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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바다’에 운명 싣고 떠돌다 문명과 바다 10. 원양항해: 위험으로 가득 찬 모험 ▣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30일
대항해시대에 선박과 항해술이 발전하기는 했지만 사실 해상 위험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근대 초에 원양 항해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치르고 이루어진 극히 위험한 모험이었다. 교과서에서는 나침반이 널리 사용되면서 항해의 안전성이 크게 높아진 것처럼 서술하지만 이 말이 정확히 맞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 더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나침반은 중국에서 개발되어 유럽으로 전해졌으나 정작 아시아의 바다에서는 별자리 관측 항해가 더 일반적이었다. 별자리 관측의 대표적인 도구는 인도양의 카말(kamal)이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이 단순한 도구를 이용하여 별의 고도를 잼으로써 배가 어느 위도 상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고, 또 여러 항구의 위도가 미리 매듭으로 표시되어 있어서 현재 위도 상에 어느 항구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방식은 19세기 후반까지도 사용되었다. 현재 1835년에 몰디브 선원에게서, 또 1892년에 힌두 선원에게서 구한 실물이 보존되어 있다. 이에 비해 나침반은 보조적인 도구로서, 날이 흐려서 별자리를 관찰하기 어려운 때 사용하였다. 나침반이 유럽의 지중해에서 더 널리 이용되었던 이유도 지중해가 인도양보다 시계(視界)가 불량하여 별자리를 찾기가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별자리 관측이 나침반보다 더 믿을 만하고 더 유용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심지어 포르투갈인들이 아시아에 들어왔을 때 이들 역시 카말을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근대 초 원양항해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배들은 위도와 경도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망망대해를 표류했고 1500~1635년 리스본과 인도를 오간 배 중 20%가 침몰했다. 바다는 선원들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영국의 유명한 해군 지휘관 조지 앤슨(George Anson, 1697~1762)의 항해는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741년 앤슨은 센추리언 호를 타고 남아메리카 최남단을 돌아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향해 가다가 격심한 폭풍우를 만났다. 두 달 가까이 폭풍우에 시달리는 가운데 선원들에게서는 괴혈병 증세가 나타나서 매일 6~7명씩 사망하고 있었다. 드디어 폭풍우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급선무는 하루바삐 중간 기착지인 후안 페르난데스 섬(오늘날에는 로빈슨 크루소 섬이라고 불린다)을 찾아가서 신선한 물과 식량을 보충받아 지친 선원들을 살리는 일이었다. 앤슨은 자신의 배가 대략 남위 60도의 위도선을 따라 계속 서진하여 아메리카 최남단을 빠져 나와 약 200마일쯤 서쪽에 와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넓은 대양을 항해한다고 생각하면서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바로 정면에 육지가 나타났다. 그곳은 아메리카 최남단 지역의 서쪽 끝인 누아르 곶(Cape Noire)이었다. 이 배가 이미 대서양에 들어섰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폭풍우에 밀려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다시 서쪽으로 더 항해한 다음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후안 페르난데스 섬을 찾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선원들은 계속 죽어갔다. 이 배가 가까스로 후안 페르난데스 섬과 같은 남위 35도 상에 이르렀지만, 문제는 그 섬이 현 위치에서 동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앤슨은 서쪽으로 가야 한다고 판단하고 그 방향으로 필사의 항해를 했다. 그러나 섬은 나타나지 않았다. 암만해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것으로 생각한 앤슨은 뱃머리를 반대로 돌려서 같은 위도를 따라 동쪽으로 항해해 갔다. 이틀 동안 항해해 갔을 때 눈앞에 산맥이 남북으로 달리는 남미 해안을 만나게 되었다. 충격적이지만 이틀 전에 뱃머리를 돌린 지점에서 조금만 더 항해했으면 섬이 나왔을 텐데 그때 방향을 돌렸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배를 돌려 왔던 길을 다시 가야 했고, 이렇게 헤매는 사이에만 80명이 더 죽었다. 대항해시대 원양항해의 실상은 이랬던 것이다. 따라서 원양항해 때 사고 발생 비율이 극히 높았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포르투갈의 해양사 전문가인 고디뉴(M. Godinho)가 리스본과 인도를 오가는 포르투갈 선박을 연구한 결과를 보면 모두 20개월 정도 소요되는 왕복항해 중에 사고가 날 가능성이 지극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00~1635년 중 리스본을 출발하여 인도로 향한 배 852척 가운데 약 10%가 중간에 사고를 당했고, 인도에서 유럽으로 귀환하는 경우에는 14.7%가 사고를 당했다. 전체로 보면 리스본을 떠난 배 가운데 중간에 침몰한 배가 전부 169척으로서 사고율은 약 20%에 달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비행기 10대 중 2대 꼴로 추락하는 ‘대형사고’가 계속 터진 셈이다. 침몰 사고 기록을 보면 선원들이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다. 1662년 2월 11일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아른헴(Arnhem) 호가 귀국길에서 침몰 사고를 당했을 때 폴케르트 에버르츠(Volckert Evertsz)라는 사람이 생존해서 기록을 남겼다. 구명선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서 위험하게 되자 선장은 주저 없이 선원 40명을 추려서 바다에 던졌다. 이를 본 목사가 “신께서 원하시면 우리 모두를 살려주실 것입니다”라며 항의하였다. 그러나 구명선에 있던 선원들은 “영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겠지만 실제 위험이 어떤 것인지는 우리가 더 잘 압니다” 하고 대꾸하더니 13명을 더 바다에 던졌다. 그때 아주 수영에 능한 암본 출신의 무슬림 선원 한 명이 헤엄쳐 와서 뱃전을 잡았다. 배 안의 선원들은 그 사람의 손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며 배에 오르지 못하게 막았고, 결국 이 사람은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 배는 그 후에도 5명을 더 바다에 던지고 나서 9일 뒤에야 모리셔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양항해의 발전의 이면에는 지극히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 위험성은 고스란히 선원들에게 떨어졌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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