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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생각

개에 대한 짧은 생각

by 내오랜꿈 2014.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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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우리 집은 항상 개를 키웠다. 뭐든 주면 잘 먹는 일명 '똥개' 종류를. 논일 밭일 하시느라 항상 바쁜 부모님들을 대신해서 이 똥개들과 그나마 '교감'이란 걸 하며 놀아주는 건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말이 교감이지 거의 폭력에 가까운 나의 구박을 잘도 견디어 준 그때의 '도꾸'들이 오늘, 갑자기 그리워진다. 왜 그 시절에는 개한테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는 게 어려웠을까? 내가 지금 키우는 '봄'이나 '삼순'이처럼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이면 될 터인데 왜 그리들 '도꾸'나 '메리' 일색이었는지 모르겠다. 공부 한답시고 도시의 학교로 전학을 간 뒤로도 우리 집에는 몇 년에 한 번씩 개가 바뀌어서 그렇지 개를 키우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지금 생각해보니 키우던 개가 자주 바뀐 이유는 아마도 '복날'이 가까워 오면 동네로 들어 오는 개장수들에게 팔아버린 게 아닐까 짐작된다). 




이 같은 유년의 추억 때문일까? 세월이 흘러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도 개를 구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 집 마당에는 두 마리의 발바리와 그 중 하나가 낳은 강아지 네 마리가 있다. 저 네 마리가 눈을 떠 발발거리고 돌아다닐 때 쯤이면 우리 집은 그야말로 '개판'이 되리라. 오늘 갑자기 개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자기의 입신양명을 위해 스스로 '권력의 개'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의 흔적을 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개가 들어가서 좋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몇만 년을 인간과 함께 해온 동무들인데 그 대가 치고는 너무 야박한 거 아닐까?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나 개나 그 본성이 무어 그리 다르단 말인가? 오히려 지금 세상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양심쯤은 개한테 줘버린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상 아니던가. 개를 한 번 키워 보시라. 먹을 것만 주면 만사형통이다. 먹을 거 앞에서 꼬리 흔드는 개나 권력 앞에서 꼬리 흔드는 인간이나 뭐가 그리 다르겠는가?


이쯤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왜 사람의 존엄성을 개에다가 비유하느냐고 따지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리라. 물론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건 개도 마찬가지다. 개라고 먹을 거 앞에서 무조건 꼬리 흔드는 건 아니다.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는 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우리 집 '삼순'이가 그랬다.




우리와 4년밖에 함께 하지 못한, 짧은 인연이었지만, 삼순이는 우리에게 많은 걸 남기고 갔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많지만 오늘 이야기 주제와 관련된 것을 들자면 삼순이는 자존심이 센 아이였다. 우리가 하지 말라고 하는 건 거의 대부분 하지 않는 삼순이였지만, 딱 하나 안 되는 게 집밖으로 탈출하는 거였다. 보통 때는 그나마 괜찮은데 발정기가 되면 도무지 통제불능이었다. 이런 삼순이를 좀 심하게 나무라면, 예컨대 작은 자를 가지고 콧등이라도 몇 대 쥐어박으면 삼순이는 상당히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고서는 밥을 줘도 안 먹는다. 보통 때는 먹을 걸 손에 들고 부르면 바로 오지만 이럴 때는 처음 불러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두세 번 부르다 내 억양이 좀 높아지면 마지 못한 듯이 슬금슬금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먹을 걸 손에 쥐고 있는데도 꼬리를 흔드는 법이 없다.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않고 비스듬히 옆을 볼 뿐이다. 개가 주인하고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니... 게다가 이 '단식투쟁'의 길이도 내가 자기를 야단친 강도에 비례한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이틀 정도까지 간다. 


이런 까칠한 성격 때문에 삼순이는 우리 부부 말고는 그 어느 누구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은 삼순이를 한 번 만져볼 요량으로 먹을 걸 가지고 유인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삼순이는 먹을 거 앞에서도 쉽사리 다가가지 않는다. 던져 주면 받아먹을 뿐. 몇 번씩 방문하여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먹을 걸 받아먹으러 다가가지만 입에 넣기 무섭게 돌아선다. 결코 곁을 내주지 않는다. '먹는 건 먹는 거고 나는 나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이런 삼순이의 자식들인 '봄'이와 '삼순'이 주니어는 어떨까? 자존심이 있을까? 천만에다. 얘네들은 나한테 콧등을 쥐어박힌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먹을 거 앞에 굴복한다. 좌우로 요동치는 꼬리를 보고 있자면 내가 오히려 슬퍼진다. '먹을 거만 주면 꼬리치는 자여, 그대 이름은 개새끼'이니라, 가 절로 나온다. 이러니 얘네들은 '훈육'이 안 된다. 쥐뿔 만한 자존심이라도 있어야 해야 할 거 하지 말아야 할 거를 구분할 수 있는데 먹을 것만 주면 꼬리치는 '개개끼'한테 훈육이라는 건 애초부터 사치다. 그러니 내가 모든 걸 포기한다. 그래서 우리 집 마당 한구석은 매일 아침 파헤처져 있다. 나는 파묻고 삼순이는 파헤친다. 누가 이기는 싸움이 될까?


사람들이여. 개 너무 비하하지 마시라. 우리 인간이나 개나 먹을 거 던져 주면 무조건 꼬리 흔드는 '개새끼'가 되는 건 한순간이다. 문제는 누가 좀 더 '덜' 개새끼가 되는가의 문제다. 


나는 좀 더 '덜' 개새끼가 되기 위해 엄청 노력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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