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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1987" 그리고 30년

by 내오랜꿈 2018.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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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남해 여행을 다녀왔다. 보리암, 금산, 편백자연휴양림, 예술촌 등등 그리고 상주해수욕장. 꼽아보니 삼십몇 년이 지나 있었다, 처음 상주해수욕장 갔던 때가. 그것도 한참을 머리 굴려 흐릿한 기억 조각들을 이리저리 꿰매어 복원했다. 그때가 1984년이었는지 1985년이었는지를. 삼십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상주해수욕장. 당연히 내 기억 속의 상주해수욕장과는 여러모로 달라져 있었다. 하긴 뭐, 너무나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30년임에랴.


내게 30여 년을 한꺼번에 뭉뚱거려 헤아리거나 기억해야 하는 날은 꿈속에서나 마주칠 것 같은 아득한 시간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학교와 집을 오가던 고3 시절, 1983년.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조용했고, TV는 온통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 삼십몇 년 만에 마주한 이산가족들이 부둥켜안고 흘리는 눈물은 세상 그 어떤 사건 사고도 한낱 부질없는 미풍에 불과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1.4후퇴, 흥남부두, 30여 년 같은 단어들이 내뿜는 아우라에 더해진 생방송 카메라에 잡힌 눈물. 내게 30여 년이라는 시간은 이처럼 강렬한 '포스'가 각인된 시간이다. 그런 시간을 뛰어넘어 마주친 상주해수욕장. 많이 변해버린 모래사장을 응시하며 한참을 서 있었다. 내겐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삼십몇 년이란 시간이 별거 아닌 나이가 되었다는 아픔 아닌 아픔을 곱씹으면서.


오늘, <1987>을 보았다. 뭐, 더하고 말 것 없는 딱 그대로의 '1987'이다. 스크린에 시간이 표시되는 그 날짜마다 내가 무얼하고 있었던지를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생함으로 살아나는 시간들. 영화관을 나서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같은 30여 년이라도 이리저리 꿰맞추어야 복원되는 기억도 있고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도 있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어디서 오는 차이일까? 


내게 '1987'은 늘 진행형이다. 내가 바꾸고 싶어했던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거의 없다. 


적어도 우리가, 1987년에 바꾸고자 했던 게 바뀐 것이 없기에 여전히 바꾸고 싶어하는 우리가, 당신들에게 욕 들어먹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왜 우리가 좀 더 평등하고 좀 더 인간답고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고 당신들 같은, 보수정당 지지자한테 욕들어야 하는가? 쓰레기 언론들이, 쓰레기 정치인들이 당신들이 지지하는 정권을 좌파정권, 진보정권이라고 부르니까 당신들이 마치 진보주의자라도 된 것 같은가?


아마도 내가 투자했던 시간들에 비례


옆지기는 두어 번 눈물 흘리는 거 같더라.

낟 두어 번.


내가 흘린 눈물은 아마도 억울해서였을 거다. 박종철의 죽음과 이한열의 죽음과 또다른 수많은 죽음들이 이루어낸 성과는 "할 말은 하는 신문"이라는 캐피프레이즈를 내건 조선일보가 일등신문으로 군림하는 세상이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대들이 원했던세상이 이런 세상이었던가? 아무리 군사정권 시대, 머리에 총칼을 들이민 시대였다 한들 전두환을 민족의 태양으로 포장했던 신문이 할 수 있는 캐치프레이즈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이런 시대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뿐이다. 문재인 정부도, 노무현 정부도, 김대중 정부도 


우리가 이걸 내려놓는 순간 모든 희망은 사라진다. 


이한열의 애인?, 연인?, 연희? 그 친구가 말했었나?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달라지지 않아도 외쳐야 하는 건 있는 법이다. 그 외침이 1987을 만들었고, 그대들이 우상화하는 촛불혁명을 만들었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외침을 멈춘다면 모든 게 멈추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들이 우리를 욕할 자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더러운 주둥아리 좀 닥쳐주셨으면 한다.


차라리 희미한 30여 년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언제부터인가 이놈의 나라에서는 유럽 우파정권보다 보수, 우익 색채가 훨씬 더 노골적인 강령을 내건 보수야당이 집권함에도 진보정권, 좌파정권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중들은 보수야당을 지지하는 게 마치 역사의 진보를 지지하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누가 김일성 만세를 외친다고 꼭 국가보안법으로 잡아 넣아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진보를 이야기하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합하는 시스템을 유지하지 못해 안달이다. 학문적 연구를 법의 잣대를 들리밀며 처벌을 못해 안달을 한다.



1987년의 절반만 보여준 ‘1987’

[리뷰] 1987년을 바라보는 기존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화 ‘1987’…이제 ‘6월항쟁’과 현행 헌법 한계 주목해야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8년 01월 01일 월요일

       


영화 ‘1987’은 1987년의 절반만 보여준다. 1987년을 1월부터 6월로 제한하면서 ‘6월항쟁’의 그늘을 가리고 밝은 면만 부각한다. ‘1987’의 많은 장점과 의미를 담은 영화평이 개봉 전부터 쏟아졌다. 동의할 수 있는 다수의견이다.


물론 1987년 1월 박종철에서 시작해서 6월 이한열로 마무리되는 ‘6월항쟁’이나 그 과정에서의 희생이 헛되다는 뜻은 아니다. ‘6월항쟁’으로 얻어 낸 대통령직선제는 당시로선 의미 있는 진보였다. 권력구조를 바꿔 낸 혁명적 운동이다. 반세기 대한민국 도약의 두 축을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라 한다면 ‘6월항쟁’의 기억은 전자가 후자를 압도한 경험이다. 영화에선 박처장(김윤석 분)으로 대표되는 ‘악’을 최검사(하정우 분), 윤기자(이희준 분), 한병용 교도관(유해진 분) 등이 맞서는 구도로 표현된다.


30년이 흘렀지만 6월항쟁과 그로 얻은 현행 헌법에 대한 재평가는 부족하다. 여전히 ‘추억할만한 소재’ 정도로만 남아있다. 철저한 고증으로 당시를 재현한 영화 ‘1987’은 역설적으로 87년을 바라보는 기존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7’이 그린 시기는 386(80년대 학번, 60년대 생)으로 불리며 한국사회 전면에 등장한 서울 중심·대학생 운동권·중산층 넥타이부대 등으로 대변되는 이들의 시간이다. 87년을 6개월의 투쟁으로 가둘 때 가장 빛을 보는 이들은 누군가? 현재를 지배하는 이들과 얼마나 다른가? 영화는 원래 12월로 예정된 대선을 고려해 개봉날짜를 정하려 했다. 정치를 담은 영화는 정치적으로 해석된다. 역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이 영화는 많은 평론가에게 ‘주인공이 딱히 없는 게 장점’이라고 평가받는다. 다수가 각자의 위치에서 싸웠고 그 노력들이 모여 직선제를 쟁취한 게 주인공 없는 이 영화와 닮았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비중 있는 인물 중 검사·기자·대학생 등 당시 기득권이 아닌 사람은 없다. 몇몇 엘리트들이 직선제를 쟁취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는 이 영화에서도 나타난다. ‘운동권 세대’는 강동원(이한열 역할)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특히 강동원의 등장과 죽음 장면을 보면 민주화 세력의 나르시시즘이 이 영화의 중요한 정서라는 걸 읽을 수 있다.


87년 6월의 배경


6월항쟁을 전후로 좀 더 확대하면 배경과 한계가 보인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불만을 가시적으로 확인한 건 1985년 2월12일 제12대 총선이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는 민주한국당이라는 어용야당을 만들고 ‘북한의 조선노동당에 맞서려면 여야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명목으로 ‘우당(友黨)’이라 불렀다. 하지만 군사독재의 폭압 속에 2월 총선에서 ‘우당’이 몰락하고, 선명야당인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우뚝 섰다. 여당인 민정당보다 야당들의 득표수가 더 많았다.


80년 광주 이후 첫 해방공간이라고 평가받는 1986년 인천5·3민주항쟁을 87년 6·10항쟁의 시작점으로 보기도 한다. 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의 열망은 86년 3월 서울에서 시작해 전국을 돌던 신민당 개헌현판식에서 터졌다. 5월3일 인천대회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를 앞두고 4월30일 여야영수회담을 진행해 전두환은 ‘개헌을 허용하겠다’고,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과격 운동 세력과 손을 떼겠다’고 약속했다. 제도권 야당의 운동세력을 향한 속내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건이다.


당시 5·3의 요구는 군부 퇴진을 넘어섰다. ‘민주화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왜 근본적 사회 변혁이 필요한가’, ‘내 일터가 얼마나 처참한가’ 등은 현재에도 유효한 질문들이다. 5·3 이후 군부정권의 탄압은 거세졌다. 6월항쟁을 기억하는 이들 중에는 5·3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도 많다. 5.3에서 나온 질문도 소멸했다.


같은해 6월6일, 부천경찰서 문귀동 형사는 5·3 관련자의 행방을 물으며 서울대학생 권인숙(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을 성고문했다. 권인숙은 이 사실을 폭로했고, 경찰은 이를 은폐했다. 당시 안기부를 배후에 둔 경찰 위세에 밀린 검찰은 가해자를 불기소처분하며 처벌하지 않았다. 여성인권 담론 역시 87년 6월항쟁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성고문 사건 뿐 아니라 5공 내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검찰로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을 제압할 기회이기도 했다.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가 1986년 9월 ‘말’지에 부당한 권력이 내린 ‘보도지침’을 폭로한 것도 언론통제 분위기에 흠집을 낸 일이다. 87년 1월15일자 중앙일보의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특종 보도와 이어지는 동아일보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관련 보도들은 ‘보도지침 폭로’와 무관하지 않다.


87년 4월13일 전두환은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당시 헌법을 지키겠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여전히 사회는 엄혹했고, 전두환 일당은 자신들의 힘을 신뢰한 것이다. 같은해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고문에 가담한 경찰이 3명 더 있다’는 경찰의 은폐·조작 사실을 밝히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86아시안게임의 성공적 개최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쏠리는 국제사회의 관심은 정부의 폭력성을 일정 부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 유시민 작가는 ‘알쓸신잡2’에서 우스갯소리로 “올림픽을 앞두고 서머타임(표준시를 1시간 앞당기는 제도) 덕에 퇴근하고 데모할 시간이 많았다”고 말했다. 6월항쟁의 토대는 영화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두텁다.


반쪽짜리 승리, 남은 과제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는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 결과적으로 반쪽짜리 승리다. 해방공간은 6월로 끝났다. 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역사에서 배제됐다. 8·9월 두 달간 발생한 노동쟁의는 3200여건, 하루 평균 44건을 기록했다. 86년 5·3 인천에서 노동자들이 외쳤던 요구와 비슷했다.


진실을 파헤친 영웅으로 1987이 기록한 언론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기회주의적으로나마 반독재를 외치던 언론은 다시 보신주의로 돌아왔다.


1987년 7월30일자 동아일보의 한 기사 제목은 “노사분규급증…생산활동 위축”이었다. 당시 대다수 기사가 비슷한 톤을 보였다.


해당 기사에는 ‘“너무 많은 요구 큰부담” 기업주’와 ‘일부선 민주화 역기능 우려 여론도’라는 소제목이 달렸다.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식상한 것들이다. 이날 동아일보는 “대다수 분규는 △임금인상 △체불임금지급 △근로조건개선 등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어용노조퇴진 △노조결성방해중단 등을 요구하는 조직분규 성격의 분쟁도 10여건에 이른다”고 전했다.


야당 역시 노동자대투쟁에 비판적이었다.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긴 커녕 오히려 노동자들의 자제를 촉구했다. 중산층 역시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서 거리를 뒀다. 그들이 6월항쟁에서 얻은 성과가 훼손될까 우려해 거리를 두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노동자의 요구가 묵살되고 노조에 대한 혐오분위기는 한 세대가 흘렀지만 지속되고 있다. 2018년 새해에도 여전히 하늘에 올라 노동권을 외치는 노동자들이 있다.


6월항쟁은 직선제 쟁취라는 성과가 있었으니 그렇지 못한 과거들이 다소 배제될 수 있다는 관점은 비민주적이다. 사건으로만 보면 3·1운동도, 5·18도, 전태일의 분신도 당장 혁명적인 성과를 내진 못했다.


영화 마지막에도 등장하는 장면. 87년 7월9일 고 이한열 열사 추모식에서 문익환 목사의 연설은 “전태일 열사여”로 시작해서 “이한열 열사여”로 끝난다. 평범하지만 주인으로 살고자 외치며 목숨을 잃은 이들에겐 우열이 없다. 노동자, 여성, 대학생의 구분이 없고 투쟁의 종류나 방법의 차별도 없다.



1987년 헌법은 한계에 다다랐다. 가혹하게 평가하면 직선제를 제외하면 후퇴한 측면도 있다. 전두환·노태우 측과 김대중 측, 김영삼 측 여야 대표 8인이 모여 새 헌법안에 대해 협상을 진행했다. 국민의 직접적인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6·29는 속이구’라는 말도 나돌았다. 6·29 선언에는 김대중 사면복권이 포함됐다.


당시 민정당 여론조사 담당 김종인씨는 지난해 7월 SBS와 인터뷰에서 “노태우 당 대표에게 ‘직선제 해도 대통령이 될 테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라는 얘기를 내가 많이 했죠. 내가 그때 여론조사를 담당하고 있을 때인데 1노3김 대입해도 노태우 씨가 38% 안에서 당선이 되게 돼있어요”라고 말했다. 군부의 선거 전략에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이 당했다.


대통령 임기가 가장 중요한 논점이었다. 4년 중임제나 7년 단임제 등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다음 대통령 할 사람이 많이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5년 단임으로 합의를 봤고, 전두환은 5년 단임 직선제 개헌을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찬했다.


유신헌법의 조항들이 부활했다. 군인·공무원 등이 국가에 배상청구를 금지하게 한 국가배상법이 3공화국에서 위헌 결정이 났는데 이 조항이 유신헌법에 헌법으로 들어왔고, 87년 헌법에도 포함됐다. 군인 국가배상 금지법, 공무원노조 금지 등도 포함됐다. 국민은 6월항쟁의 결과물을 만져보지 못했다. 87년 12월16일 제13대 대선은 전두환의 예상대로 노태우가 당선됐다. 직격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은 죽었지만 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없었다. 1987년은 ‘1987’의 경험 이상으로 아픈 해였다.


시대가 달라졌다. 거악만 때리면 되는 시대는 갔다. 대통령이 바뀌면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만 대통령만 바뀐다고 서민들의 삶이 달라질 수는 없다.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산업화 세대를 예쁘게 그린 영화 ‘국제시장’의 이 명대사는 국제시장이 비판받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 1987년도 과거를 팔아 현재를 사는 이들의 손에서 해방시킬 때가 됐다.



원문보기: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0548#csidx209f5c865d256b0b4b0da2ef632f0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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