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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생각

우리말의 어려움(2) - 언어의 의미는 사용이다

by 내오랜꿈 2014.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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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의미는 사용이다 - 비트겐슈타인 


언젠가 MBC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서 '잔나비'에 얽힌 사연이 소개되었다. '잔나비'란 단어의 의미를 몰라서 생겼던 에피소드에 관한 것인데, 어떤 모임 자리에서 자신들의 띠를 이야기 하다가 누군가 '잔나비띠'라고 하는 걸 듣고 '그런 띠가 어디 있냐'고 했다가 무안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잔나비란 단어는 현실 생활에서 이미 발언권을 잃어가고 있는 말 중에 하나다. 나이 든 사람은 몰라도 젊은 세대들에게 잔나비라고 하면 '그게 무슨 나비 종류야?'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더 많은 현실이다. 실제 생활에서도 잔나비는 원숭이란 말에 밀려 '잔나비띠'라는 쓰임새 말고는 이미 사회적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단어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건 잔나비와 원숭이란 단어의 역사다. 잔나비란 단어를 대체하고 있는 원숭이라는 단어의 역사는 기껏 2~300년 정도다. 우리 문헌에서 원숭이라는 단어가 보이는 건 18세기에 들어와서라고 한다. 원성이(猿猩-)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고 이후 '원승이'를 거쳐 '원숭이'로 정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잔나비라는 단어 역시 3~400년 정도의 역사밖에 안 된다고 한다. 잔나비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 →나비'란 단어가 17세기에 들어와서야 문헌상에 나타난다고 하니 말이다. 이로써 미루어 짐작컨대 조선 중기 이후 언어의 역사에서 잔나비와 원숭이가 경쟁하다가 현대에 들어와 원숭이가 주도권을 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원숭이란 존재를 몰랐을까?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십이지(十二支)에 속하는 원숭이를 몰랐을 리는 없을 테고 문헌학적으로 그 이전에는 원숭이를 뜻하는 한자인 원(猿)의 새김인 '납'이 오랫동안 쓰여 왔으리라 보고 있다. 수천 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에게 원숭이를 뜻하는 일상 용어로 쓰였을 '납'이 15세기 이후 언어의 변천 과정에서 '잔나비'로 변하게 되고, 그 잔나비가 현대에 들어와서는 원숭이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이상의 잔나비와 원숭이의 언어사적 변천과정은 조항범, <그런 우리말은 없다>에서 정리한 것임)

이처럼 언어는 생성, 사멸하는 존재다. 언어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고, 그 의미가 변할 수도 있다. 따라서 언어의 의미를 영원불변의 그 무엇으로 고정시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뿐만 아니라 같은 언어라 할지라도 그 언어가 쓰이는 맥락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지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의 의미는 사용이다"는 명제를 질릴 정도의 명징한 논리적 엄격함으로 풀어낸다. 그의 생전에 유일하게 출간된 책 <논리-철학 논고>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로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다'는 표상주의적 언어관을 채용하여 플라톤 이래의 모든 철학적 문제는 언어의 잘못된 사용에서 기인하는 가짜 문제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극단적으로 이해하자면 언어만 바르게 사용한다면 철학적 문제란 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 문장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구절로 끝맺는다. 언어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다면 철학적 문제는 생길 수 없는 것이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면 침묵해야 하므로 이 역시 철학적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으로 인해) 더 이상의 철학은 없는 것이 된다. 정말이지 엄청난 자신감 아니면 오만함의 표현이었다 할 수 있다.

 

 

그랬던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직접적으로 <논리-철학 논고>의 오류를 거론하면서 자신의 명제를 뒤집는다. 언어의 기능이 세계를 표상하는 것 이외에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자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곧 언어로 표현된 의미는 그 자체로 대상을 표상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표상하도록 사람들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 저녁에 보자'는 문장은 그 자체로 완결적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누가 누구에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친구들끼리 사용되어 '오늘 저녁에 만나서 소주 한 잔 하자'는 의미도 되고, 부모와 자식 간에 사용되어 '오늘 저녁에 보면 너 죽을 줄 알아'라는 협박이 될 수도 있고, 연인들끼리 사용되어 '오늘 저녁에 만나 찐한 밤을 보내자'는 의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장이 아니라 단어도 마찬가지다. '시원하다'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뜨거운 해장국을 먹을 때도, 사우나에서 나올 때도, 음료수를 마실 때도 사용된다.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면 의미를 달리한다. '개새끼'란 단어가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차라리 '언제'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어떤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각 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알아야만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어떤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 위해선 그것의 의미를 '숙고'하지 말고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4월에 접어들어서도 우리는 활짝 핀 벚꽃을 '좇아' 저 멀리 섬진강가 구례, 하동 땅을 누비고 다녔다."

다시 예시된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이 문장의 경우 '활짝 핀 벚꽃을 좇아'라고 표현했을 떄 이 '좇아'는 '보기 위해', 또는 '따라'의 의미로 쓰였다는 건 확실하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쓰는 평범한 표현이 있는데 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좇아'를 써야 할까? "옛 추억을 더듬어 보니"로 쓰지 "옛 추억을 좇아 보니"로 쓰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시나 소설 등에서는 아직 쓰여지고 있는 표현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이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표현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좇다'는 그 사용 용례를 보면 모두 '의식이나 사고의 흐름', '시선의 이동' 등 정(靜)적인, 인간 내면의 흐름을 묘사내는 경우에 쓰이고 있는 것 같다. 

그 행위의 동적인 흐름, 물리적 이동을 나타내는 경우는 사용된 예가 거의 없을 뿐더러 지금은 이조차도 '따르다', '추구하다', '더듬다' 같은 동사 등으로 대체되어 사용되고 있다. 오히려 인간 행위의 동(動)적인 흐름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쫓다'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쫓아 가는' 식으로. 이런 논란이 있을 수 있기에 예시문에서의 '좇아'는 잘못된 사용이라는 게 내 생각이고 이는 다른 단어, 예컨대 '따라'나 '보기 위해' 등으로 바꿔 써야 옳지 않을까 싶다.

이걸 꼭 국어 시험마냥 이게 맞다 저게 맞다로 이해하려 드는 사람들에겐 쓸모없는 논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의 올바른 사용이 철학적 문제를 해소한다고까지 말한 사람도 있었다는 걸 상기한다면 한 번쯤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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