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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바다 7. 유럽 팽창의 심성

by 내오랜꿈 2007.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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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 있는 신의 땅 ‘에덴’으로 돌아가리 
문명과 바다 7. 유럽 팽창의 심성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11-09 


» 11세기 유럽 지도로 위부터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나타낸다

많은 문명권이 원양 항해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로 세계의 바다를 연결한 것은 유럽인들이었다. 왜 유럽인이 최초로 전지구적 해상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을까를 설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테지만, 유럽 문명 내면의 어떤 특이한 집단심성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꿈, 열망, 신념 혹은 그 무엇이라고 부르던지, 사람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정신적 요소가 그들의 행동을 부추기지는 않았을까? 

이와 관련해서 특기할 점이 중세 유럽 문명 내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지상낙원(paradise)’의 개념이다. 

유럽인들은 아시아 동쪽 끝에 지상낙원인 ‘에덴동산’이 있을거라 믿었다. 이믿음은 마르코 폴로 등이 쓴 ‘여행기’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어 아시아는 놀라운 일들, 엄청난 부, 아름다움과 위험이 상존하는 곳으로 각인됐다. 유럽인들에게 아시아 정복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는 ‘중세적 꿈’의 실현이며 신의 뜻을 받드는 종교적 과업이었다 

» 유럽인들이 상상한 세계의 ‘괴물’ 종족들.

오늘날에는 낙원이라고 하면 아예 그 존재를 부정하든지, 혹은 이 세상이 아니라 사후(死後)에 가게 되는 또 다른 차원의 ‘장소’, 차라리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낙원’은 곧 ‘지상낙원’을 가리켰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에덴동산을 말한다. <성경>의 ‘창세기’에 아주 구체적으로 지리적 설명이 제시되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유럽인들은 지구상 어딘가에 에덴동산이 실재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그 지상낙원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가? 

중세 유럽의 구전 전통에 따르면, 노아는 죽을 때 이 세상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서 셈·함·야펫 세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시아는 셈에게, 아프리카는 함에게, 또 유럽은 야펫에게 돌아갔는데, 그 중 셈이 차지한 아시아가 가장 좋은 곳이었다. 이곳의 북쪽 경계는 티나 강(Tina, 돈 강), 남쪽 경계는 기혼 강(Guihon, 나일강)이며, 동쪽 끝에 에덴동산이 있고 중간에 시온 산이, 그리고 남쪽에 시나이 산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전승에 의하면 지상낙원은 한 마디로 말해서 아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유럽 문명의 기저에는 원죄 의식이 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분노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낙원의 기쁨 대신 지옥의 공포를 안고 살게 되었다. 하느님과 함께 지극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던 지나간 황금시대에 대한 후회가 유럽인들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이러한 죄의식은 어떻게 해서든 지상낙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연결되었다. 중세 시대에 유럽인들이 아시아를 향해 품고 있던 강력한 동경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지상낙원에 대한 향수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의 세계관은 이처럼 종교적인 내용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것은 또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직접 보고 왔다는 각종 ‘여행기’들에 의해 확인되고 더 강화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실제 그가 본 내용만이 아니라 그가 들었던 소문, 더 나아가서 그가 믿고 염원하는 것, 상상한 것까지 뒤섞여 있었다. 그가 그리는 아시아의 모습이 대개 엄청난 과장으로 부풀려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의 항주에는 모두 1만 2천 개의 돌다리가 있고, 게다가 이 다리의 아치가 얼마나 높은지 그 아래로 배들이 돛대를 접지 않고도 쉽게 지나다닐 수 있으며, 둘레가 2마일 정도인 광장들이 4마일마다 하나씩 있어서 이곳에 1주일에 사흘씩 4만~5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거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치핑구(일본)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금이 나는 곳”으로서 궁궐의 “보도들 역시 순금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두 손가락 정도나 된다.” 이처럼 그의 기록은 실제 사실과 전설이 혼재해 있었다. 

» 마르코 폴로

중세 말부터 근대 초까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맨드빌 여행기>는 더 환상적이다. 단 한 번도 유럽 땅을 떠나본 적이 없는 이 작가는 기존의 여러 여행기들의 내용을 짜깁기해서 아시아를 몽환적으로 그렸다. 아시아 각지에는 두루미와 싸우는 피그미족, 개 대가리를 가진 사람, 머리는 없고 배에 눈이 달린 사람, 엄청나게 큰 발 하나만 가지고 있어서 이것을 양산처럼 사용하여 햇빛을 가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타프로반(Taprobane, 실론)에는 개만한 식인 개미들이 황금을 지키고 있다. 아시아는 놀라운 일로 가득 찬 곳이며, 최대의 부, 지극한 아름다움과 동시에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과연 이런 내용의 ‘여행기’들을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놀랍게도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수백 번 판을 거듭하여 출판된 이 책들은 실제 여행 안내서 구실을 하였다. 콜럼버스도 마르코 폴로와 맨드빌의 여행기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책들의 여백에는 그가 꼼꼼하게 주석을 달아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콜럼버스는 중세적인 세계관을 그대로 믿고 항해를 떠난 것이다. 맨드빌의 여정을 참고하여 유럽인이 상상한 세계의 모습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유럽에서 곧바로 동쪽으로 떠나면 예루살렘이 나온다. 그 다음에 인도의 여러 지역들을 거치게 되고 그 끝 부분에 전설의 기독교 왕국인 사제 요한 왕국이 나온다. 이 너머에 암흑의 땅이 있고 바로 그 다음에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지상낙원이 있다.’ 그러나 그곳은 인간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으며, 따라서 맨드빌도 그곳만은 가지 못했다고 기술한다. 

» 마르코 폴로가 소개한 안다만제도 견두인들.


“그 어떤 살아 있는 사람도 낙원에 들어갈 수 없다. 육로로는 그 안에 도달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황야에 사나운 짐승들이 있고 아무도 넘을 수 없는 산과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 바다를 통해 그곳에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파도가 너무나 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맨드빌은 여기에 아주 중요한 꼬리표를 달았다. “예외적으로 신의 특별한 은총을 통해서만 그곳에 항해해 갈 수 있다.” 콜럼버스가 바다를 통해 아시아의 동쪽 끝으로 직접 가겠다고 한 것은 분명 이 구절과 무관치 않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뒤에도 자신이 인도 혹은 일본 근처의 어느 섬에 도착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목적지인 지상낙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계속 찾아 헤맸다. 실제로 그가 남미의 오리노코 강 어귀에서 거대한 민물의 흐름을 발견하자 이것이 지상낙원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강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인류가 다시 지상낙원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으며, 그러한 신의 뜻을 구현할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는 이슬람교도들을 전멸시키고 로마와 같은 세계제국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유럽의 팽창은 중세적 꿈에서 동력을 길어왔다. 그것은 곧 이윤과 권력의 확보라는 세속적 성격으로 급격하게 변화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지배와 정복이 곧 신의 뜻이며 따라서 절대적으로 옳다는 종교적 색채는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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