조’ 개념에 대비되는 ‘기계’로서의 무의식, ‘결여’가 아닌 ‘생산’적인 힘으로서의 욕망을 찾아나선다.
* 이러한 사유와 실천의 산물로 나온 것이 바로 『안티 오이디푸스』이다. 여기서, ‘욕망하는 생산’이란 이 책의 논지를 펼쳐가는데 기본적인, 그래서 핵심적인 개념으로 ‘욕망과 생산이 하나의 동일한 힘’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와 라캉까지 포함해서 기존의 정신분석학 전반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욕망’, 즉 ‘생산적 능력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욕망’을 보여준다. 이 욕망에 기초해서 ‘혁명’을 다시 재정비하는 것이 『안티 오이디푸스』가 말하고자 하는 주된 문제의식이다.
2. 『안티 오이디푸스』: 정신분석학 비판을 위하여
* 『안티 오이디푸스』- 니체적인, 그리고 맑스적인 : 들뢰즈와 가타리의 첫 저작인 『안티 오이디푸스』는 니체적인 동시에 맑스적인 책이다. 니체의 『안티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 암시하듯, 『안티 오이디푸스』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니체적인’ 비판을 시도한다. 또한 ‘정신분석학 비판을 위하여’라고도 읽힐 수 있는 그 책의 부제는, 맑스의 『자본』의 부제인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와 상응한다. 맑스가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생산적 능력으로서의 노동을 찾아낸 것처럼, 들뢰즈/가타리는 프로이트, 라깡의 정신분석학 비판을 통해 욕망을 생산적 능력(‘욕망하는 생산’)으로서 재발견한다. 그들은 ‘욕망하는 생산’ 이란 개념에 의해 ‘가족화된 오이디푸스적’ 욕망에 파열구를 만들고, ‘욕망하는 생산’의 흐름이 분출하여 흐르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정신분석학 자체, 혹은 무의식 이론을 혁명적으로 변환시킬 가능성을 시험(51쪽)한다.
* 『안티 오이디푸스』, 욕망의 미시정치학 : 이러한 이론적 변환은 다음과 같은 이중의 질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첫째, 스피노자(1670, 『신학정치론』)와 라이히(1934, 『파시즘의 대중심리』)의 질문을 반복하면서, “대중은 어째서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51쪽)라는 ‘정치학의 근본문제’를 던지는 것. 이로부터 ‘혁명적인 욕망’과 ‘억압에 대한 욕망’이라는 대립쌍이 도출된다. 혁명이란 억압에 대한 욕망, 혹은 억압에 길든 욕망을 혁명적 욕망으로 변형시키는 것, 그런 억압적 욕망을 만들어내는 삶의 방식을 변혁시키는 것(53쪽)이다.
둘째, “금욕에 기초하지 않은 혁명, 반대로 욕망에 기초한 혁명은 불가능한가?”(53쪽)라는 질문. 대답은 명백하다. 혁명은 늘상, 의무가 아니라 욕망에 의해 추동되어 왔으며, 혁명이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욕망’에 기초할 때 비로소 그 힘이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이들이 구상하는 욕망의 미시정치학은 바로 새로운 혁명의 정치학이었다. ==>혁명은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다!
3. 『카프카』: ‘욕망’에서 ‘배치’로
* 들뢰즈/가타리와 푸코의 긴밀한 영향 관계 : 일찌감치 들뢰즈를 ‘다음 세기를 지배할 철학자’라고 상찬한 바 있는 푸코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영역판에 서문을 썼으며, 『감시와 처벌』에서는 자신이 『안티 오이디푸스』에 지고 있는 특별한 빚을 언급하고 있다. 요컨대,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창안한 ‘권력의 미시정치학’이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시도하는 ‘욕망의 미시정치학’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그러나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역으로, 들뢰즈/가타리의 사유에도 중요한 변환을 가져왔다. 푸코가 탐구하는 권력 배치들의 다양한 양상, 권력은 억압하는 방식으로보다는 차라리 생산하고 구성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명제, 주체란 그러한 권력의 효과로 만들어진다는 통찰 등이 권력/욕망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의 두 번째 저서인 『카프카』는, 바로 이런 변환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의 고원』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한다.
===> 『안티 오이디푸스』→『감시와 처벌』→『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 『카프카』- ‘욕망’에서 ‘배치’로 : 『카프카』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근간을 이룬 억압적인 욕망/혁명적 욕망, 혹은 권력/욕망이라는 이분법을 포기(이로써, 권력과 욕망의 대립도 자동삭제)하고, 모든 것이 권력=욕망이라는 새로운 테제를 제시한다. 욕망=권력의 다양한 ‘배치’들만이 존재할 뿐이며, 중요한 것은 그러한 권력(=욕망)의 배치를 변환시키는 것, 탈영토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과 욕망사이의 자유로운 배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례로서 카프카의 작품(『성』,『소송』) 이 있다.
* ‘배치의 변환’에 따른 권력과 욕망사이의 내재성(상호성) : 순수한 욕망이란 없으며, 욕망은 언제나 특정한 배치로서 존재한다는 것, 그 상이한 배치들 간의 차이와 충돌 속에서 현재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를 갖는 특정한 욕망이 ‘권력’으로 불릴 뿐이라는 것, 반면 그것과 대립하는 잠재적인 욕망, 능력(puissance)이 전복의 가능성으로 상존한다는 것. 따라서,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욕망’ 자체가 아닌 욕망의 ‘배치’들이 중요하다.
욕망은 특정한 배치로서만 존재한다. 욕망의 다른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욕망의 문제로 혁명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기에!
4. 『천의 고원』: 새로운 역사유물론?
* ‘계열화’와 『의미의 논리』 : 카프카의 배치라는 개념이 보다 심오하게 확장되는 영역이 바로 『천의 고원』이다. 여기서 배치(agencement)란 ‘사물이나 사태를 바라보는 어떤 새로운 태도’를 내포하고 있다. 이 배치라는 개념의 이해를 위해서는,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분석하는, 하나의 사물이 다른 것과 하나의 계열을 이루며 연결되는 ‘계열화’라는 기본개념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계열화에 따라, 연결되는 사물이나 사실들은 서로 다른 의미나 혹은 상반된 의미를 갖게 된다. 찰리 채플린이 영화 『모던타임즈』속에서 들고 있는 빨간 깃발은 그 앞의 철근을 실은 자동차와 계열화되었을 때 '주의하시오'라는 의미를, 찰리 뒤에 있는 시위대와 계열화되었을 때는 ‘공산주의자 리더’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이를 통해 들뢰즈는 사물의 의미를 이웃한 항들과의 이웃관계에 의해 정의하고자 한다. 대상은 그 자체의 본질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부단히 변화하는 이웃항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의 ‘사건’으로서 자신의 의미를 ‘생성’한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표상 없는 사유’가 실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 ‘배치’(agencement)와 배치의 四價性 : ‘배치’는 “사건이나 계열화와는 달리 어떤 개개의 항의 의미를 포착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연결된 전체, 공시적인 어떤 상태를 포착하려는 개념”(60쪽)이다. 그것은 다시 ‘기계적 배치’와 ‘언표행위의 배치’로 나뉘는데, 이 둘은 동일한 배치의 두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법정이나 교도소가 재판소의 기계적 배치를 이룬다면, 법전, 판결, 형벌, 소송규칙 등은 언표행위의 배치를 이루는 것이다. 배치는 어떤 항을 자신 안으로 포섭하여 일부로 만드는 ‘영토화’와 거기서 벗어나도록 하는 ‘탈영토화’라는 두 가지 기본방식에 따라 작동한다. 식당의 배치는 탁구대를 식탁으로 영토화하지만, 강의실의 배치는 그것을 탈영토화하여 탁자로 영토화시키며, 탁구를 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식당과 강의실의 배치로부터 탈영토화되어야 한다.
들뢰즈/가타리는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출발점이 되는 지점을 ‘탈영토화의 첨점’이라고 하며, 기계적 배치, 언표행위의 배치, 영토화와 탈영토화를 ‘배치의 사가성’이라고 부른다. 결국 배치란 어떤 항을 사로잡고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하게 하는 외부적인 관계성을 강조하는 개념인 동시에, 탈영토화를 통해 언제든지 다른 배치로 전환할 수 있는 가변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 기계 : 배치 안에서 각각의 항은 다른 이웃항과 접속하여 하나의 기계로 작동한다. 고착된 사물이 유동적인 배치를 통해, 생산적인 기계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또한 여러 기계가 접속되어 만들어진 하나의 배치가 그 자체로 다른 것과 관련해서 하나의 기계로 작동할 수도 있다. 접속하는 항이 달라지고, 작동하면서 그것이 절단하고 채취하는 흐름이 달라지면 동일한 항도 다른 기계가 된다. 입은 식당의 배치 안에서 ‘먹는 기계’로, 강의실의 배치 안에서 ‘말하는 기계’로, 침실의 배치 안에서는 ‘섹스 기계’로 전환된다(60쪽).
*『천의 고원』, 새로운 역사유물론 : 이로서 배치는 개체의 영역을 규정하는 외부적인 관계성을 강조하는 개념임과 동시에 가변성이 강조되는 개념(61쪽)임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배치의 개념은 역사유물론으로 연결된다.
맑스가 『임노동과 자본』에서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안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라는 것을 역사유물론의 기본명제로 내세울 때, 그는 다름 아닌 계열화 내지 배치를 통해서만 어떤 항의 의미나 기능을 규정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맑스가 사회적 생산의 영역에서 선취한 배치의 역사유물론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호나 사회관계는 물론 얼굴이나 리듬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장한다. 역사유물론의 확장과 변환, 새로운 역사유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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