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크랩/문화예술

기욤 아폴리네르와 '그의' 화가들

by 내오랜꿈 2014. 12. 29.
728x90
반응형


기욤 아폴리네르와 '그의' 화가들


출처:르몽드 디플로마티크 [76호](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938)

일시:2014년 12월 29일 (목) 

로랑스 캉파 Laurence Campa | 언론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그의’ 화가들

 

 

  
 

아폴리네르. 태양처럼 빛나는 그 이름을 부르면 가슴이 벅차오르며 속도와 새로움에 매료된 코스모폴리탄의 세계가 살아 움직인다. 그 세계는, 기계들이 시적이면서 조형적인 잠재가능성을 보유하고, 유럽 전역에서 시대의 발명품들이 빛을 발하고, 야수파, 입체파, 오르피즘, 추상파 같은 근대성을 숭배하는 세계이며,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마크 샤갈, 마르셀 뒤샹 등 장차 20세기의 등대가 될 예술가들이 서성이는 세계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1880년 빌헬름 코스트로비츠키라는 이름의 무국적자로 태어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있다.

 

제1차 대전이 시작될 무렵의 프랑스, 그 예술적 열광

 

1914년 이전의 파리는 예술과 문학의 도시이자 세계의 빛이며, 프랑스의 긍지였다. 어떻게 그런 파리를 꿈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창작의 분위기 속에서 삶과 시가 하나가 되는 파리를 누가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젊은 시절부터 아폴리네르는 문자와 선의 결합에 매혹을 느꼈다. 15세 때 그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시 <미뉘>에 삽화를 그려 넣었다. 1901~1902년 독일에 머물 때는 미술관과 전시회를 찾아다녔다. 쾰른에서는, 훗날 ‘사랑받지 못하는 자의 노래’(<알코올>, 1913)에 영감을 주게 될 그의 연인 애니 플레이든을 닮은 ‘청순한 성모’를 바라보며 몽상에 잠겼다. 드레스덴에서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마돈나’를 본 추억은 ‘힐데샤임의 장미’(<이교도와 그 일파>, 1910)에 풀어놓는다. 베를린에서 그는 루카스 크라나흐, 한스 홀바인, 알프레드 시슬레, 카미유 피사로,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들을 볼 기회를 얻는다.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제우스 신 제단의 원기둥에 그려진 신들과 인간의 전쟁을 보고 아폴리네르는 최초의 미술비평을 쓰게 됐고, 이것이 1902년 유명한 <르뷰 블랑슈>에 게재됐다.


파리로 돌아온 청년 시인 아폴리네르는 그 당시 파리에서 크게 인정받으며 평단으로부터 ‘바람의 화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노르웨이 출신의 에드바르 디릭스와 친교를 맺는다. 그리고 작업실과 갤러리들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아폴리네르는 1904년 아폴리네르가 샤투 근처 센 강변을 거닐다가, 그때까지 무명이던 두 화가 앙드레 드랭과 모리스 드 블라맹크를 만났다. 그들의 캔버스 위에 그려진 강렬한 선과 색채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사실주의나 인상파와는 거리가 먼 그들의 그림은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폴 고갱에게서 배운 것들을 종합한 것이었다. 그 다음해 가을 살롱 전에서 그들은 앙리 마티스와 샤를 카무앙과 함께 유파를 형성하게 되고, 미술비평가 루이 보셀은 이들을 ‘야수파’라 부른다.

 

근대성과 뒤섞인 시인의 삶

 

1905년은 생라자르 구역의 한 선술집에서 아폴리네르가 파블로 피카소를 만난 해이기도 하다. 피카소의 작업실 바토-라부아르에서 아폴리네르는 푸른빛에 잠긴 걸인들, 분홍빛 속옷을 입은 가늘고 섬세한 몸매의 어릿광대, 이집트의 반신(半神)을 닮은 잡종 동물들을 발견한다. 경탄을 금치 못한 그는 <라 플륌>지에 이 탁월한 화가의 ‘거대한 불꽃’을 축하하는 서정적인 기사를 게재한다. 그것이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의 시작이었다. 때로는 실망하고 오해하며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많은 유화, 데생, 시와 산문 등을 통해서 그들이 서로에게서 영감을 얻고 교환했음을 알 수 있다. 아폴리네르는 “돌연히 비치는 한줄기 빛 속에서 두 존재가 창조되었고 즉시 결합했다”고 전설과도 같은 그의 자서전 <살해당한 시인>(1916)에서 털어놓고 있다.


그때부터 아폴리네르의 삶은 근대예술의 미래와 합류한다. 자신의 취향과 직감에 따라 그는 창조적 흥분 속에 일과 우정을 엮어 나간다. 1907년은 풍성한 해였다. 앙리 마티스, 조르주 브라크, 로베르 들로네를 만난다. 마리 로랑생과의 사랑, 그 창의적이면서 질투에 사로잡힌 열정이 그림과 시의 결합을 지배했다. 두아니에 루소로 알려진 앙리 루소는 1908~1909년에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 커플의 관계를 완전히 파악하고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라는 제목의 초상화 두 편에 그들을 담아냈다. 아폴리네르와 그의 친구들(앙드레 살몽, 막스 자콥)이 루소를 찾아내고 환대하고 전시해주지 않았다면 그는 후세에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루소를 말 그대로 진정한 화가로 인정했고, 그의 독특한 화풍이 수세기 전부터 행동과 시각을 속박해오던 규칙과 관습을 내던져버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미술은 죽고, 조형예술은 살아남는다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예술도 마찬가지 해방의 미덕을 가지고 있었다. 이국적이거나 민족적 가치뿐만 아니라 조형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그 예술은 데포르마시옹의 힘을 전수한다. 1907년에 피카소는 훗날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작품에 몰두하면서 가면과 페티시를 집중적으로 탐색했고, 그것들이 가진 주술적이면서 조형적인 힘을 이해했다. 드랭은 프리미티비즘(원시주의)의 신선함과 에너지를 목판화에 담아냈고 아폴리네르의 첫 작품집 <썩어가는 마법사>(1909)의 삽화로 사용했다. 이 시적 산문은 신의 아들인 멀린이 어떻게 호수의 부인에 의해 무덤 속에 갇혔다가 죽지 않고 부패되는지를 말하는데, 그의 영혼이 불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멀린은 요정 모르간에게 “마법사들의 시대가 다시 올 것”이라고 말한다. 대형 종이 위에 그려진, “순수한 예술적 경이”(1)라 할 초판본을 펼치는 순간 그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미로처럼 행렬을 지어 서있는 울창한 숲, 신기한 피조물들로 가득 찬 숲이 소리를 내고 말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림자에서도 광휘가 발산된다.


드랭과 마찬가지로 라울 뒤피는 아폴리네르의 ‘동물시집 또는 오르페우스의 행렬’(1911)의 도판을 목판화로 만들었는데, 그 상상력의 원천은 중세였다. 그러나 그는 아동서적이나 장식예술, 대중적 이미지를 활용해 16세기 시 형식과 채색삽화를 쇄신했다. 달콤하면서도 신랄한 어조로 프리즘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는 것 같은 아폴리네르의 자화상이기도 한 이 시집은, 오르페우스가 신성한 시의 도래를 예고하는 시학이기도 하다. 마법의 힘을 가진 오르페우스는 야생동물에 마법을 걸고, 돌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모든 학문과 예술을 발명해낸다. 후견자 같은 그의 모습은 철학자, 사제이자 왕, 연금술의 창시자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토스(세 배로 위대한 자라는 뜻, 이집트 신 도트와 동일시되는 헤르메스를 가리킴)로 변한다. 그리고 아폴리네르는 그에게서 영감을 얻어 회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선은 빛의 목소리다. 그리고 빛이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면 모든 것에 색이 입혀진다. 회화는 본질적으로 빛의 언어다.”(2)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의 작업실에서 예술가들은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시각을 변화시키고 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경험에 몰두했다. 1910년경, 브라크와 함께 피카소는 단절과 대조, 기하학적 구성을 연구하고, 보셀은 곧 이것을 ‘큐비즘’이라 명명한다. 자연의 모방과 망막의 인식을 파괴하고 구상을 중시하는 이 예술은 근원적으로 새로운 예술이었다. 아폴리네르는 1911년에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을 천명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창작은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발명된 선적 원근법을 넘어서 진정한 르네상스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후 작품은 고유한 법칙을 가진 하나의 세계가 된다. 미술은 죽고 조형예술은 살아남는다.


1910년부터 아폴리네르는 일간지 <랭트랭지장>의 예술란을 담당한다. 또한 1912년 창간한 그의 잡지 <파리의 야회>에도 기고한다. <파리의 야회>는 피카소의 아상블라주 작품, 프란시스 피카비아의 유화, 마리우스 드 자야의 캐리커처 등 동시대 작품들이 재수록되는 모더니티의 매체였다. 1914년 2월, 갓 18세가 된 앙드레 브르통이 예술에 입문하게 된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드랭의 <기사 X> 역시 이 잡지에서 발견한 것이다. 1913년, 567부밖에 출간되지 않았지만 20세기 시의 스승이 될 시집 <알코올>이 출간된다. 이 해에 아폴리네르는 이미 출간된 여러 논문들을 모아 <미학 성찰>을 펴낸다. ‘입체파 회화’라는 부제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입체파 예찬이 아니라 새로운 회화를 옹호하고 그 사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중요한, 프로메테우스적 작품이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빛을 사랑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예술을 사랑한다. 모든 인간은 무엇보다도 빛을 사랑한다. 그리고 불을 발명했다.”(3)


아폴리네르는 이 빛을 들로네의 그림, 특히 ‘창문’ 시리즈에서 재발견한다(<칼리그람>, 1918). 그 장관은 마치 언어의 만화경과도 같은 동명의 시 <창문>을 탄생시켰다. “빨강에서 초록으로 노랑이 온통 꺼져간다.” 마티스의 그림에서도 “황홀한 빛의 과일 오렌지”를 닮은 빛을 발견하고, ‘진주’를 연상시키는 피카소의 그림에서도 발견한다. “내면의 빛”이 “어둠의 신비로운 심연”에 누워있기 때문이다.(4) 입체파가 슬픈 그림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입체파 그림에서 환희를 느끼려면 레제르의 열정적인 색채를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라베스크의 악마’ 마리 로랑생의 뱀을 연상시키는 구불구불함의 우아함에 매혹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어느 누가 집단적 오류라고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아폴리네르는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활용해 자신의 확신을 옹호한다. 대단히 강력한 언론은 당대의 예술 관심사를 근접취재하면서 폭넓은 예술비평 독자층을 형성해냈다. 그때 영화는 아직 초보단계에 있었고, 사진은 특히 현실을 재현하는 데 편리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반면 미술은 사회문화생활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년 내내 대규모 행사가 열렸고 많은 관중이 모여들었다. 클래식 아카데믹 작품들은 국립 살롱전과 프랑스예술가 살롱에서 전시되고 수상작도 정해졌다. 근대미술은 폴 시냑이 창설한 앙데팡당 전에 심사위원도, 수상작도 없이 전시되거나 살롱 도톤(가을 살롱 전)에 전시됐다. 아방가르드 예술애호가들은 센 강 우안의 갤러리들을 방문해 다니엘-헨리 칸바일러 화랑이나 폴 기욤 화랑에서 작품을 구입했다.


호기심 가득하고 부지런하며 통찰력 있는 아폴리네르는 어디든지 다녔다. 이정표와 사거리의 신 헤르메스처럼 그는 활기차게, 그리고 기발한 톱니바퀴처럼 효율적으로 예술의 방향을 지시했다. 수천 개에 이르는 전시작품 가운데서 그는 진정한 독창성을 간파해낼 줄 알았다. 1912년 앙데팡당 전에서 아폴리네르는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던 마크 샤갈의 ‘램프와 두 인물’을 주목했다. 그해 아폴리네르는 청년 뒤샹에 대해 글을 쓴 최초의 사람이었다. 뒤샹은 입체파의 압력 때문에 그의 작품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섹시옹 도르 전시에서 철수했다. 뒤샹은 “과연 ‘예술’이 아닌 작품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그 해답을 찾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뒤샹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등걸이 없는 작은 의자 위에 거꾸로 올려놓은 자전거 바퀴의 키네틱 아트에 열중했다. 비행기와 기계의 시대에 예술은 행위와 제스처가 된다. 한편 아폴리네르는 새로운 개념의 시를 시도하면서 잠시 독자들의 경탄에서 멀어진다.


놀랍고도 비조화적인 <월요일 크리스틴 거리>는 말하자면 ‘시’ 없는 시다. 아폴리네르는 또 그의 최초의 칼리그람도 창작한다. 칼리그람이 구가하는 새로운 시적 형태는 완전한 시청각기호처럼 기능하는데 역동적이고 동시적인 공간구성은 타이포그래피의 표현성을 탐구한다. 이 ‘그림 수수께끼’ 앞에서 회의론자들은 이것 또한 시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시를 읽고 이해하는 일이 어려워지게 된다.


대담한 시도에는 그 대가가 있다. 오늘날에는 가족끼리 일요일 미술관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해진 입체파 작품들은 동시대인들을 당황하게 했고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12년 10월 사회당의 마르셀 상바 의원은 입체파를 ‘쓰레기’라 규정지은 민족예술 지지자들에 맞서기 위해, 그리고 ‘후세의 반향’이란 이름으로 ‘예술에서의 시도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국회 연단에 오른다. 예술계에서는 새로운 소수의 경향이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아방가르드 내에서조차 경쟁심이 생겨나고, 지성들을 자극하며 흥분시킨다. 1914년 3월 14일, 아폴리네르가 들로네를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의심하자 이에 상처받은 들로네는 아폴리네르에게 주저 없이 그의 반박문을 보낸다. 결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이후 절대 화해하지 못한다.

 

  
 

논쟁의 중심에서 위태로웠던 아폴리네르

 

논쟁 중에 아폴리네르는 위험에 직면하고 그것을 감수한다. 그는 자신을 편파적이라고 비난하는 <랭트랭지장> 독자들의 항의를 무시한다. 하지만 1914년, 아폴리네르와 들로네가 절교하자 <랭트랭지장> 편집부는 압력에 굴복하고 앙데팡당 전에 전시된 알렉산더 아르키펜코의 모노크롬 조각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아폴리네르를 해고한다. 정말 다행스럽게 아폴리네르는 몇 주 후에 <파리-주르날>의 논단 하나를 맡는다. 그는 상식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고, 모든 경험은 오류를 범하거나 위험에 부딪힐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화가와 시인들은 나쁜 취향을 가질 권리까지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조르조 데 키리코는 “서투르지만 대단한 재능을 가진”(5) 예술가이며, 그가 그린 형이상학적 풍경은 “대단히 날카로우면서 대단히 근대적인 느낌”(6)을 발산한다. 그의 그림 ‘사랑의 노래’에는 분홍색 고무로 된 장갑이 등장하며 “감동적이면서 끔찍한”(7) 작품들을 예고하고 있다. 기발하면서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그 징조는 예술 경계의 해체를 예고한다. 피카비아의 ‘그려진 시’와 러시아의 미하일 라리오노프와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레이오니즘(광선주의)’ 작품들이 잘 보여주듯이,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시와 음악도 보편적 예술에 합류한다. 마찬가지로 피에르 수베스트르와 마르셀 알랭의 연재소설 <팡토마>가 그 전복적인 에너지로 우아한 취향과 도덕을 전복시킨 것처럼 대중 예술과 잡다한 영감들, 그리고 이질적인 재료가 조형 예술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서커스, 뮤직홀, 인형극, 포스터들은 단정한 것을 진부한 것으로 몰아붙인다. 이제 예술가들은 뭐든 상관없이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판지, 철사, 천, 우표, 신문…. 그리고 시인은 예언한다. 모노크롬의 부동성을 벗어나 소리를 내고 영롱하게 빛나는 입상들이 곧 생명을 갖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아폴리네르는 아방가르드의 투사, ‘타불라 라사’(백지상태)를 옹호하는 투사가 아니다. 조화를 추구하는 성향을 가진 아폴리네르는 독자성을 열망하며 시스템에, 질서의 단어에 저항하지만 그 어느 것도 무(無)에서 싹을 틔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끊임없는 쇄신을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전통과 새로운 발명 사이에 균형을 이루어주는 원동력이고, 놀라움은 “새로운 것의 위대한 힘”(8)이다. 그가 주위의 압력에 못 이겨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언제나 정확하고 연합할 수 있는 이름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오르피즘, 초자연주의, 초현실주의 등, 그가 사용하는 어휘는 유연한 경험과 자기 자신의 연구에 따라 변화해간다. 그는 이론보다는 감각과 결합에 더 관심을 두는, 유연하면서 진화하는 시적 사유를 펼쳐 보인다. 기회주의나 도발, 기만으로 기꺼이 짜릿함을 첨가하는, 엉뚱하고 유동적인 사유, 어쩌면 포착할 수 없는 이 사유는 20세기 내내 그에게 무능력, 절충주의, 지적 공허 등의 비난을 끈질기게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대단한 지지자들이 생길 것이다. 피카소는 그의 육감을 찬양하고, 뒤샹은 형식주의에 대한 그의 무관심을 치하한다. 브르통은, 아폴리네르가 “보들레르 이후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정신의 측량기구”(9)를 제공해 화가들의 방식을 이해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아폴리네르의 시어의 마법, 들로네의 회전 프로펠러의 마법…. 그림은 너무나도 경이로워 세계대전의 서막을 알리는 반목을 거의 잊게 할 것이다. 뮌헨, 베를린, 모스크바, 런던, 피렌체, 밀라노 등, 스타일에 영향을 미치는 축들은 차례차례 하나씩 죽어간다. 대단히 매혹적인 파리와 더불어 프랑스는 국제무대에서 제일의 역할을 하려 든다. 1913년 뉴욕 아모리쇼에 전시되면서 모든 출신의 화가들(그 선두에는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가 있었다)을 모아놓은 파리 회화는 말 그대로 “프랑스 회화”로 명명된다. 아방가르드의 공격성은 국가 간의 신랄한 경쟁으로 배가된다. 1912년 2월 파리에서 최초의 이탈리아 미래파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탈리아 화가 움베르토 보초니는 아폴리네르에게 “우리는 두 달 내에 포격태세를 취할 전투장이 될 베른하임 갤러리에서의 전시를 열정적으로 준비하고 있다”(10)고 미리 예고했다.

 

다다운동의 유혹을 피해간 아폴리네르의 예술관

 

1914년 겨울이 되자 예술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전쟁 속에 자리 잡는다. 군사적 정치적 합의에 따라 미학적 연합도 재배치됐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인들을 몰아내려 들지 않고, 그들과 힘을 합쳐 독일을 이기려 든다. 1916년 엔에서 머리에 부상을 입은 아폴리네르는 용케 다다운동의 유혹을 피해간다. 아폴리네르가 보기에 다다의 기성질서 비판의 차원과 국제적 차원은 자원병이 된 아폴리네르의 입장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 그는 예술권력과 상상력의 불가침권이란 이름으로 R. Mutt의 ‘샘’, 달리 말하면 뒤샹의 레디메이드 소변기를 전시하기 거부한 뉴욕 앙데팡당을 비난한다. 내부의 예술 전선도 형성된다. 현대회화를 ‘독일(놈) 예술’로 부르는 현대회화의 적들, 그리고 칼리그람을 ‘속임수’로 깎아내리는 샤를 모라스에게 아폴리네르는 프랑스적 자질인 과감함이 규율과 결합해 혼돈을 정리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타성, 노화, 낡아빠진 생각 또한 적군”(11)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던 아폴리네르는 그 시대의 암흑 속에 새로운 별을 밝혔다. 지칠 줄 모르는 탐구자였던 아폴리네르는 자신의 채색 그림 칼리그람을 더 풍부하게 하고, 시 ‘내일의 시계’를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피카비아의 잡지 <391>에 실었다. 그는 전쟁의 노력을 지지하면서도, 인종과 국가를 초월하는 시를 꿈꾸었던 것이다. 1915년 11월 샹파뉴 전선에서 아폴리네르는 전시대모(일선장병에게 위문품이나 편지를 보내는 여자)에게 “내가 원하는 것은, 미국의 흑인 권투선수, 중국의 황후, 독일의 기자, 스페인의 화가, 우월한 혈통의 프랑스 젊은 여성, 이탈리아의 젊은 여자농부, 그리고 인도의 영국인 장교가 내 시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이틀 전인 1918년 11월 9일, 스페인 독감에 걸려 아폴리네르는 자신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일찍 눈을 감았다.


그의 추종자들이자 훗날 초현실주의자가 될 브르통, 루이 아라공, 필립 수포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 불꽃을 나누려 노력한다. 전쟁의 참화에 반항하며 그들은 그들 선배의 애국주의적 순응주의는 거부하지만, 아폴리네르의 시는 숭배의 대상으로 만든다. 아라공은 독특한 추도사를 쓰고 잡지 <SCI>(1919년 1-2월 호)에 게재된다. “아폴리네르를 둘러싼 전설이 만들어졌다. 그 전설에서 나는 오직, 한 개인의 시체는 영원히 소멸되고 매혹적인 마법사 아폴리네르가 떡갈나무 빈 구멍에 남아있을 수 있도록, 그가 자신의 발자국 아래 뿌려놓았던 아름다움에만 관심을 가진 전기 작가를 기억할 것이다.”

 

몽상과 형식주의 사이에서 현대예술의 여정 이끌어

 

100년 후 아폴리네르와 현대예술의 형성은 계속 우리를 매혹시키고 있다. ‘벨 에포크’(20세기 초)가 영원히 매혹적인 것은 단지 그것이 세기의 대재앙, 파괴와 트라우마와 함께 예술과 언어에 무(無)와 의혹의 각인을 남긴 대재앙에 앞선 시기이기 때문은 아니다. 벨 에포크가 매혹적인 것은 이 황금시대가 우리의 유래를 말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웅적인 시대의 증인들이 그들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아방가르드가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1950년대에 이르러 사후 복원된 아폴리네르는 우리 시대에 의미를 부여한다. 몽상과 형식주의 사이에서 현대 예술의 여정은 아폴리네르로부터 탄생했다. 후세의 선택과 가치(단절, 운동, 자유)는 그로부터 빛을 발한다. 노스탤지어는 전설을 만든다. 그리고 그 전설은 논쟁을 명확하게 하고, 정열을 정화하며, 우리들 꿈으로 천을 짠다. 현실을 변형시키며 그 전설들은 진실을 말한다. 우리는 뒤돌아보며 영영 잃어버린 세계의 영원한 젊음을 찾는다. 그러나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상상과 작품들이다.


아폴리네르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새로운 아름다운 것들”(12)을 엿보며 그것들의 현현(顯現)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이를 찾는 과정이다. 대규모 미디어 생산을 통해 우리를 만족시켜주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헐값의 기적들이 아니라, 때로는 동화 같고 때로는 음울하지만 언제나 매혹적인, 일상에 놀라움을 도입하고 세계의 질서에 모험을 가져오는 신비한 현상이다.

 


글·로랑스 캉파 Laurence Campa/ 파리10대학 불어불문학 교수

<기욤 아폴리네르>(갈리마르, 파리, 2013)의 저자

 

번역·김계영

 

(1) 아폴리네르 스스로 작성한 예약증에서 발췌한 문구

(2) <동물 시집 또는 오르페우스의 행렬>을 위한 아폴리네르의 노트, 드플랑슈, 파리, 1911년

(3) <미학 성찰>에 수록된 “회화론”의 결론, 피기에르, 파리, 1913년

(4) 아폴리네르, 폴 기욤 갤러리의 ‘마티스-피카소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 1918년 1월 23일~2월 15일

(5) 아폴리네르, 가을 살롱전 서평, <랭트랑지장(L’intransigeant)>, 파리, 1913년 11월 16일

(6) 아폴리네르, 가을 살롱전 서평, <파리의 야회(Les Soirées de Paris)>, 1915년 11-12월 호

(7) 아폴리네르, ‘분홍 장갑’, <파리-주르날>, 1914년 7월 4일

(8) 아폴리네르, 컨퍼런스 “에스프리 누보와 시인들”, 1917년 11월 26일

(9)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의 모험> 중 앙드레 파리노와의 라디오 인터뷰(1952년)

(10) 움베르토 보초니가 아폴리네르에게 보낸 서신, 1911년 12월 1일

(11) 아폴리네르, ‘전쟁과 우리 타인들’, <남북>, 파리, 1917년 10월

(12) 아폴리네르, ‘승리’, <칼리그람>, 1918년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