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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지킨 활달한 문장가, 유몽인

by 내오랜꿈 2007.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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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반정이 아니라 쿠데타요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지킨 활달한 문장가, 유몽인

▣ 이덕일 역사평론가
출처 : <한겨레 21> 제685호 2007년 11월 15일 


유몽인(柳夢寅)은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던 선조 22년(1589) 서른한 살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에서 장원급제함으로써 관직에 발길을 들여놓는다. 장원급제한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어우야담>(於于野談)이란 야사집을 펴낸 데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가치관에 머물지 않는 인물이었다. 문장가로 자처한 그가 문장에 대해 논한 글을 보면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그는 ‘이수광을 전송하는 글’에서 “시(詩)에는 귀신이 있는데 이름이 마(魔)이다. 그 성질은 가난, 곤궁, 질병, 방랑 등은 좋아하지만 화려, 부귀, 자신만만하고 득의에 찬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그의 호 역시 성격을 잘 보여준다. 홍만종은 <순오지>(旬五志)에서 “김시습의 청한자(淸寒子)나 유몽인의 어우자(於于子)는 자신들이 숭상하는 것을 호(號)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어우(於于)란 <장자>(莊子) ‘천지’(天地)조에 나오는 말로서 밭을 돌보는 노인이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에게 공자를 빗대 ‘허망한 말로 세상을 속이고(於于以蓋衆) 홀로 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러 천하에 이름을 파는 사람 아닌가(獨弦哀歌以賣名聲於天下者乎?)’라고 비웃으며 ‘밭 가는 일을 방해하지 말고 가라’고 조롱한 데서 나온 말이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공자를 비웃은 장자의 한 구절로 자호(自號)한 데서 그의 기질이 우뚝하다. 

△ 유몽인이 파직된 뒤 머무른 금강산 유점사와 그가 지은 <어우야담>.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잃지 않았다. (사진/ 권태균)


광해준 즉위에 일조하며 승승장구 

유몽인은 15살 때 판관 신식의 딸과 혼인했는데, 신식의 며느리가 우계 성혼(成渾)의 딸이었기 때문에 잠시 성혼에게 가서 공부한다. 성혼은 서인들이 종주로 삼는 학자로서 유몽인으로서는 서인이 될 기회였지만 그에게 성리학은 잘 맞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에서 유몽인이 “젊었을 때 성혼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가르침을 잘 지키지 않고 행실이 경박하자 꾸짖고 끊어버렸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장자처럼 활달한 처신이 성리학자의 눈에는 경박하게 보였을 것이다. 

벼슬길에 오른 지 3년 만에 임진왜란을 맞았을 때 그는 사신 일행으로 북경에 가 있었다. 귀국 뒤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정6품)로서 광해군을 보좌해 적진을 헤집고, 암행어사로서 전란에 피폐해진 백성 생활도 돌본다. 임진왜란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던 형이 일본군에게 죽는 큰 아픔도 이때 겪지만 나아가 기존의 가치관으로는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가 <어우야담>에 양반뿐만 아니라 많은 평민·노비들의 이야기와 함께 기독교에 관한 기록인 ‘기리단’(伎利檀)에 대해서도 쓴 것은 이때의 충격이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의식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선조 32년(1599) 유몽인은 사헌부 집의(執義)로 임명되는데, 이때 사관은 ‘문장이 단아하고 도량이 있었다’(文雅有餘)라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 35년(1602) 경연 시강관(侍講官)으로 있던 그에 대해 사관은 “문재는 있으나 식견과 역량이 없었다’(有文才, 而無識量)라고 정반대로 평하고 있는데, 이는 당론의 시각에서 적었기 때문이다. 정작 유몽인은 이정귀(李廷龜)가 북경에 갈 때 써준 글에서 “조정의 사론(士論)이 나뉜 뒤부터 붕우의 도를 평생 보전할 수 있게 되었는가? 벗 사귀는 도는 하나인데 어찌하여 둘로 나뉘었는가? 둘도 불행하거늘 어찌하여 넷이 되고 다섯이 되었는가?”라고 비판한 것처럼 당론에 비판적이었다. 유몽인은 선조 41년(1608) 1월28일에 도승지가 되어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 일조한다. 다음달 1일 선조가 세상을 떠나는데, 이 무렵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세자 광해군 대신 어린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잇게 하려고 획책하면서 조정에 큰 파란이 일고 있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유영경이 “오늘의 전교는 여러 사람들의 뜻밖에 나온 것으로 신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반대하고 군사를 동원해 궁궐 안을 호위하며 비상시를 대비했다고 전한다. 이런 비상시국에 유몽인은 도승지로서 세자시강원 때부터 여러 번 모셨던 광해군이 즉위하는 데 일조한다.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는 시? 

이런 연유 때문인지 광해군 시절 유몽인은 집권 북인(北人)의 유력인사로서 승승장구한다. 예조참판, 대사간 등의 요직을 역임하던 그는 광해군 7년(1615) 이조참판이 되어 광해군 10년(1618)까지 인사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집권 대북(大北)이 인목대비 폐위에 나서면서 그는 다른 길을 걷는다. 정인홍과 이이첨 등 대북에서 폐모론(廢母論)이 나오자 정인홍의 제자였던 정온(鄭蘊)이 사제의 연을 끊으며 폐모론에 반대하는데, <당의통략>은 이때 ‘유몽인이 정온을 도와서 중북(中北)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인 중에서는 영의정 기자헌 정도가 폐모론을 반대하고 귀양길에 올랐고, 대부분의 북인들이 이른바 대론(大論), 또는 대절(大節)이라는 명분으로 폐모를 밀어붙일 때 유몽인은 반대쪽에 서 있었던 것이다. 광해군 10년 판의금부사를 겸직하고 있던 유몽인이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인목대비 폐모 이후 인심이 흉흉해져서 역모 고변이 잇따르는 상황에서였다. 

안처인(安處仁)·안후인(安厚仁) 형제가 관련된 역모가 고변되어 시끄럽던 그해 4월 유몽인은 처사촌 정회(鄭晦)와 남산 기슭에 올라 봄 경치를 즐겼다. 술 마시며 놀다가 소녀가수인 은개(銀介)를 불러 노래를 듣는데, 하인이 달려와 추국(推鞫)에 참석할 시간이 되었다고 일렀다. 

“이처럼 좋은 시절에 어떤 도깨비 같은 자가 감히 익명(匿名)으로 고변하여 나에게 이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유몽인은 가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가면서 중얼거리던 시를 국청에서 붓으로 옮겨썼는데 이 시가 문제였다. 

△ 유몽인위성공신교서. 조선 광해군 5년(1613) 3월에 임진왜란 때 왕세자인 광해군을 보좌한 공으로 유몽인에게 위성공신 3등을 내린 교서이다.(사진/ 권태균)


“성 안에 가득한 꽃, 버들과 봄놀이 즐기는데/ 옥같이 고운 손, 잔을 놓고 백주장을 부르네/ 장사가 홀연히 장검을 짚고 일어서/ 취중에 늙은 간신의 머리 찍으려 하네.”(滿城花柳擁春遊, 玉手停盈唱栢舟, 壯士忽持長?起, 醉中當斫老姦頭) 

문제의 시어는 ‘백주’(栢舟)와 ‘늙은 간신’(老姦)이었다. 백주는 <시경> ‘용풍’에 위(衛)나라 세자 공백(共伯)이 일찍 죽어 부모가 그 처 공강(共姜)을 개가시키려 하자 ‘백주’(栢舟)를 지어 절개를 맹세했다는 내용에서 유래한다. 백주지통(栢舟之痛), 백주지절(栢舟之節) 같은 고사성어가 여기에서 나왔다. 즉 유몽인이 폐모된 인목대비의 고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었다. 늙은 간신은 인목대비 폐위를 밀어붙인 대북의 대신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유학 이시량(李時亮)이, ‘백주(栢舟)의 비유와 노간(老奸)의 설(說)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자세히 조사하여 부도한 죄를 다스리고, 패거리를 곡진히 비호하며 즉시 신문할 것을 청하지 않은 양사(兩司·사헌부, 사간원)의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라고 상소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유몽인은 광해군에게 백주는 자신이 아니라 은개가 부른 것이며, 늙은 간신은 변을 일으킨 안처인 형제 등을 일컬은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유몽인은 동시에 자신이 현재의 옥사(獄事)에 대해 살펴보니 대단한 것은 아닌 듯했다면서, “어떤 자가 이런 재앙을 만들어내어 100명씩이나 연루되는 옥사가 이루어졌는가?”라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광해군에게 토로했듯이 대북 일당 전제의 경색된 정국에서 잇따르는 옥사에 불만을 가졌음도 시인했다. <연려실기술>은 유몽인이, “숟가락이 남보다 조금 큰 것만 보면 반드시 고변했다”고 말했다고 전하는데, 광해군은 사직을 청하는 유몽인에게 “아경(亞卿·참판)은 건성으로 처리할 직임이 아니고 국청은 시를 짓는 장소가 아니다. 일이 해괴하기 그지없으니 물러가 공의(公議)를 기다리라”라고 일단 유보적인 조치를 취했다. 

양사에서는 계속 유몽인의 파직을 요청했고 결국 그해 7월 체차되고 말았다. 광해군 12년(1620) 8월 원접사(遠接使) 이이첨(李爾瞻)이 김상헌·장유 등 서인계 인물들과 함께 유몽인이 ‘문예(文藝)에 매우 뛰어나다’며 다시 등용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예문관 제학에 임용되었으나 그는 출사하지 않았다. 비변사에서는 광해군 13년(1621) 8월 “유몽인을 출사시키든지 체차하든지 어떠한 조처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라고 양자택일을 요구했고, 유몽인에게 마음이 떠난 광해군은 체차시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다음달 유몽인은 63살 고령으로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이때 그는 “신선과 부귀를 모두 갖기는 어렵네/ 세월은 흐르고 인간 세상의 계책은 어그러졌네”(神仙富貴兩難諧 流水人間計較乖)라고 속세를 떠나 출가하는 심정을 밝히는 시도 썼다. 금강산에서 혹독한 병을 앓으며 한겨울을 난 유몽인은 이듬해(1622) 서쪽의 보개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바로 그해 정변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했다. 유몽인은 이때의 심경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지난 가을 구월 내가 금강산에 들어온 것은 노년을 마치고자 함이었다. 지난 10월에 집안사람들이 서울에서 산사로 온 것은 나의 위중한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 4월 금강산을 떠나 서쪽으로 온 것은 식량 때문이다. …도중에 구군(舊君)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내가 크게 놀라지 않은 것은 이미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보개산 영은사의 두 승려에게 주는 글’) 

늙은 과부가 혼자서 규방을 지킨다 

광해군 때 배척받았던 사람들이 대거 몰려 벼슬자리를 구했다. 그러나 유몽인은 달랐다. 영은사의 두 승려가 “지금 새로운 성군께서 나라를 다스리자 벼슬을 구하는 자들이 시장에 몰려드는 것 같은데, 왜 중로에 배회하십니까?”라고 묻자 “내가 산에 들어온 것은 세상을 가볍게 여김이 아니라 산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지금 산을 떠나는 것은 관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답하며 역시 출사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소극적으로 출사만을 거부하는 것으로 광해군에게 절개를 바친 것이 아니었다. 인조 즉위 석 달 뒤인 인조 1년(1623) 7월 선산이 있는 양주(楊州)로 내려가 있던 유몽인에게 금부도사가 들이닥쳤다. 그의 아들 유약 등과 함께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혐의였다. 유몽인은 국문에서 아들이 자신이 지은 ‘청상과부의 탄식’이란 ‘상부탄’(孀婦歎)을 좋아해 일을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일흔 살 늙은 과부가/ 혼자서 규방을 지키는구나/ 사람마다 개가를 권하는데/ 무궁화 꽃 같은 멋진 남자였네/ 여사의 시 자주 들었기에/ 태임(太妊·주 문왕의 모친)·태사의 훈계 조금은 알았지/ 흰 머리에 젊은 얼굴로 단장한다면/ 어찌 분가루에 부끄럽지 않겠는가.”(七十老孀婦, 單居守閨?, 人人勸改嫁, 善男顔如槿。 慣聽女史詩, 稍知妊?訓, 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인조는 ‘무궁화 꽃 같은 남자’지만 자신은 끝내 광해군에게 절개를 지키겠다는 뜻의 시였다. 조익(趙翼·1579~1655)의 문집인 <포저집>(浦渚集)에는 이때 묘당(廟堂·조정)에서 만든 통유문(通諭文)이 실려 있다. 

“지난해 7월에 역적 유전 등이 맹약한 글이 고발되었을 적에, 그 글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의 이름이 거의 40명에 달하였는데, 기자헌(奇自獻)이 바로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그중에 유몽인은 도망쳤다가 잡혀왔는데, 형신을 많이 받지 않고도 모의한 사실을 일일이 자복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시를 공술하면서 폐주(廢主)를 위해 복수하려 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사형된 뒤 정조 때에야 복권돼 

유몽인에게 인조반정은 반정이 아니라 쿠데타일 뿐이었다. 자신은 비록 광해군 말년 조정을 떠났지만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는 것은 삼강(三綱)의 군위신강(君爲臣綱)이나 오륜(五倫)의 군신유의(君臣有義)에 어긋난다고 본 것이다. 평생 장자를 좇았던 그가 불의한 현실에 유자의 사생관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반정정권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유몽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괄의 난을 겨우 진압한 인조 2년(1624) 11월 반정 일등공신 이귀(李貴)가 인조에게, “유몽인이 한 번 백이(伯夷)에 관한 설을 주창하자 학식이 있는 사람까지도 따라서 화답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서인들의 쿠데타에 불만을 품은 많은 인사들은 유몽인이 백이숙제처럼 광해군을 위해 절개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 유몽인은 정조 18년(1794)에야 복권되는데, 정조는 유몽인에 대해 “혼조(昏朝·광해군) 때는 바른 도리를 지켜 은거하였고, 반정(反正)한 후에도 한번 먹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국조보감>)라고 그 절개를 높이 사고 있다. 한마디로 참선비의 처세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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