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월든> - 단순하고 간소한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by 내오랜꿈 2014. 9. 19.
728x90
반응형

 

 

 
 
 
 
 

내가 소로의 <월든>을 처음 접한 건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이다. 그 오래된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숙대앞 옥탑방에서 동두천과 방화동의 공장으로 출근하던 시절, 전철과 버스(그땐 서울에 지하철 5호선이 개통되기 전이었기에 방화동에 있던 공장은 영등포 역에서 버스로 갈아 타고 다녀야 했다) 안에서 긴 출·퇴근시간을 견디느라 가지고 다녔던 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환경, 생태, 자연 같은 것들보다는 평등, 진보, 투쟁 같은 것들에 더 관심이 많던 팔팔한 시기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읽고 난 뒤, '괜찮은 책이네' 정도의 인상밖에 남기지 못했던 책이었다.

 

그 뒤 7,8년이 지나고 어떤 이유에선가는 모르겠는데 다시 한 번 <월든>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아마도 다른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한기찬 번역본(소담출판사)을 출판사측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와중에 접하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마침 처음 읽었던 강승영 번역본이 내 손에서 없어진 터라 지금도 가지고 있는 이 번역본을 구입하게 된 것이리라. 이때는 헬레나 호지의 <오래된 미래> 같은 책이나 <녹색평론> 같은 계간지도 읽고 있던 때라 그 가치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시기에 접했던 두 번째 <월든>이다.

 

시간이 지나고 시골에 들어온 지 5년째다. 비록 조그마한 텃밭이지만 내 먹을 것 정도는 자급자족할 정도로 열심히 농사 짓고 있고, 천 평이 넘는 땅에서 온갖 작물들을 시험 삼아 재배해 보기도 했었다. 소로 정도는 아니겠지만 보이는 건 온통 벼가 익어가는 들판뿐인 곳에서 지내고 있으니 형식적으로 <월든>의 생활과 유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변했다. 아무리 한적하고 고요한 산속 생활이라 할지라도 현대의 삶은 소로의 월든 호숫가 식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환경이다. 물리적 장소가 문제 되는 시대가 아니기에 매일 인터넷을 통해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때문에 잊고 있던 <월든>과 세 번째 만나게 된다.

 

 
 
 
 
 

'밴드'라는 '끼리끼리' 어울림 공간에서 만나는 옛사람들 대부분에게 나의 삶은 일단 그들과 차별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과 농사, 환경, 생태, 이런 류의 얘기를 주고받다가 <월든>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들에게 <월든>이나 <오래된 미래> 같은 책을 소개해 주면서 나도 이번 기회에 새롭게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가장 최근에 새로이 번역되어 나온 전행선 번역본(더글래식, 2013)을 구입하여 읽기 시작한 것. 시기는 많이 다르지만 이왕에 가장 많이 알려진 세 가지 번역본을 다 읽어보는 셈이 되는 까닭에 각각의 번역본을 비교해 가면서 읽어보기로 했다. 마침 전행선 번역본은 덤으로 영문판을 함께 주는 까닭에 원문과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뭐, 요즘은 구글에서 찾으면 금방 나오긴 하지만...)

 

이렇게 해서 일주일 넘게 <월든>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2/3 정도 마무리한 지금, 어느 번역이나 원뜻을 해칠 정도의 오역 같은 건 없는 것 같다. 굳이 구분하자면 강승영 번역본은 의역 위주고 전행선, 한기찬 번역본은 직역 위주다. 강승영은 영어식 번역투 냄새가 나는 부분은 거의 다 의역한다. 지시대명사도 대부분 원래 대상을 적시한다. 반면에 전행선은 우리 말과 완전히 다른 어색한 문투가 아니라면 대체로 그냥 두는 편이다. 이런 차이도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지 확고불변한 차이는 아니다.

 

두 번역(강승영, 전행선)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는, "삶의 경제학"에 나오는 한 문단만 비교해 보고 넘어가자. 소로는 인간에게 옷이란 몸을 감싸는 껍질에 지나지 않는데, 새 옷으로 겉만 치장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냐는 의미로 다음처럼 말한다.

 

Our moulting season, like that of the fowls, must be a crisis in our lives. The loon retires to solitary ponds to spend it. Thus also the snake casts its slough, and the caterpillar its wormy coat, by an internal industry and expansion; for clothes are but our outmost cuticle and mortal coil. Otherwise we shall be found sailing under false colors, and be inevitably cashiered at last by our own opinion, as well as that of mankind.

(Henry David Thoreau, <Walden>, 더클래식(2013) p.26)

 

"우리의 털갈이 시기는 날짐승의 그것처럼 인생에 있어 하나의 위기일 때여야 한다. 되강오리는 조용한 호수를 찾아가서 털갈이 시기를 맞는다. 내부적인 활동과 팽창을 함으로써 뱀은 허물을 벗고, 애벌레는 고치를 벗는다. 의복은 사람이 맨 겉에 입는 표피와도 같은 것이다. 위에 이야기한 것처럼 옷을 다루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나라의 국기를 달고 항해하는 격이어서 인류 전체의 의견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견에 의해서도 마침내 쫓겨나고 말 것이다."

(소로, 강승영 옮김, <월든>,  이레(2002), p.39)

 

"날짐승이 털갈이 할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살아가며 위기의 국면을 맞이했을 때, 허물을 벗고 변신해야 한다. 아비는 털갈이 기간이면 한적한 호숫가를 찾아가 머문다. 마찬가지로 뱀도 내부활동과 확장을 통해 허물을 벗고 유충도 껍질을 벗어던진다. 인간에게 옷이란 일종의 표피이자, 몸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새 옷으로 겉만 치장해 봐야 다른 나라 국기를 달고 항해하는 선박이나 다를 바 없어, 언젠가는 인류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견에 따라 필연적으로 추방당할 수밖에 없다."

(소로, 전행선 옮김, <월든>, 더클래식(2013), p.32)

 

앞뒤 문맥을 따져야 할 거 같은, 좀 난해한 구절이다. 소로의 글은 그렇게 심한 비유나 상징 같은 건 없는 것 같은데도 막상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문장이 한 둘이 아니다. 이 문장 역시 마찬가지인데, 완전한 이해 여부를 떠나 원문만 가지고 해석했을 때 어느 번역본이 더 나은 것일까? 덧붙이자면 이 문장에서 만큼은 두 사람이 <월든>의 다른 문장 번역과는 스탠스를 달리한다. 강승영은 거의 직역이고 전행선은 앞뒤 문장의 뜻을 가져온 의역에 가깝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기에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 거 같다. 다만 나보고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강승영 번역본보다는 전행선(이나 한기찬) 번역본 선택하겠다. 일단 문장이 간결하고 매끄럽다. 굳이 의역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앞뒤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집어내는 접속어를 사용함으로써 논리적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 대형 서점에 나가 강승영 번역본과 전행선, 한기찬 번역본의 제1장 도입부만이라도 한 번 비교해 보면 두 종류 번역본의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월든>에서 제1장 "삶의 경제학"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왜 소로가 <월든>을 쓰게 되었는지, 그의 사상적 기반은 무엇인지가 드러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까지 평가하기도 한다. 맑스가 19세기 중반의 영국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면서 그 극복 대안으로 제시한 게 <자본>이라면, 19세기 중반의 미국 하층 계급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면서 그 극복 대안(?)으로 제시한 게 소로의 <월든>이라고. 비록 그 사상적 기반과 방법론은 전혀 판이하지만 말이다.

 

내용적인 면 외에서 따지자면 전행선 번역본을 선택하라고 말하고 싶다. 판본의 크기가 강승영 번역본이나 한기찬 번역본보다 폭은 1~2cm, 높이는 1.5~2cm 정도 작다. 이 의미는 배낭에 넣거나 손에 들고 다니면서 읽기 편하다는 뜻이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쳐박아 두기보다는 여행 갈 때나 출장 갈 때 가볍게 들고 다니면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좋은,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영문판이 덤으로 온다는 사실도 무시 못 하는 장점이다.

 

워낙에 유명한 책이라 더 이상의 언급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냥 한 번 읽어보고 각자 느끼는 대로 받아들여야 할 책이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에서 이렇게까지 유명한 책이 아니라 아는 사람들만 알음알음 읽고 있던 책이었는데, 법정 스님 때문에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기도 하다. 법정 스님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사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했다. 소로의 단순한 삶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자유로운 인간 본연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이 책을 읽고 모두가 법정 스님만큼 가까이 두고 읽을 정도로 좋은 책인지의 여부는 읽는 사람의 삶의 태도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모두가 두고두고 읽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

 

(아래는 소로가 월든 호숫가 주변에 들리는 '소리'를 묘사하는 장에 나오는 부분이다. 올빼미 소리 묘사 하나를 몇 페이지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 그 자체로 시와 같다고 평가되는 부분이다. 발췌는 전행선 번역본에서 인용한 것인데, 혹 어떤 번역본이든 가지고 있다면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아마도 이 번역본이 가장 최근에 나왔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이기에 비교하기 좋을 것 같아 이 책에서 인용한다.)

 

다른 새들이 조용해지면 부엉이가 그 노래를 이어받아, 곡을 하는 여인네처럼 '부엉부엉' 태곳적 울음을 울어 댄다. 그들의 음산한 울음은 실로 벤 존슨(Ben Jonson, 르네상스 시기 영국의 극작가-옮긴이)의 작품 속 대사가 떠오르게 한다. "요망한 한밤중의 마녀들 같으니!" 그들의 울음소리는 시인들이 정직하고 투박하게 부엉부엉 노래하는 소리가 아니라, 장난기를 싹 거두고 무덤 앞에서 가장 엄숙하게 부르는 소곡이며, 동반 자살한 두 연인이 지옥의 숲에서 숭고한 사랑의 고통과 기쁨을 돌이켜 보며 서로에게 건네는 위안이다. 그럼에도 나는 숲 언저리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통곡하고, 애절하게 응답하는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좋다. 마치 노래가 기꺼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음악의 어둡고 슬픈 일면이자 후회와 탄식의 감정이라도 된다는 듯이, 때로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새들의 음악과 노랫소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부엉이는 정령이다. 한때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밤마다 지상을 걸으며 어둠의 악행을 저지른 탓에, 이제는 그 죄의 현장에서 통곡의 노래와 비가(悲歌)를 부르며 속죄하는 추락한 영혼이자 의기소침하고 우울한 예감이다. 부엉이는 모든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는 대자연이 얼마나 다양하고 대단한 능력을 품고 있는지 우리가 새로이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부엉이 한 마리가 호수 이쪽 편에서 "아아아아아, 차라리 태어나지 말 것을!"이라고 탄식하며 부단한 절망의 몸짓으로 회색 떡갈나무 위에 만들어 놓은 새 둥지 위를 빙빙 돌아 날고 있다. 그러면 호수 건너편에 있는 또 한 마리의 부엉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지하게 "·····태어나지 말 것을!"이라고 응답한다. 그러자 또 "·····말 것을!"이라는 희미한 메아리가 멀리 링컨 숲에서 들려온다.

 

가끔은 부엉이도 내게 세레나네를 불러 준다. 가까이서 들으면 그 소리는 자연 속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우울한 소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치 자연이 부엉이의 울음소리를 죽어가는 인간의 신음 소리로 정형화시켜 자신의 합창단 속에서 영속하도록 만든 것 같다. 다시 말해, 모든 희망을 뒤로 한 채 죽음을 맞이한 어느 가여운 인간이 남긴 미약한 흔적으로, 그가 지옥의 어두운 골짜기에 들어서면서 짐승처럼 울부짖지만 여전히 인간의 흐느낌이 남아 있는 것과 같다. 그 흐느낌은 목구멍을 울리는 그르렁거리는 선율 때문에 더 끔찍하게 들린다.(내가 그 소리를 흉내 내려 하면, '글' 소리가 먼저 나온다.) 이 소리는 끈끈한 곰팡이가 피어오를 때까지 모든 건전하고 대담한 생각을 억눌러 온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또한 듣는 이의 머릿속에 시체를 뜯어 먹는 악귀와 백치와 미친 듯한 울부짖음이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지금은 먼 숲에서 부엉이 한 마리가 멀리서 듣기에 참으로 운율적인 노래로 응답한다. "부엉 부엉 부엉 부엉." 사실 부엉이 우는 소리는 낮이든 밤이든 여름이든 겨울이든 간에 내게는 늘 즐거운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다.

 

나는 세상에 부엉이가 있어서 기쁠 따름이다. 부엉이가 인간을 위해 어리석고 미치광이 같은 부엉부엉 울음을 울도록 하자. 그것은 한낮에도 빛이 들지 않는 늪지대나 황혼 녘의 숲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소리이자, 인간이 아직 그 존재도 인식하지 못한 미답의 광활한 자연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부엉이는 누구나 거쳐 가게 될 황량한 황혼과 아직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한 사념의 상징이다.

 

온종일 해가 어느 야생 늪지 위를 비추고 있다. 그곳에는 가문비나무 한 그루가 이끼를 잔뜩 뒤집어 쓴 채 서 있고, 그 위로는 작은 매들이 선회한다. 박새는 상록수 사이에서 지저귀고, 꿩과 토끼는 그 밑을 살금살금 움직여 다닌다. 그러나 이제 훨씬 음산하고 이곳에 잘 어울리는 날이 밝아 오면, 다른 종의 생명체가 그곳에서 자연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깨어나리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 전행선 옮김, <월든>, 더클래식(2013), pp 155~157)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