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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바다 18. 아메리카 문명의 정복과 파괴

by 내오랜꿈 2008.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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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은 먼 곳에”…정복자 멋대로 잉카제국 파괴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18. 아메리카 문명의 정복과 파괴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8년 01월 25일 


» 피사로(왼쪽)와 아타왈파,

콜럼버스가 도착하고 나서 채 수십 년이 지나지 않아 아스텍과 잉카, 마야와 같은 아메리카의 기존 문명들이 모두 붕괴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대제국들이 소수의 침입자 앞에서 그렇게 단기간에 줄줄이 무너졌을까? 비록 유럽인들의 무력이 강했다고는 해도 다른 문명권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세계 여러 지역들이 유럽의 식민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대항해시대가 시작되고 수백 년이 경과한 이후의 일이지 유럽인들이 처음 도착하자마자 일어나지는 않았다. 예컨대 아프리카만 해도 우리는 흔히 유럽 세력이 아무런 저항 없이 쉽게 정복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유럽인들의 지배는 오랫동안 아프리카 해안의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을 뿐이며, 내륙까지 완전히 지배한 것은 1830년대에 가서의 일이다. 유독 아메리카의 제국들만 그토록 허망하게 멸망한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들이 있다. 

피사로가 이끄는 168명의 소규모 부대는 나팔과 딸랑이로 큰 소리를 내며 잉카를 기습해 7천명을 살해하고 황제를 생포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아스텍·잉카·마야 문명은 이처럼 순식간에 붕괴됐지만, 실제 유럽인들이 지배한 곳은 대륙의 일부에 불과했다 

» 피사로가 이끄는 부대가 잉카제국의 쿠스코를 정복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학살하는 모습.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지배하는 과정을 보자. 

피사로는 1513년에 파나마 지협을 횡단하여 유럽인으로서는 처음 태평양을 목도한 발보아 탐사대의 일원이었다. 이후 그는 파나마를 근거지로 해서 남아메리카 탐험을 여러 차례 감행하다가 1532년에 드디어 잉카 제국에 도달하게 되었다. 106명의 보병과 62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피사로의 부대는 페루의 고지대 도시인 카하마르카에 도착해서 그 당시 잉카(황제)인 아타후알파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피사로와 아타후알파가 만나는 장면에 대해서는 여러 종류의 기록이 남아 있어서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정오 무렵, 아타후알파가 신하들과 함께 이방인들이 머물고 있는 숙영지로 다가왔다. 아타후알파의 앞에는 2천명이 앞장서서 길바닥을 쓸었고, 그 뒤로 전사들이 좌우에 늘어서서 행군해 왔다. 그 뒤에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세 무리의 사람들, 그리고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금은 장식을 단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따라왔다. 잉카 자신은 왕관과 큼직한 목걸이로 화려한 장식을 한 채 가마 위에 앉아 있었다. 이 화려한 가마는 80명의 고관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였다. 광장을 완전히 메운 엄청난 수의 인디오들을 보고 에스파냐 병사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 일부는 무서워서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지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잉카를 기습 공격할 계획을 준비해 두었다. 

피사로는 발베르데라는 수사를 아타후알파에게 보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에 복종하고 에스파냐 국왕의 지배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면서 성경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아타후알파는 이런 모욕적인 행동에 불쾌했는지 성경을 내던졌다. 수사가 피사로에게 돌아오면서 “개 같은 적들을 치라”고 소리질렀고, 곧 피사로가 공격 신호를 보냈다. 에스파냐 병사들은 미리 준비한 각본대로 공격을 개시했다. 총소리와 함께 보병과 기병이 모두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오면서 그들의 전투 구호인 ‘산티아고’를 외쳐댔다. 그들은 인디오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나팔을 불어댔고, 말에 딸랑이를 매달아서 소리를 내게 했다. 무장하지 않았던 인디오들은 곧 에스파냐 병사들의 칼에 맞아 죽어갔고, 놀라서 도망치다가 서로 짓밟아서 죽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피사로 자신은 칼과 단검을 들고 진격해서 아타후알파의 가마에까지 도달했다. 가마를 멘 인디오들이 칼에 맞아 죽었지만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에 들어와서 가마를 높이 들어올렸다. 에스파냐 인들은 마침내 말을 몰고 달려들어 가마를 쓰러뜨리고 아타후알파를 생포하였다. 

잉카는 수백만명의 백성들 위에 살아 있는 신으로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이며, 무엇보다도 8만명의 대군을 거느린 황제가 아닌가. 그런데 원군이라고 해야 1600 킬로미터나 떨어진 파나마에 두고 온 168명의 소규모 부대가 고작 나팔 소리와 딸랑이 소리로 음향 효과를 내면서 기습 공격을 한 끝에 7천명을 살해하고 잉카 자신을 생포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은 것이다. 잉카 제국 사람들은 아타후알파를 문자 그대로 신으로 떠받들고 있었으므로 그가 몇 달 동안 인질로 잡혀 있는 상태에서도 명령을 그대로 따랐다. 그 동안 피사로 일행은 잉카 제국 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또 파나마에 원군을 요청할 수 있었다. 아타후알파는 그가 잡혀 있는 방(가로·세로 6.7 x 5.2 미터, 높이 2.4 미터)을 전부 금으로 채워주는, 역사상 가장 비싼 몸값을 지불했다. 그러나 무정한 에스파냐 인들은 그런 엄청난 양의 금을 받고 나서는 아타후알파를 처형하였고 조만간 잉카 제국은 완전히 몰락해 버렸다. 

이런 식으로 기존의 제국 질서는 붕괴되었다. 그러나 기존 문명을 파괴하는 것은 급격히 이루어졌으나, 그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과서 상으로는 ‘에스파냐 령 아메리카’, ‘프랑스 식민지’ 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또 지도상에 광범위한 지역을 그런 식으로 표시하지만 사실 그것은 왜곡된 표현이다. 유럽인들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곳은 중부 멕시코에서 칠레에 이르는 지역, 카리브 제도의 몇몇 섬들, 북미의 퀘벡부터 조지아에 이르는 연안지역, 브라질 해안 정도로서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서 보면 아직 일부 지역에 불과했다. 외부인의 접촉이 거의 없는 아마존 지역에는 전통 사회가 그대로 보존되었고, 북아메리카에서도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 서쪽으로는 마치 러시아인들이 팽창해 들어가는 시베리아처럼 변경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 드넓은 지역들을 모두 포괄하는 국가의 틀이 완성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가서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국가’나 ‘제국’이 아니라 현지 지배자들이 지역 차원에서 주민과 토지에 대한 사적(私的)인 지배체제를 만든 것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히려 중세 봉건 지배로 후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스파냐 인 지배자들은 엔코미엔다(encomienda)라는 가혹한 조세·조공 체제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모델이 된 것은 잉카 제국의 미타, 혹은 아스텍 제국의 라테킬처럼 에스파냐의 정복 이전에 원래 존재하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형식상 유사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실제 내용은 현지 지배자들이 자의적으로 인력과 물자를 수탈하는 것이었다. 그 명분은 에스파냐의 국왕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 통치를 하지 못 하므로 현지 지배자에게 원주민들을 ‘보호’하고 기독교로 인도하는 임무를 맡기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조세를 받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설사 이 제도에 선한 의도가 없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무런 통제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권력자에게 절대적 권력을 주면 절대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 정복자들의 원칙은 이런 것이었다. “신은 하늘에, 국왕은 먼 곳에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내가 명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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