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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씨앗혁명』 -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가지 않았다면?

by 내오랜꿈 2014.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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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약~'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이 그리 쓸모 없는 일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만약~'이라는 수사를 사용하여 답답한 현실의 변화를 상상하기도 한다. 오늘, 대한민국의 이 답답한 현실을 생각하면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가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시카이 노부오의 『씨앗혁명』은 근대 이후 서양 역사에서 이 '만약~'이라는 역사적 가정을 현실과 비교·상상해 가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예컨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같은 가정이 그것이다. 물론 요즘의 역사학계는 이 가정조차도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게 맞다고 수정하길 권고한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하지 않았다면?'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운운하는 것은 서양 중심의 제국주의적 역사관에서나 가능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책의 부제가 "콜럼버스가 퍼트린 문명의 맹아"라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씨앗혁명』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 유럽에 퍼트린 여섯 가지 작물의 씨앗이 현대 문명에 끼친 영향에 관한 이야기다. 감자, 고무, 카카오(초콜릿), 고추, 담배, 옥수수. 지금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여섯 가지 작물들이 사실은 인류의 역사, 문명의 역사를 바꾸고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 된다는 사실을 풀어내고 있는 것. 각각의 식물이 지닌 역사적 배경과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현재의 문명이나 식문화에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설명으로 풀어내고 있다.



2. 감자, 옥수수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가장 많은 작물은 무엇일까? 무게 기준으로 옥수수다. 만약 옥수수가 없었다면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육식문화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서양 역사에서 기존에 재배하던 밀, 보리류는 식용으로 사용하기에도 늘 모자라던 작물이었던지라 가죽 사료로 쓴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감자와 옥수수가 유럽에 전해지기 전까지는 늦가을만 되면 키우던 돼지는 몽땅 도축하여 염장하는 일을 반복했다고 한다. 한겨울에 사람 먹을 식량도 없는데 돼지에게 줄 사료는 당연히 없을테니 도축하여 염장한 다음 일년 동안 먹을 식량으로 사용했던 것.


몇천 년이나 이어져오던 이 '패턴'에 변화를 준 게 바로 옥수수와 감자의 보급이다. 특히 감자는 단위면적당 에너지양이 밀, 보리류보다 최소 네 배나 더 많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늘 기아에 시달리던 유럽 사람들도 충분한 에너지를 섭취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감자가 밀과 함께 주식으로 됨에 따라 그전까지 주식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보리나 귀리가 가축의 사료로 이용되고 이는 더 많은 축산물의 생산을 가져오게 된다. 여기에 옥수수까지 더해지니 한겨울에도 돼지를 사육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게 되고 이는 곧 본격적인 육식사회로의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더군다나 감자는 땅 속에서 수확하는 작물이므로 기후의 영향도 덜 받고 전쟁의 피해도 덜 받게 되니까 '계산이 가능한' 식량생산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서양 역사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따지고 들면 산업혁명도 이 '계산가능한 식량 생산'으로서의 감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도 존재할 정도다.


중앙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의 알티플라노 고원이 원산지인 감자가 유럽에 끼친 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작물의 역사에서 감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아일랜드의 대기근' 이야기다. 영국으로 전해진 감자는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로 퍼져 나가 18세기에 들어설 무렵 감자는 아일랜드의 '유일한' 에너지원 작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754년 320만 명이었던 아일랜드의 인구는 1845년에 820만 명으로 증가했다.


바로 이 시기, 1845년부터 1850년까지 '감자 마름병'이라는 병이 전 유럽을 강타했다. 하지만 이 감자 마름병에 따른 피해의 강도는 아일랜드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보리나 밀 같은 다른 에너지원 작물을 재배하고 있던 유럽의 다른 나라와 달리 기후 및 토양 조건이 척박했던 아일랜드는 감자만이 유일한 식량작물로 재배되고 있었던 것. 이 기간 동안 기아로 15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고향을 버리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850년에 아일랜드 인구는 1845년의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아일랜드의 비극'으로 불리는 감자 대기근이다.


하지만 이때 신대륙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의 자손들은 이후 미국 역사, 아니 세계 역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최근 50년의 역사에서만 보아도 존 F. 케네디,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이라는 미국의 대통령이 바로 아일랜드계라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안데스 원산지인 감자는 아일랜드인의 이주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북미 대륙에도 본격적인 감자 재배가 시작된다. 그들의 입맛은 이미 감자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일랜드의 비극은 후세의 정치나 경제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3. 고추


현재 세계적으로는 2,000여 품종, 우리나라에서는 550여 품종의 고추가 재배되고 있지만 분류학상으로는 4가지 중 하나라고 한다. 이 가운데 3가지 종은 아직까지 오로지 원산지인 안데스 주변 지역에서만 재배되고 외부로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 전 세계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수많은 품종의 고추는 모두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로 학명이 "Capsicum annuum"이라는 고추의 아종이라고 한다. 매운맛이 나건 단맛이 나건 붉은색이든 노란색이든 모두 멕시코가 원산지인 이 아늄종의 사촌이라고 한다.


서양 역사에서 콜럼버스의 항해는 사실 후추와 같은 향신료의 안정적 확보라는 단순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 그래서 콜럼버스는 신대륙에 도착해 놓고도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에 엄청난 실망을 하면서 네 번에 걸쳐 인도 항로 개척의 길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향신료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콜럼버스의 항해는 고추라는 인류 최고의 향신료를 유럽에 전파했다는 측면에서 성공적인 항해여야 할텐데 유럽 식탁에서 고추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하지만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고추는 포르투칼에 의해 유럽을 경유하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 유일의 포르투칼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직접 전해졌으며, 각각의 땅에서 단기간에 식생활에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콜럼버스가 고추를 눈으로 본 지 불과 50년 뒤인 16세기 중반에 고추는 아시아 북동부의 일본에까지 전해지게 된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보면 16세기 중반, 조총을 수입하는 등 포르투칼 함대와 교류하는 장면도 나오고 포르투칼 상인으로부터 산 흑인 노예를 '보디가드'로 데리고 다니는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묘사한 부분도 있다. 중국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해졌다는 기록은 그만큼 아시아에서의 포르투칼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고추는 이후 각국의 기후와 재배조건에 맞게끔 새로운 품종이 개발되는데, 고추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품종 가운데 하나가 파프리카다. 파프리카는 원래 헝가리어로 후추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헝가리에서 고추는 처음에는 '투르크의 파프리카' 또는 '이교도의 파프리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것은 고추가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투르크를 통해 헝가리에 전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헝가리에 전해진 고추는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곧바로 헝가리 식탁문화에 안착하게 된다. 고추는 크게 보면 매운맛을 내는 품종과 단맛을 내는 품종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단맛을 내는 파프리카 품종을 개량하고 산업으로 발전시킨 나라가 바로 헝가리다. 현재 헝가리의 파프리카 산업은 농업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파프리카 씨앗은 국가가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파프리카 씨앗이 대체 뭐라고 국가가 나서서 관리할까?


그러나 사정을 알고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만 국한하더라도  파프리카 종자는 금보다 비싸게 판매되고 있다. 설마? 하지만 사실이다. 금보다 비싼 향신료로 유명한 게 '샤프란'이라면 금보다 비싼 종자는 파프리카인 셈. 파프리카 종자 1g당 가격을 금값과 비교해 보면 1.5~2배 정도 비싸다. 국내의 유명 종묘 업체에서 판매하고 있는 파프리카 종자는 1립(1g당 약 120립)에 500원~1,300원 정도이므로 약 1g에 60,000원~156,000원인 셈이다. 금 1g당 가격은 보통 6~7만원을 오르내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파프리카 종류를 피망과 파프리카로 구분하지만 농촌진흥청에서는 피망과 파프리카 구분 없이 '단고추'로 통일시켜 부르고 있다. 익숙치 않아서 나 자신도 아직 파프리카로 부르고 있지만 '단고추'라는 이름은 괜찮은 것 같다..



4. 이 외에도...


이 외에도 『씨앗혁명』에는 고무, 카카오(초컬릿), 담배, 옥수수에 대해서 흥미있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도 맺음말 격으로 쓴 "콜럼버스의 빛과 그림자"에서 언급하는 사실들이 더 흥미홉다. 아래의 목차만 소개한다. 흥미로든 지식으로든 누구나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 신대륙 원산 식물의 공로는 여러 가지

· 식재료 공급 기지로 변신한 신대륙

· 극심한 원주민의 인구 감소

· 정복자의 원주민 학살

· 강제 노동에 따른 죽음

· 병원균에 대한 면역이 없는 원주민

· 신대륙의 저항, 매독

· 콜럼버스에 대한 감사



시카이 노부오, 『씨앗혁명』, 형설라이프(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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