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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을 노래하는 독일 록 음악

by 내오랜꿈 2014.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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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을 노래하는 독일 록 음악


출처:르몽드 디플로마티크 [75호](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885)

일시:2014년 12월 04일 (목) 

브리기트 파촐트(Brigitte Päzold) | 언론인



극우 사상을 노래하는 블랙 메탈이라는 음악이 노르웨이, 폴란드, 러시아, 프랑스에서 발전했다. 록 음악의 인종차별적 가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80년대에 독일에서 유행했다.


 



“옛날의 독일은 없다. 세상의 모든 인종이 독일을 점령하러 왔다. 독일이여, 눈을 떠라. 소리 높여 외친다. 외국인 나가라!” 빠르고 거칠고 공격적인 음악이다. 1984년 코만도-페르노라는 록그룹이 만든 노래다. 나치 록그룹은 1990년대 중반까지 독일에서 맹위를 떨쳤고 90년대 말까지 활동한 그룹들도 있다. 스퇴르크라프트(분노한 사람들)는 ‘우리는 독일을 청소하는 세력이다’라고 노래하고 폴크스쫀(국민의 분노)은 ‘감옥에 처넣어라, 아니면 사막으로라도 보내라. 어디로든 보내버려라’라고 울부짖는다.


그룹 엔치크(최종 승리)는 ‘이민자’라는 노래에서 터키인들을 수용소에 집어넣으라고 외치고 있다. ‘그 자들은 마늘을 씹으며 독일로 와서 만지는 것마다 더럽히고 있다. 때려라, 죽여라, 감옥에 처넣어라. 수용소에 처넣어라.’


독일에서 스킨헤드는 1970년 말에 생겨났고 현재 6천여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스킨헤드가 처음 등장한 곳은 영국이었고 ‘절망한 청춘’의 상징인 길고 지저분한 머리를 한 펑크족에서 분리되어 나온 노동자 계급 출신들이다. 이들은 일할 때나 쉴 때 보란 듯이 카키색 군복상의를 입고 부츠를 신고 다닌다. 처음에는 음악을 즐기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주의적인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스크루드라이버나 노 리모스(No Remorse, 후회 사절) 같은 영국 그룹은 파쇼 사상의 영향을 받아 1985년에 ‘피와 영예’ 운동을 창시했다. 그들의 음악을 ‘오이(oï)’라고 부르는데 스킨헤드가 싸움을 시작할 때 지르는 소리로 자메이카 흑인들의 스카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음악이다.


스크루드라이버의 중심인물인 이안 스튜어트(1)는 ‘백인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노래했고 ‘세계 시오니스트들의 음모’에 맞선 인물이었다. 스크루드라이버는 즉시 독일의 라디칼(급진), 노이 베르테(새로운 가치), 스퇴르크라프트, 폴크스쫀 등의 그룹과 경쟁할 만큼 성장했다. 스퇴르크라프트는 1993년에 해체되었고 노이 베르테는 2010년까지 활동했다. 라디칼은 2006년 이후 음악작업을 멈춘 상태다.


스킨헤드는 대부분 사회적으로 빈곤계층 출신이다. 그들은 거칠고 강하고 싸움을 잘 하는 남성성을 추구하고 또 사회적으로 인정받길 원하기 때문에 조정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극우정당들은 동지애와 공동체 정신으로 환심을 사고 일도 주면서 이들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 일이라는 것은 대부분 경호나 행사장 정리 같은 허드렛일이었다. 그래서 1979년 쾰른에서 결성된, 좌파성향의 사회 비평적인 노래를 불렀던 펑크그룹 코츠프로켄은 극우정당인 독일국가민주당이 침투해서 스킨헤드 특공대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물론, 모든 나치 록그룹이 정치단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외국인 혐오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프랑크푸르트의 이미지에 먹칠한 뵈즈 옹클스(Böhse onkelz, 사악한 아저씨)는 1984년부터 ‘터키인을 떠나라’고 노래했다.


1985년 함부르크에서 터키인 라마칸 마프티가 스킨헤드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991년 바쓰-라인 주에 있는 작은 베드타운인 휜쎄에서는 방으로 날아들어 온 화염병 때문에 두 명의 레바논 여자 아이가 심각한 화상을 입은 사고가 일어났다. 범인들은 세 명의 스킨헤드로 이민자를 공격해서 독일 통일 1주년을 기념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술을 마시고 록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나는 폭격기 조종사다. 나는 죽음을 심는다’가 그들이 들은 노래의 가사다.


이 노래는 뵈즈 옹클스의 레퍼토리 중 하나로 1993년 초에 그 노래가 수록된 앨범 ‘성스러운 노래’는 히트차트 50위 안에 들었고 25만장이 팔렸다. ‘파쇼 밴드’라는 명성은 198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첫 앨범인 ‘좋은 사람'에는 “나는 아이들이 좋아. 팔다리가 잘려나간 온기 없는 아이들이…”라는 가사의 노래가 실려 있다.


독일 교육부 장관은 1992년에 가서야 문제의 앨범의 판매를 금지시켰고 그 후에 뵈즈 옹클스의 독일 내 콘서트를 금지시켰다. 그래서 그룹은 공개적으로 극우정당과 거리를 두었다. 나치 하수인들은 뵈즈 옹클스를 ‘좌파의 돼지’라고 비난했지만 그룹이 걱정했던 것은 상업적 성공이고 법망을 피하려 했던 것뿐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정부가 나치 록그룹에 대해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자 몇몇 그룹은 모호한 암호 같은 가사로 정부의 단속을 피하기 시작했다. 스퇴르크라프트의 앨범에는 아돌프 H.가 등장한다. 물론 아돌프 히틀러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 시대’는 제3제국을 의미한다. 이 그룹은 한 앨범을 KKK에 헌정했는데 KKK가 무슨 의미냐는 질문에 ‘부도덕한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활동금지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 본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지만 생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치 록그룹의 활동금지 조치는 앨범이 불법으로 판매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들을 더 빨리 막지 않았을까? 1970년대 좌파 테러에는 그토록 신속하게 행동한 독일정부가 스킨헤드에는 왜 관대했을까? 네오나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킨헤드를 가려내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스킨헤드를 극히 일부현상으로 치부하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나치 록그룹은 1989년 이전에는 지역적으로 서독 스킨헤드 사이에서만 퍼져 있다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독에서 진정한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동독의 스킨헤드는 잔인한 상어, 에드빈과 폭격기 같은 그룹도 결성했다. 그룹의 리더 중에는 서독에서 온 네오나치 운동원도 있었다.


동독을 무시하는 서독의 오만에 저항하다


청소년을 군대조직처럼 교육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운동장이나 문화센터에서 극우경향이 쉽게 받아들여진다. 동독 패망 후 젊은이들은 방향을 잃고 분노했다. 열렬한 스탈린주의자에서 철저한 민주주의자로 변신한 자신들의 아버지와 사회지도자들에 대해 분노했고 자신들을 이등시민으로 취급하는 오만한 서독인들에 분노했다. 그리고 대량실업과 물질적 빈곤이 이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이 독일 통일로 좌절한 사람들의 희생양이 되었다.


동독은 의무적으로 반파쇼 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극우파는 이미 통일 이전부터 존재했다. 1970년대 말 디스코텍에서 펑크음악이나 오이음악에 맞추어 서로 격렬하게 몸을 부딪치고 포고댄스를 추며 나치식 경례를 하는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다. “동독 경찰은 펑크족은 퇴폐적이고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스킨헤드는 착한 아이들로 여겼다”고 동독 범죄학자인 베른트 바그너(2)가 말했다. 오랫동안 스킨헤드는 상대적으로 당국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었다. 축구장에서 나치경례를 하고 인종차별 욕설을 하는 젊은이들이 크게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1987년 동베를린에서 엘리먼츠 오브 크라임과 피르마의 콘서트 도중 극우청년들이 야구 방망이를 들고 난동을 벌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 관용은 탄압으로 변했다. 범죄자들은 체포되었고 중형이 선고되었다. 스킨헤드를 노리는 진정한 조직되었다. 하지만 1989년 11월 이후 경찰과 당국의 태도는 방관으로 바뀌었다. 1990년 11월 25일 50여 개 스킨헤드 록그룹 중 하나가 베를린 근처 에베르스발데에서 앙골라 출신의 안토니오 아마두를 때려 죽였다. 하지만 범죄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경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시민들도 암묵적으로 공모했다. 1991년 드레스덴에서 나치 스킨헤드들이 모잠비크인인 조르지 고몬다이를 전차 승강장에서 밀었지만 주위에 있었던 승객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특히 통일로 새로 생겨난 독일 서부의 주(州)는 극우파에 매우 호의적이고 폭력사건도 많이 발생한다.


1992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토마스 하이제 감독의 다큐멘터리 <고장 났어, 가자(Stau, jetzt gaht’s lost)>가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할레에 사는 스킨헤드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이민자들을 증오하는가?”라는 질문에 동독의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절망 때문이에요.”


관대하고 민주적인 나라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사회가 나서다


답은 본능적으로 나왔다. 생각은 논리가 없고 혼란스러웠다. 그룹의 ‘중심인물’이라는 자가 마르크스와 히틀러를 들먹이며 사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책에서 읽은 파쇼 사상과 학교에서 배운 자본가들의 자본 착취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을 뒤섞어 그리고 서독의 식민주의자들을 언급하며 결론을 내렸다. “폭력적인 것은 시스템이지 우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서독에 외국인 혐오자들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스킨헤드들이 자주 출몰해 이민자 사냥에 나선다. 첫 인명피해는 자르지방에 있는 난민신청자들의 숙소에 화재에서 발생했다. 1992년 12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묄른에서는 3명의 터키 여성이 네오나치가 일으킨 방화로 숨졌다. 대중의 분노는 촛불행진으로 나타났다. 정계, 재계, 언론 등 모든 단체가 관대하고 민주적인 독일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동참했다.


 

브리기트 파촐드 - 베를린에 거주하면서 독일의 사회적 변동에 대한 글을 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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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안 스튜어트는 1993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 후 그룹의 활동은 거의 멈춘 상태다.


(2) Klaus FARIN, Eberhard Seidel-Pielen, <Rechstruck Rassismus im neuen Deutschland>, Rotbuch Verlag, Berlin, 1992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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