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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고병권의 서재는 없다

by 내오랜꿈 2014.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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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나의 이야기

서재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

제가 "나에게 서재는 없다."라고 말하는 건, 저한테 서재가 정말로 없기도 하지만(웃음) 지식인들이 서재에 대해 말할 때 문제의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래요. 물론 저도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은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이 변신하거나 창조할 때 꼭 필요하죠. 하지만 바로 그런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데요. 서재는 세상의 소음, 먼지로부터 좀 떨어져 들어온, 자칫하면 퇴행적 공간일 수도 있어요.

자크 르고프라는 역사학자에 따르면 지식인들의 공간인 대학은 열린 작업장, 길드였기 때문에 누구나 들어올 수 있었어요. 그래서 중세 지식인들을 표현한 판화 같은 걸 보면 항상 학생들에게, 대중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서재라는 공간이 특화되면서 '지식인'하면 책이 쌓인 곳에서 지구본을 앞에 두고 혼자 머리를 괴고 있는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데, 세계로부터 물러나서 혼자 있는 그런 곳이 꼭 필요할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최근에 책 읽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는데요. 전태일이라는 분 있지 않습니까.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죠. 그 사람이, 저한테는 되게 재미없어 보이는 근로기준법이라는 법전을 그렇게 열심히 읽었는데요. 아버지하고 대화를 하다가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고, 그걸 골방에 들어가서 배 깔고 읽고, 작업장에도 몰래 들고 가서 읽고 버스에서도 막 읽었대요.

그런 의미의 책 읽기, 장소를 가리지 않는 책 읽기.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찌 보면 서재는 없죠. 왜냐면 모든 곳이 서재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서재에 대해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철학자 고병권의 서재 이미지 1

철학이 해야 하는 일

제가 교도소라는, 교정을 하는 그 공간에서 간혹 강의를 해요. 노들야학이라는 장애인 야학에서 직급도 철학교사고요. 그런데 교도소에서 처음 강의를 하던 2008년에 저 스스로 물었어요. "철학이 뭐지? 내가 철학자인가? 철학자는 뭘 하는 사람이지? 교도소에서는 뭘 할 수 있지?" 비뚤어진 걸 바로잡는 교정, 즉 사회적 잣대라 할 수 있는 법을 어긴 사람을 바로잡는 것은 철학이 할 수 없어요. 법에 관해서라면 판사, 검사, 변호사가 더 잘할 거고, 교도소 안의 규칙은 교도관이 훨씬 더 잘 알겠죠.

그럼 철학은 뭘 해야 하느냐, 철학은 잣대가 똑바른지를 재야 될 것 같아요. 법률 혹은 법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규칙, 원칙, 정의. 통념, 뭐라고 해도 좋은데요, 이것들이 올바른지에 대해서 어떻게 재야 될까. 잣대를 재는 잣대는 없어요. 굉장히 어려운 얘기인데요, 잣대 없이 잣대를 재는 것. 그것이 철학이지 않을까.

법률관은 '법대로 살아라.'라고 말할 거예요. 철학자는 '사는 법을 좀 알아라.'라고 말할 거예요. 그래서 법이 사는 법에 맞지 않으면 그 법을 고쳐달라고 기꺼이 감옥에도 가는 사람이에요. 소크라테스 이래로 다 그랬어요. 국가의 어떤 명령이 내려질 때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어겼다고 소크라테스가 변론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철학은 법이나 법칙이 목표가 아니라 성숙이 목표죠. 법을 다루지만 법보다 성숙해야 돼요. 법은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정의란 참 모호한 거예요. 법하고 정의가 똑같다면 지금까지 법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을 거예요. 근데 정의란 '사람이 저러면 안 되지 않나?' 이런 묘한 감각이에요. 그런 감각을 훌륭하게 키우고 가꾸는 게 철학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일깨우려는 사람을 철학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요.

철학자 고병권의 서재 이미지 2

고통과 소음 가까운 곳에서

재야 연구실, 혹은 재야학자라는 규정보다 저한테 더 중요한 건 '연구자 생활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규정이에요. '재야'에 있는지 '제도'에 있는지는 안 중요하고요. 여기에 있으면 누가 못하게 안 하니까 하고 싶은 공부를 해요. 전공과 학제가 다른 사람들이 같이 있기도 하고요.

더 중요한 것은 생활을 같이해요. 연구실에 주방도 있는데 제가 한 달에 네 끼 식사당번을 하면 동료들이 한 달간 나머지 56끼를 해줘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돈이 적게 드는 게 사실이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요. 하나의 출구를 찾았고 이렇게 하면 평생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애는 막 커가지, 좋은 대학 나와서 박사도 받은 것 같은데 그 뒤로 실업자지, 이제 나이도 먹었지 하니까 걱정하시지만요. (웃음)

근데 더 좋은 건 뭐냐면 되게 시끄러워요. 실제로 주변에 차도 많이 다니고, 불쑥불쑥 누가 문 열고 들어와요. 나 아프다면서. 무슨 말이냐면 공부하는 공간이 고통이나 소음이나 소란과 가까워요, 이게 자연과학에는 방해될지 모르겠지만, 인문과학에는 되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고통하고 깨달음이 따로 있지가 않아요. 세상에는 아픔이 있죠. 그 아픔을 어떻게 의미 있게 만들 것인가가 인문학자에게는 되게 중요해요.

철학자 고병권의 서재 이미지 3

소크라테스가 배고픈 이유

니체가 <서광>에서 했던 말이 하나 있어요. 철학자의 검소함이랄까, 위대한 학자의 소박함이랄까. 말하자면 좋은 철학자들은 겉보기에 가난하고 빈곤해 보이지만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그도 되게 풍요롭고 원하는 걸 다 얻는다고 말해요. 근데 차이가 뭐냐면 철학자들이 그의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은 사람들이 내다 버리는 것들 중에 있어요. 싸구려로 파는 것들 중에도 있고.

사람들이 시장에서 엄청 비싸게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철학자가 애당초 필요 없는 것들이 많아요. 무슨 말이냐면 철학자도 삶에 풍요로운 것은 다 갖추고 사는데, 가치의 기준이 뒤바뀌어 있는 거죠. 저들이 높이 평가하는 게 나한텐 별로 가치가 없고, 나한테 가치 있는 건 저 사람들이 내다 버리고. 그러니까 큰돈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빈곤한 건 아니에요.

니체에게서 배운 두 가지

니체한테 고마움을 갖고 있어요. '어떻게 그때 내가 그런 책을 읽게 됐을까.'라고요. 제가 대학생활을 그렇게 쾌활하게 하진 않았어요. 91년에 재수해서 대학을 갔는데 굉장히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래서 사회학과 대학원도 문제의 심층을 파고들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간 거고요. 그런데 딱 들어가자마자 첫 달에 변곡점이 된 니체를 만났어요. 그때 니체가 되게 소중한 걸 일깨워줬어요. 깊이하고 무게를 혼동하지 말라고. 너는 깊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거워지고 있다고.

그리고 이번에 10년 만에 니체를 내면서 다시 봤는데, 이 니체는 그때 니체하고는 또 달라요. 지난번엔 굉장히 경쾌하고 유쾌하다는 점에서 큰 도움을 줬는데, 이번에는 소박했어요. 예전에는 경쾌했지만 화려하게 보였거든요. '신은 죽었다.' 영원회귀, 권력의지, 힘의 의지. 이 어마어마한 말들이 너무너무 세고, 멋지고.

그런데 이번에 본 니체는 모든 스펙터클은 가짜라고 말해요. 제 식으로 표현하자면 '황금에는 도금할 필요가 없다, 도금한 것들은 황금이 아니다'. 그리고 <서광>에서는 그런 걸 알려줬어요, 수십 년 걸쳐서 잘못된 습관으로 어떤 병에 걸렸으면 치료할 때도 수십 년 쓸 생각을 하라고. 한방에 나으려고 하지 말라고. 위대한 것들도 무너질 때 처음에 잘게 잘게 균열이 생기고 잡초가 자라다가 무너진다고. 마지막 쓰러지는 게 스펙터클해서 사람들이 그것만 보는 거라고. 역으로 위대한 일을 하려면 천천히 소박한 것부터 하라고. 사소한 것들은 절대 사소하지 않다고요.

언더그라운드 니체, 니체의 언더그라운드

개념(concept)이란 말이 원래 '임신'이라는 라틴어 콘셉티오(conceptio)에서 왔어요. 니체도 영원회귀 개념을 18개월 임신했고 그리고 출산했다고 말했었는데요, 이처럼 개념은 정말로 시간을 품고 있어야 해요. 섣불리 내놓으면 미숙아가 되거나 조산을 해요.

그런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언더그라운드에 대해 이미지로써 말을 한다면 그라운드와 관계된 개념이죠, 그라운드라는 건 철학에서 토대나 근거 이런 거예요.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할 때 그 근거. 어떤 행동을 보며 '쟤가 저런 행동을 하면 안 되는데.'라고 하는 이런 거 있죠? 그처럼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해 보이는 우리 시대의 어떤 개별 판단이 의지하고 있는 선판단이라고 할까요? 미리 존재하는 우리의 확고한 기준 같은 거요.

그런데 니체의 언더그라운드 개념은 우리가 확고하게 믿고 있는 근거 자체는 근거를 안 갖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무슨 선문답 같은데요, 우리가 믿고 있는 근거들은 역사적으로 근거 없이 생겨난 것들이에요. 그래서 한 시대가 진리라고 믿는 걸 우리가 돌이켜보면 '그 시대는 세상에 저걸 진리라고 믿었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한 시대의 진리와 한 시대의 오류는 구별이 안 돼요. 그 시대가 믿는 진리가 그 시대의 오류이기도 해요. 바로 이걸 문제 삼는 거죠.

그런데 이게 되게 어려워요. 왜냐하면, 이 판단은 마치 조명과 같아요. '이건 뭐다.'라고 말하지만, 저 조명을 바꾸면 또 달라 보이거든요? 그 사물 그대로 있지만요. 그래서 니체는 그 조명을 문제 삼으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만약에 옳고 그르다는 근거가 없다는 걸 깨달으면 어떻게 되냐면 우리가 산을 오를 때 더 깊은 곳에서 본 것과 더 높은 곳에서 보는 것이 위계가 없어요. '정상에 올라가 보는 게 제일 좋고. 허리가 두 번째고, 골짜기가 세 번째고'가 아니에요.

이처럼 어떤 판단을 할 때,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그냥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그것에 의해서 평가절하되어왔던 많은 것들을 복원시킬 수 있어요. 그래서 노인들을 보며 노쇠함이 아닌 원숙함을 볼 수 있고 아이를 보며 유치함이 아니라 천진난만함을 보게 돼요. 각각의 높이가 주는 고유한 덕성이랄까, 힘이랄까요? 거기 통찰이 있어요. 그래서 니체는 자꾸 말해요, 너는 얼마나 많은 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봤냐고.

상대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높이마다 갖고 있는 힘을 찾아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랬을 때 우리는 '조선 시대는 전근대적이야.'라고 절하하지도 않고 '그 시대를 있게 한 힘은 뭐였을까'라고 묻게 되고. 역으로 우리가 믿는 것의 우스꽝스러움도 알게 되고요. 그런 걸 알게 될 때 니힐리스트가 되는 게 아니고요. 거꾸로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얻게 되죠.

각자의 방식대로 소박한 변화를

철학자 고병권의 서재 이미지 4

예전에는 총체적인 그런 변화, 이런 걸 중시했는데요. 아까 소박함에 대해서도 얘기했지만, 저를 이루고 있고 제가 관여할 수 있고 한 발이라도 더 생각할 수 있는 것 있잖아요? 이것들을 바꾸다 보면 어느새 세상이 크게 바뀌어 있을 거라고 믿어요. 정말로. 세상이라는 걸 허깨비처럼 만들고 '이걸 어떻게 바꾸지?'라고 고민할 필요가 없고, 길바닥에 나앉은 상인 한 명과 대화를 하고 문제를 던져봤을 때 그 질문이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방식이 다르고 스타일이 다를 거예요. 저는 말과 글로 하는 사람이지요. 농부는 농사를 짓다가 생태적 삶을 살 수도 있고, 깨우침을 얻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걸 본 영화감독 아들이 뭔가 통찰을 얻을 수 있고 그걸 본 노동자 삼촌이 또 다른 삶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어요. 만인은 만인을 가르칠 수 있고, 만인에게 배울 수 있고, 만인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뭘 배울 것인지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해야 합니다. 다만 그 수단이 다르고. 그 스타일이 다르겠지요.

모든 사람이 철학책을 읽어야 되느냐? No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고민을 해야 되느냐? Yes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식인의 서재 '고병권' 편은 해방촌 수유너머R 연구실에서 촬영했습니다.)

내 인생의 책

첫 번째 책이 <도덕의 계보 / 이 사람을 보라> 묶여 있는 책인데요. 저는 '이 사람을 보라'를 추천하려고 합니다.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누군가가 요즘 니체가 잘나간다고 니체를 읽어보자며 가지고 왔어요. 저는 니체를 잘 모르고, 조금 들은 게 있다면 나치와 관계된 얘기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책을 펼쳤는데 금발의 야수가 초식동물을 청동의 틀에 집어넣어야 된다느니 이런 표현이 참 무섭고 안 읽혔어요. 저는 아무래도 사회과학을 하면서 약자 편 들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정의롭다고. 그런데 니체는 철저하게 강자 편이에요. 약자를 비아냥대고요. 그래서 굉장히 싫었어요, 솔직히.

그런데 정말 운인데, 대학원 연구실에 책을 펴놓고 있을 때 바람이 불었어요, 정말로. 그래서 책장이 넘어갔어요, 이렇게. 그런데 보이는 문구가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이게 뭐야 하고 넘겼는데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고, 뒤를 보니까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예요. 그 순간 소리 내어 웃었어요. 어이없어서요. 그때 직관적으로 이 사람이 나치일 리가 없다고 느꼈어요. 제가 느끼는 나치나 파시스트들은 딱 하나가 없는데, 유머가 없어요. 너무 진지하고요. 그래서 다시 보기 시작했고 그때 너무 좋아졌고 저에게 무게와 깊이를 혼동하지 말라는 걸 일깨워줬죠.

그리고 10년 만에 니체에 관한 책을 쓰면서 이 책을 다시 보았는데 요번에도 저한테 큰 힘을 줬어요.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에 보면 자기 먹고 마시는 얘기거든요? 뭐 먹었는지, 뭐 마셨는지, 무슨 책 읽었고, 무슨 음악 들었고, 어디 갔는지. 요즘 블로그에나 올릴 것 같은 얘기들이요. 무슨 철학책에 그런 얘기들을 잔뜩 써 놓을까? 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요. 그때 니체가 중요한 질문을 던졌어요. 인류 최대의 과제를 해결한 것처럼 위대한 사명을 제시했다고 말하는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냐고. 이유는 딱 하나예요. 사소한 것들은 사소하지 않다고요. 사소한 것들은 사실은 중요하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수백 배나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게 니체가 여기 써놓은 말이에요.

스피노자의 <에티카>라는 책인데. 이 책도 참 여러 번 봤어요. 그런데 이 책은 참 묘한 책이에요. 소위 말하는 한 번 읽고 충격을 주는 핫한 책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굉장히 맛이 나는 책이에요. 그리고 묵묵히 생각하다가 한꺼번에 감명이 밀려오는 책이기도 해요. 목차 앞을 보면 기하학적 방법에 따라 썼다고 쓰여있어요. 그리고 앞에 보면 정의, 공리, 정리, 증명, 주석. 이런 식으로 쓰여있어요. 수학책처럼. 어떻게 이렇게 이성적인 책인데 읽고 나면 이렇게 다정한가? 라는 묘한 느낌을 줘요.

스피노자가 1665년인가. 영국과 네덜란드가 전쟁 중이었을 때 올덴버그라는 영국인 친구와 서신 교환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해요. "그 옛날 조롱꾼들(데모크리토스)이라면 지금 전쟁 상황을 조롱하고 비웃었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게 서로 죽이려고 하는 짓이니 그렇겠죠?) 하지만 나는 인간에 대해 슬퍼하지도 않고 조롱하지도 않을 거다. 다만 이해할 것이다. 그 일은 나에게 철학을 하게 한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게 한다."고요. 참 차분한 사람이에요.

여기 나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인간은 한 양태일 뿐인데요, 인간을 양태로서 이해하게 되면 이런 거예요, 세월호 때문에 조심스럽긴 한데 비유를 들자면요, 수영하다 보면 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자연의 법칙을 어기진 않아요. 그런데 수영을 해서 살아난 사람도 자연법칙을 어긴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 <에티카>는 뭘 말해주고 있냐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자연법을 어기지 못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때로 바보짓을 하고 망치더라도 그것이 자연의 질서를 어긴 게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 수영법을 배우냐 못 배우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처럼 에티카는 자연을 이해하게 함으로써 그 안에서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지, 더 잘 살 수 있는지, 그 길이 귀하고 드문 길인데 그걸 천천히 보여줘요. 그리고 더 나아가면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할 때 더 좋아진다고 하는 걸 보여줘요. 수학적인 방식으로요.

자연의 질서를 다룬 자연학 위에, 어떻게 사는 게 좋고 나쁜지에 대한 윤리학이 있고, 그걸 어떻게 집합적으로 해낼까에 대한 정치학이 얹혀 있어요. 끝에 이르면 굉장히 논리적이고 지적인 책을 읽은 것 같은데 묘하게 따뜻해지고 힘이 나고 세상을 긍정하게 돼요. 참 좋은 책이에요. (읽기는 난해하고 번역도 조금 더 고쳐졌으면 좋겠어요.)

세 번째 책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책들이 아니더라도 제가 맑스, 니체, 스피노자를 참 좋아해요. 말할 필요가 없는 유명한 책이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넘어서려 했던 사상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 우리 시대를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게 해준 사람이에요. 자본주의라는 말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홉스봄이란 역사학자가 이렇게 얘기해요. 자본주의의 가장 핵심 개념인 '자본' 개념을 정립하고 다른 개념과 혼동하지 않게 만들어줌으로써 자본이란 책이 나오면서 우리 시대를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요.

하지만 제가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그런 개념적인 것보다 문제를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눈이에요. 이성적 눈도 탁월하지만, 더 중요하게 본 건 감성적 눈이에요. 이 책은 상품이 쌓여있는 곳, 시장에서 시작해요. "와, 풍족하구나."라고요. 이 부가 어디에서 왔는지 보는데 시장 어디를 가보아도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등가교환을 해요.

그러다가 어떤 시장 하나를 봐요. 다른 물건들은 그렇지 않은데, 딱 한 곳 노동시장이 달라요. 여기도 자본가가 화폐를 들고 갔고 노동자가 노동력을 들고 갔어요. 교환을 해요. 등가교환이에요. 서로 필요해서 한 교환이었고 누구도 법으로 강제하지 않았어요. 자유로운 교환이었고, 등가니까 평등했어요. 그리고 서로 이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인, 서로 이익이 되는 교환이었어요. 그런데 마르크스는 그 뒷모습을 봐요. 교환이 막 끝나고 났을 때 표정. 제가 맑스한테 감탄한 곳은 여기예요.

사실 등가교환이면 천 원 내고 천 원짜리 물건을 받았으니 쿨하게 헤어지면 돼요. 그런데 한 사람은 새로운 사업전망에 불타는 눈빛으로 어깨 으쓱하며 앞을 보고 가고, 한 사람은 마치 줄 것 다 주고 가죽이 되어 무두질을 기다리는 소처럼 쭈뼛쭈뼛 따라가요. 혹시 심층에서는 뭔가 불평등한 게 있는 게 아닌가, 부자유한 게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가 손해 보고 있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에 그 사람들을 따라가죠. 갔더니 공장이 나오고 그 입구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쓰여있어요. 거길 들여다보면서 자본의 본 이야기가 시작돼요.

정말 놀라워요. 이론가나 과학자들 또는 학자가 꼭 가져야 할 눈이에요. 그 슬픔을 아는 것, 슬픈 눈빛을 읽어내는 것, 그걸 읽어낼 수 없으면 <자본론> 같은 책을 쓸 수 없을 거예요. 정말 훌륭한 책입니다.

저는 루쉰의 소설도 좋지만, 이 짧은 글들을 너무 좋아해요. 원래 스타일이란 말이 스틸로스라는 라틴어에서 왔는데요, 원뜻이 판에 글자를 새기던 조각칼, 뾰족한 침이에요. 그런 스타일의 의미로 볼 때 그 의미에 가장 가까운 글을 쓰는 사람은 제가 아는 한 루쉰이에요. 정말 찔리고 아플 거 같아요.

전 루쉰의 어떤 걸 보냐면 무뢰한 정신이랄까요. 끈기, 근성, 억지스러움 이런 게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어떤 국면에서 우리는 정말 그래야 해요. 예를 들어 '잡감'이라고 하는 짧은 글이 있는데, 거기에 인상적인 문구가 있어요. 1920년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들어오면서 젊은이들의 반일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정부가 그걸 공격적으로 진압해서 학생들이 많이 죽게 되었고 학생들은 싸우기 위해서 혈서도 쓰고 탄원서도 올립니다.

그런데 루쉰은 뭐라고 말하냐면 혈서도, 절규도 필요 없다, 혈서 한 장일 뿐이고 별로 보기 좋지도 않고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요. 뭐가 진짜 무서운 거냐면, 가령 숲에서 시체 사이로 독사 한 마리가 소리 없이 지나가거든 그걸 무서워하라고, 어떤 원귀가 달라붙거든 그를 두려워하라고 해요. 네가 밥을 원하든 여자친구를 원하든 조국을 원하든 뭘 얻으려면 독사처럼 칭칭 감고 원귀처럼 끈덕지게 따라붙어야 된다고. 너무 힘들면 잠시 쉬라고, 쉬어도 좋다고. 하지만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계속 하라고.

저는 이 정신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서구가 중국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던 이유라고 생각해요. 금방 이긴 것 같았는데 징그럽게 끈덕져요. 물론 루쉰은 중국 인민들한테 그게 없다고 큰 채찍으로 등짝을 내리쳐야 한다고 그랬지만. 정말 단검 같은 글, 칼로 찌르는 글이라 좋아해요.

끝으로 한 권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글이고, 제목부터 다르죠.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노들야학의 박경석 교장 선생님이 쓰신 글인데요. 20년 넘은 중증 장애인들 학교고 별건 없어요. 검정고시 준비하고 그래요. 근데 이 학교가 대단한 학교예요. 뭐냐면 중증 장애인들이 집 밖에 나오는 것부터가 한국사회에서는 일이었어요. 지금 많이 다니는 저상버스, 이분들이 싸워서 얻어낸 거예요. 그다음 지하철 역사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것도 이분들 싸움 때문이에요. 학교 가려고요. 정말로요. 피 터지게 싸웠어요.

그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이분 박경석 선생님이신데 자기를 '고장'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세요. 교장 아니라는 뜻도 있고, '이 고장에서 태어나고 이 고장에 뼈를 묻겠다.' 그렇게 계속하겠다는 의미도 있고, 더 중요한 건, 우린 고장 난 사람들이라고요. 장애인들이고.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사실은 이 사회가 고장 났다고요. 그래서 이 사회를 계속 바꿀 거라고. 그런데 그렇게 딱딱하지 않고 읽다 보면 많이 웃게 되고 많이 울게 되는 책인데요. 강추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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