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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아룬다티 로이 - 『9월이여 오라』

by 내오랜꿈 2014.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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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룬다티 로이. 아마도 내가 그녀의 이름을 처음 본 것은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그녀의 첫 소설이자 마지막 소설 때문이었을 거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던 시절이 아닌 90년대 후반, 일주일에 한두 번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 들러 이런저런 책을 들춰보는 게 일상이던 시절에 맞닥뜨린 그녀의 소설은 솔직히 말해 내 취향이 아니었던 듯하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는데, 당시로서는 꽤나 광고를 했던 것 같다. 외국 소설을 잘 읽지 않는 내가 서점에서 시간을 들여 책을 훑어보았다는 건 <한겨레신문> 같은 일간지 등에 소개되는 광고를 보았다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난 가을, 촌동네 평생교육원에서 대출 받아 읽기 전까지 <작은 것들의 신>은 내 손에 쥐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소설가가 아닌 작가로서의, 정치평론가로서의 아룬다티 로이는 나에게 비교적 익숙한 편이다. 세월이 직선적 흐름이 아니라 시간의 끊임없는 반복이라는 나선형적 흐름이기에 해마다 돌아오는 특정한 날에는 기억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이름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흐름 속에서 아마도 로이는 내 기억 속으로 가장 강력한 접속을 시도하는 이름 중의 하나다.

 

'9.11' 하면 사람들에 따라 기억의 무게가 다를 것인데, 나에게는 칠레, 아옌데, 피노체트, 빅토르 하라,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 그리고 아룬다티 로이가 떠오른다. 세계 최초로 합법적 보통선거에 의해 탄생한 사회주의(인민 연합) 정권을 CIA의 사주를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수많은 인민을 학살한 사건의 시발점이 된 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이른바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는 내가 기억하는 '9.11' 같은, 미국이 지난 세기에 세계 곳곳에서 자행한 그들의 만행에 대한 댓가였던 건 아니었을까?

 

솔직히 우리가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서 새겨야 할 것은 '9.11테러' 그 자체가 아니라 1922년 9월 11일, 영국이 자기 마음대로 강행했던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이 가져온 세계사의 비극에 대한 성찰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있었던 쿠데타와 그 이후 벌어졌던 어마어마한 국가폭력의 실상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테러를 당한 이들의 죽음과 슬픔으로 기억되는 '9.11'이지만 테러를 행한 주체에게도 '9.11'은 이미 오래된 아픔과 슬픔으로 각인된 '9.11'이었다. 누가 그들의 '9.11'에 망각의 자유를 줄 수 있단 말인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아룬다티 로이 (Arundhati Roy)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의 어떤 강연에서 긴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아래는 그 강연 가운데 일부분이다.

 

"지금 우리는 9월 11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날짜는 작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미국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세계의 어떤 지역 사람들에게도 바로 이 날짜는 오랫동안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과연 9월 11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기억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반추는 비난이나 선동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역사의 아픔을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짙은 안개를 조금 걷어보자는 거지요. 이것은 미국 시민들에게 가장 예의바르게,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세계로 나오시기를" 부탁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29년 전 칠레에서, 피노체트 장군은 1973년 9월 11일에 CIA의 지원 아래 감행된 쿠데타를 통해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켰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그 국민들이 무책임한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칠레가 맑스주의 국가가 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쿠데타가 끝난 뒤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궁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쿠데타에 이은 공포정치하에서 수천 명이 죽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실종'되었습니다. 총살대가 공개처형을 행하였습니다. 집단수용소와 고문실이 나라 전역에 설치되었습니다. 사망한 사람들은 탄광의 갱도와 표지도 없는 무덤에 매장되었습니다. 17년 동안 칠레 사람들은, 한밤중의 노크 소리, 일상화된 '실종', 갑작스런 체포와 고문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산티아고 공연장의 청중들이 보는 앞에서 음악가 빅토르 하라의 두 손이 어떻게 잘렸는지 칠레인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피노체트의 부하들은 그에게 총을 쏘기 전에, 기타를 던져주고는 연주를 해보라고 놀리기까지 했습니다. "(아룬다티 로이, 『9월이여 오라』, 녹색평론사, pp 80~81)

 

9월 11일은 중동에서도 비극적인 기억이 있는 날입니다. 1922년 9월 11일, 영국 정부는 아랍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영제국이 1917년에 발표했던 '발포어 선언'의 후속조처였습니다. '발포어 선언'은 유럽의 유태 민족주의자들 ― 시오니스트 ― 에게 유태인의 국가를 건설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무런 조심성도 없이, 제국주의 권력은 세계의 오래된 문명을 갈갈이 찢어놓았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카시미르는 제국주의 국가 영국이 현대세계에 가져다준 저주의 선물입니다. 두 지역은 모두 오늘날 들끓는 국제적 갈등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같은 책, pp 83~84)

로이는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 이후로 다른 작품은 전혀 발표하지 않고 평론이나 강연, 실천의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런 그녀에게 왜 소설을 다시 쓰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자기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는 않으며 쓸 것이 있을 때에만 쓴다. 이런 소설을 써도 인도의 현실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난 썼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소설을 쓰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한가롭게 소설 따위를 쓸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한다.

 

이런 그녀의 생각은 『9월이여 오라』에 실린 「작가와 세계화」라는 글에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일어나는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작가는 스스로 물어보고, 가능한 한 정직하게 대답하면 그만입니다.(...중략) 문제는 일단 그것을 본 다음에는 안 본 것으로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을 본 뒤에는 침묵을 지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기에 대해 발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치적 행동이 됩니다. 순수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같은 책, pp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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