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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바다 9. 폭력의 세계화 - 대포로 무장한 유럽, 세계를 약탈하다

by 내오랜꿈 2007.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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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로 무장한 유럽, 세계를 약탈하다
문명과 바다 9. 폭력의 세계화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 :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해적선이 상선을 공격하는 모습.


유럽인들이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 대륙으로 팽창해 간 것은 세계사의 불균형의 첫 출발점이라 할 만하다. 장기적으로 유럽의 힘이 전세계에 미치게 되는 과정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출발점에서 보면 유럽이 중국이나 이슬람권 같은 다른 문명권보다 더 부유하지는 않았다. 유럽은 힘이 넘쳐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부족한 것을 찾아서 해외로 나아간 것이다. 세계는 유럽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유럽은 세계를 필요로 했다. 말하자면 이때 유럽은 ‘프롤레타리아 대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서 아시아를 비롯하여 세계 각 문명권 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었을까? 분명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유럽인들의 가공할 폭력이었다. 

총포와 화약을 발명한 것은 중국이지만, 이를 배에 장착해 ‘떠다니는 폭력’으로 세계를 휘저은 것은 유럽이었다. 아메리카·아프리카·동남아 해상을 접수한 유럽배들은 상거래뿐 아니라 노략질도 일삼았다. 강력하고 체계적인 폭력이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이질적인 문명권 안으로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강한 무력이 필요하며, 따라서 세계 여러 문명 간의 만남은 대개 평화적이기보다는 폭력적이기 십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럽의 팽창은 유독 폭력성이 강했다. 1502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두 번째로 캘리컷에 도착했을 때, 그는 무슬림 선단을 격침시킨 다음 800명의 귀와 코, 손을 잘라서 이 지역 지배자에게 보내면서 카레라이스를 해먹으라고 말했다. 그의 선단의 선장 한 명은 무슬림 상인 한 명을 붙잡아서 채찍질하여 그가 실신하자 입에 오물을 넣고 일부러 무슬림들이 금기시하는 돼지고기 조각으로 입을 막음으로써 모욕을 가했다. 

유럽인들이 해외에서 강력한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핵심 요소 중의 하나가 대포이다. 윌리엄 맥닐 같은 연구자는 다른 지역보다도 유럽에서 선박과 대포가 성공적으로 결합한 것이 세계사의 흐름에서 결정적 요소 중의 하나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듯이 총포와 화약이 제일 먼저 개발된 곳은 중국이었다. 또 선상에서 총포를 사용하는 것 역시 중국이 가장 앞서 있었다. 선상에서 총포를 사용한 최초의 기록은 쿠빌라이의 제2차 일본 원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상으로 누가 최초로 사용했냐는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얼마나 유효하게 사용했는가이다. 사실 중국 정부는 1550년대에 총포가 왜구를 막는 데에 효율적이지 않다고 단정했고, 이후 중국은 칼이나 창 같은 전통적인 무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결과 중국 해군의 힘이 약화되어서 조만간 왜구의 침입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을 뿐 아니라 결국은 서양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해 유럽에서는 선상에서 대포를 사용하는 방식이 크게 발달했다. 유럽 해군이 터키 해군을 격파한 레판토 해전(1571)이나 영국 해군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해전(1588)에서는 함포가 승패를 결정지었다. 

» 네덜란드 선박(가운데)을 공격하는 포르투갈 선박들.


사실 배에 포를 장착하는 것은 해결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난제였다. 갑판 위에서 대포를 발사하면 배의 균형이 깨져서 매우 위험하게 된다. 따라서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무거운 대포를 흘수선(吃水線, 선체가 수면에 닿는 선)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선체 내부에서 포를 발사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선체의 양면에 방수 처리를 한 포문(gunport)을 내야 했다. 또 대포를 발사하면 포탄이 발사되는 것과 같은 크기의 엄청난 반동력이 일어난다. 이 되튀는 힘을 잘 처리하지 못할 경우 몇 번 포를 쏘면 배가 깨지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퀴를 이용하여 충격을 완화시키는 장치인 왕복대(truck carriage)이다. 이런 일련의 발전 끝에 유럽 배와 다른 지역의 배 사이에는 무장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생겨났다. 

강력한 대포로 무장한 채 세계의 바다를 휘젓고 다니는 유럽 선박은 ‘떠돌아다니는 폭력’ 그 자체였다. 다른 지역의 배들은 유럽에서 들어온 이 가공할 무력 집단 앞에서 전전긍긍했다. 비교적 평화로운 자유교역 지역이었던 인도양에서는 배를 단단하게 지을 필요가 없어서 선체가 약했기 때문에 대포를 설치하기도 힘들고, 또 상대의 포 공격에 대단히 취약했다. 자연히 유럽 선박들은 인도양에 들어오자마자 무력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 점은 포르투갈 선박이 인도양에 가서 처음 벌인 해전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났다. 1509년 디우(Diu) 전투에서 알부케르크가 지휘하는 포르투갈 선단은 이집트와 구자라트 지방 간 연합 해군을 격파함으로써 인도항로를 확보하였다. 이후 인도양의 배들은 포르투갈의 통제를 이리저리 피해 다녀야 했다.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 해안지역의 일부 세력들(대표적인 것이 명청 교체기에 대만을 거점으로 해서 중국 연안 지역을 위협하면서 한때 명나라의 회복을 기도했던 정성공(鄭成功)의 세력집단이다)처럼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지역이 없지 않지만 이는 예외에 속하며, 전반적으로 유럽 해상 세력은 아메리카·아프리카·동남아시아에서 제해권을 잡았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점은 유럽 세력은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였을 뿐 광활한 내륙 지역을 장악할 만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거점들을 지배하고 그 다음에 그 거점들 간의 해로를 확실하게 지배하는 것이다. 이 체제를 소위 ‘상업거점제국(Trading-Post Empire)’이라고 부르는데, 포르투갈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그들이 확보한 여러 거점들에서 매매 활동을 하고 또 그들이 통제하는 해로를 통해 상품을 수송하였다. 우리는 이 거래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해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 현지 상인들과 거래를 하지만 동시에 무력을 통한 약탈도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국제거래의 안전성이 비교적 확실하게 지켜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시대에 상업과 약탈은 구분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선들도 지나가는 다른 배의 무장이 약해 보이면 서슴없이 해적 행위를 했다. 이런 식으로 포르투갈 선박들은 그들이 확보한 해로 상에서 무력을 이용한 강탈을 통해 많은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골적인 약탈 대신 조금 더 세련되고 체계적인 방식이 발전해 나왔다. 소위 카르타스(Cartaz, 통행증) 제도가 그것이다. 그들은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현지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특정 항로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통행증을 발행하였다. 통행증을 판매하여 수익을 얻는 점 외에도, 그들의 사업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인이나 상품의 통과를 막는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를 두고 여러 학자들은 전(前)산업화 시대에 유럽인들이 전세계에 수출한 것은 다름 아닌 폭력이었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이 대포의 힘을 앞세워 팽창해 나가면서 이전보다 더 강력하고 더 체계적인 폭력이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산되었다. 근대의 세계화는 우선 ‘폭력의 세계화’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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