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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비극의 카니발 - 칼 크라우스의 <인류 최후의 날들>

by 내오랜꿈 2014.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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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카니발


출처:르몽드 디플로마티크[74호]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863) 

일시:2014년 10월 30일 (목)

자크 부브레스 제라르 Jacques Bouveresse


  
 

칼 크라우스(1874~1936)는 극작가, 시인, 풍자가, 기자로 활동하며 끊임없이 자기 시대의 도덕적 부패를 규탄했다. 이 유럽 지식층의 저격수는 핵심 작품인 <인류 최후의 날들>을 포함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세계 1차 대전을 다룬 <인류 최후의 날들>은 선견지명으로 작금의 현실을 강타하고 있다.


계 1차 대전에 대한 칼 크라우스의 대 비극 <인류 최후의 날들>(1)은 거의 7년간에 걸쳐 집필되었다. 사람들은 전쟁 발발 초기부터 전쟁 내내 작품 주인공 뇌르글러(Nörgler, 불평가)가 옵티미스트(Optimist, 낙관론자)와의 분쟁에서 보이는 입장이, 곧 전쟁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라고 믿는 실수를 쉽게 저지른다.


현실 속에서 크라우스의 정치 성향은 재난 책임 문제에 대한 그의 감정만큼이나 큰 변화가 있었다. 평론가 에드워드 팀스는 크라우스 자서전에서 “<인류 최후의 날들>은 단지 작가의 관점만 설명해주는 게 아니라, 전쟁의 압박 속에서 크라우스의 급진적인 방향 전환도 함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원래 1917년 10월 이전까지 그가 고수했던 ‘보수적인 입장’에서 구상되었다. 연이은 작품 수정은 오스트리아 정권 수립과 사회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크라우스의 환멸을 반영한 것이다. 최종 수정작업 과정은 1920년 대선에서 다시 정권을 잡은 기민당과 사회당의 대연정에 반발한 자신의 입장에서 영향을 받았다. 예컨대 1915년 이 작품을 시작할 당시 ‘충실한’ 풍자가였던 그가 집필을 마칠 때 즈음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급진 공화주의자로 변모해 있었다”고 했다.(2)


실제로 전쟁 시작 때만 해도 군주제, 귀족, 교회, 군부 등 전통적인 세력을 존중하는 보수주의자였던 크라우스는 당시 문제가 있던 정권과 정치, 지식, 종교, 도덕 등 전반적인 엘리트 집단들이 붕괴되는 사건들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전쟁이 종식되었을 때엔 그는 어쩔 수 없이 골수 공화주의자로 변모해 있었다.


스스로 “인류 최후의 날들”을 마치 “다큐멘터리 비극”처럼 소개했던 크라우스는 이 작품의 상황이나 작중인물 그리고 대사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지구 시간으로 대략 열흘 밤 동안에 펼쳐지는 이 비극은 화성에 있는 한 극장에서 공연하려고 쓴 것이다. 지구의 관객들은 차마 이 비극을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자신들의 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 보기엔 비현실적이고,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피로 흥건한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실현 불가능한 추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엔 군 지휘관들이 인류의 비극을 연기했다. 믿기지 않는 사건들이 실제로 작품 속에서 일어났다. 난 단지 그 사건들을 묘사했을 뿐이다. 믿기지 않는 작품 속의 대화 한마디 한마디는 다 사실이다. 가장 눈에 띄는 허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용문들이다. 영원히 우리 귀에 못이 박힌 이 작품의 괴상한 문장들은 삶의 노래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이야기가 작중인물로 거듭나고, 작중인물이 이야기로 소멸된다는 점이다. 또 입 달린 줄거리가 독백을 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데, 작품 중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과 군 지휘관들은 멀쩡하게 두 다리를 가졌다”(p.7)고 했다.

 

 


 

<인류의 최후의 날들>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간에 “이 비극은 분명 책 속에 담긴 침묵을 지지하기 위해 쓰인 게 아니다”라고 평한 팀스의 말에 반박하긴 힘들 것이다. 정말 굉장한 연극의 역량을 보여준 작품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마 어쩌면 “발굴되지 않은 20세기의 연극의 걸작”일 수도 있다.


1927년 12월 9일, 크라우스는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새는 자신의 둥지를 더럽힌다”란 주제로 강연할 때 “단언컨대 전쟁 때 자신이 지닌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전쟁 중인 자국에 맞서지 않은 모든 지식인은 반인류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단언컨대, 전쟁이 끝나면 전쟁 예찬론자와 전쟁에 참전한 자국을 찬양하던 아첨꾼들은 으레 적국을 찾아가 유혈사태에 기여하는 글을 썼던 자신의 더러운 손을 적국 국민들에게 내민다. 이러한 형세 변화는 전쟁 예찬론자와 아첨꾼이 전쟁 때 자신이 저지른 숨기고 싶은 행위보다 훨씬 더 수치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변화를 틈타 이들이 국민과 친해지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자국민에게 진실을 말하는 용기 있는 사람을 상대로 각국의 어리석은 이들이 늘 사용하는 논지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 바 있다.(3)


크라우스가 전쟁 기간 동안 자신의 의무처럼 자국민에게 털어 놓은 진실의 종류를 감안하면, 그가 운영하던 문학·정치 평론지 <디 파켈(Die Fackel)>에 기고한 특정 기사가 단순 검열을 당한 것 이외에, 엄격한 탄압 조치를 별달리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소 의외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오스트리아와 동맹국 독일을 신랄하고 가혹하게 풍자한 크라우스에 비해 훨씬 조심스럽고 온건하게 자국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1918년 영국 사법당국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분쟁 초기부터, 군인들은 증오 유발로 이어진 군사화 과정이 증오가 종식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전쟁 이후에 집으로 돌아온 병사들은 쟁취하지 못한 승리를 찾아 전쟁터로 다시 떠났다. 이들은 또 필요에 따라 민간인을 대상으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국 내의 모든 적을 대상으로 한층 더 끔찍한 새로운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1915년 크라우스는 “어쨌든 집으로 돌아온 병사는 쉽게 민간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후방의 해안 지역이나 항구 도시에서 돌파구를 찾았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전쟁만 하던 이전과 달리 승승장구할 것이다. 전쟁은 사슬에서 풀려 날뛰는 평화와 달리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할 것이다”라고 예고했다.(4)


크라우스처럼 극단적으로 세계 1차 대전의 참상을 규탄하는 글을 쓴 작가는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쟁 초기부터 이미 사람들이 “포스트 전쟁(Post-war)”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위험과 1914~1918년 사이에 자행된 참상을 덮기 위해 “거짓 애국심”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감지한 드문 사람 중 한 명이다. 거짓 애국심은 또한 세계 2차 대전의 참상을 보지 못하게 사람들의 눈에 안대와 의도적인 무지의 베일을 씌우는 데도 동원되었다.





 
 

<인류 최후의 날들>은 사람들이 예언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담고 있다. 팀스는 “크라우스가 1915년 미발표된 수첩에 ‘독일은 강제수용소이다’고 썼는데, 이는 앞날에 대한 걱정스러운 예견이다. 특히 사람들은 이 예견을 <인류 최후의 날들>의 예언 장면과 함께 접하면 앞날에 대한 걱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평했다. 크라우스는 러시아의 포로수용소에서 수년을 보낸 뒤 풀려나 오스트리아 군대에 재배치되었던 노병들이 음주와 불복종죄로 처형된 세르비아 크라구예바츠 대학살 사건의 끔찍한 장면을 작품에서 재연한다. 크라우스가 <인류 최후의 날들>에서 여러 차례 크라구예바츠 에피소드를 다룬 것은 그만큼 이 사건이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군사독재의 희생자들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저서 <리처드 3세>에서처럼 유령으로 등장해 자신을 죽인 살인자들을 괴롭히는 5막의 마지막 장면이 그러하다.


예를 들면, “크라구예바츠의 공동묘지이다. 2열 횡대로 늘어선 22개의 무덤이 열린다. 전선에서 돌아온 44명의 병사가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이들은 각종 무공 훈장으로 치장되어 있다. 총살형을 집행하는 보스니아인들이 이들 바로 곁에서 형을 집행한다. 총을 겨눈 이들의 손이 떨린다. 첫 번째 열이 고통으로 땅바닥에 나뒹굴었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다. 보스니아인들이 그들의 머리에 다시 총대를 겨눈다. 같은 시각 장교 식당에선 군사법원의 수석 재판관이 한잔 한다. 그는 자신의 혼령을 앞에 둔 채 건배를 하며 말했다. 여보게, 난 300명을 처형할 수도 있었네. 과음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지. 난 이들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이들을 총살한 것일세”(p.691)라고 말한다. 이전 장면에선 군 사령관은 “내 좌우명은 단지 적군만을 상대로 싸우는 게 아니라, 아군끼리도 서로 싸우는 게 전쟁이다!”(p.678)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드러난 대부분의 참상의 기원을 크라우스가 이른바 “박해는 무죄다(verfolgende Unschuld)”란 이론 혹은 정신이라 칭하는 군사적 선동의 토대가 되는 원칙 중 하나에서 찾는다. 전범들은 매번 자신을 무고한 어린양처럼 소개하는 특별한 재능을 지녔다. 이들은 심지어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고도 본인들은 나쁜 늑대, 즉 외국 늑대나 또는 아주 사악한 방식으로 은밀하게 몸을 숨기고 있는 자국 늑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한 죄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크라우스는 추후 나치 선전의 중요한 수단이 된 이 같은 이론이 이미 세계 1차 대전의 여러 측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했다. 예컨대 당시에도 사람들은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우리는 적을 격퇴시켰을 뿐이다.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상대방(적군)이 잘못한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상대방이 그랬다며 정작 본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라 비난했다”고 지적했다.(5)

 


 

크라우스는 <인류 최후의 날들>에서 병사들이 위에서 군사령관이 언급한 것처럼 “서로 싸우는” 방식에 주목했다. 이들의 지휘관들은 자신의 부하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이를테면 일부 지휘관들은 적군, 특히 적군 포로들을 상대로 저지른 비인간적인 만행을 종종 자신의 부하들을 상대로도 거의 똑같이 저질렀다. 주인공 뇌르글러가 특별히 참을 수 없어 하는 대목도 이처럼 자신의 얼굴에 먹칠한 정부가 자기 마음대로 혹독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복종만 강요한 게 아니라 존중까지 요구한 점이었다. 물론 아랫사람들은 이를 거부할 힘도 없었다.


수천 명의 생살여탈권을 쥔 군 지휘관이 이들에게 영웅의 길과 희생의 길을 가도록 강요하고 자신들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간혹 하찮은 실수만 저질러도, 이들을 총살형이나 교수형에 처한 행위는 반인류적인 범죄로 봐야 하지 않을까? 뇌르글러는 “통수권을 쥔 오스트리아의 군주 프레드릭 대공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교수대를 1만1,400개(혹자는 3만6천 개라고 주장)나 설치했다는 것을 상상해봐라. 그는 단지 총살 명령 때 쓰는 숫자, 즉 셋까지밖에 세지 못했다! 대공은 나폴레옹을 패배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공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야만인들의 카이저, 즉 가증스러운 독일 황제와 동맹을 맺은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소시지 정신 시대(도륙의 시대)의 독일황제와 군사적으로나 문란한 사생활 면에서 유사했다. 그는 소시지의 고기와 피를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그는 우선 천둥 같은 늑대 울음소리를 내며 소시지 허벅지부터 먹어치웠다. 펜리르(Fenris, 큰 이리의 모양을 한 괴물-대공)는 세계 전쟁이 발발하자 웃었다”(p.477)고 말했다.


뇌르글러가 수백만 명의 희생자들을 양산한 책임자들, 즉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채 법망을 피해 웃으며 살고 있는 살인마들에 대한 자신의 고통과 회한을 설명하는 대목에 눈에 띄는 대사가 있다. “사실, 신의 섭리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면, 신의 섭리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런데 왜 신은 우리를 전쟁에 눈이 멀게 한단 말인가! 여기저기 떠돌며 더듬거리면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불구자, 절름발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거지, 머리가 하얗게 쇤 어린아이, 공습을 떠올리며 넋이 나간 어머니, 죽음의 공포에 멍한 시선을 하고 있는 영웅 아들 등, 이들 모두는 낮 생활도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하는 파괴된 피조물의 잔해들이다. 여기 웃으면서 신의 섭리에 감히 도전한 사람들이 있다. 신은 너무 멀리 있어 자신들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영혼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이들의 영혼은 본인이 저지른 일, 알았던 일, 참았던 일 때문에 상처를 받는 법이 없다. 이들의 영혼은 인류란 단어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 우스꽝스러운 참상은 그만 이야기합시다! 이 피의 웅덩이 앞에서 절대지존, 오스트리아의 얼굴인 대공의 이야기도 그만둡시다!”(p.620)


우리는 특별히 전쟁을 찬양하던 기간인 전쟁 초기에 주목해야 한다. 크라우스는 주요 재난 책임자들이 전쟁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삭제했다는 데 격분했다. 이들은 전쟁을 영웅시하고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크라우스는 전쟁의 추억을 기념하는 산업과 시장이 주로 전쟁에 대한 망각을 부추기는 조직처럼 가동되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전쟁과 대량학살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망각이 자행되었다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조직적인 전쟁 은폐가 적어도 단기간에 수백만 명을 다시 죽음으로 내몬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풍자가의 반응이 쉽게 이해가는 것은, 전쟁이 종식되자마자 거의 즉시 이른바 “전쟁 유적지 관광”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활동이 등장해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관광연맹 건물에서 만난 연맹 책임자에게 “본론부터 얘기해 보자. 전쟁 이후에 우리가 폐허가 된 유적지 대신에 외국 관광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무엇이냐?”라고 묻자, 담당자는 “우리는 영웅들의 무덤과 군 묘지에 외국 추모객이 몰리길 희망한다. 이는 우리나라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언론의 공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각 시대에 맞는 관광 상품으로 수익을 올려야하는 게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는 전사자의 무덤이 관광 회복의 희망처럼 보인다”(p.578)라고 거리낌 없이 답변했다.


크라우스가 <디 파켈>과 <인류 최후의 날들>에서 다소 의례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한 문장들 중에는 “일반화시키지 말아야 한다”란 슬로건처럼 자주 등장하는 문장은 거의 없다. 이 슬로건은 종종 몸을 숨기고 싶어 하는 죄인들의 병풍이 되어준다. 죄인들은 이번엔 도둑질을 했지만 다른 도둑질은 하지 않았다며 본인들의 죄를 잊게 하려 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둑질을 절대 하지 않는다. 크라우스는 사람들이 일반화를 할 권리 혹은 심지어 일반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는 논리에 반대한다. 더 정확히 말해, 크라우스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실수이고, 당사자가 이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인간성에 타격을 입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일반화”는 안 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크라우스는 이런 일반화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 자들이 계속해서 도덕적이고 정직한 대다수의 지도자들처럼 행세하는 것을 저지할 길이 전혀 없다고 지적한다. 과도한 일반화를 시도하는 자들은 바로 검증된 타인의 덕성과 정직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십분 이용하려는 자들인 셈이다.


뇌르글러는 전쟁 중에 나타나는 환상 중 최악의 환상은 자신의 덕성이 되살아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의 담론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온갖 방법으로 문명의 부흥을 전한다. 사실, 전쟁은 착한 사람들을 더 착하게 만들 능력은 없고, 악한 사람들만 더 악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뇌르글러는 “인류는 전쟁을 일으켜봐야 이득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가령 집안에 방화사건이 일어나면, 집안에 있던 두 명의 정직한 사람은 불길 속에 있는 무고한 다른 10명을 구할 채비를 한다. 반면에 88명의 부도덕한 사람들은 이 틈을 타 소방관과 경찰의 착한 인간의 본성을 칭찬하며 이들의 업무에 먹칠하는 비열한 짓을 한다”(p.132)고 주장한다.

 

 

유혈 사태는 인쇄 잉크의 봇물로 이어졌고, 이후 피의 봇물로 이어졌다. 세계 1차 대전은 인류가 거의 제재 받지 않고 만들어낸 최고의 파괴 무기를 비롯해 통신과 선전을 크게 의심하지 않고, 뜻밖의 상황 속에서 동시에 시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15년 3월 오스트리아와 독일 연합군 사령관은 폴란드 서부 갈리시아의 거점인 프세미시우 요새를 러시아에게 빼앗겼다가 한 달 뒤 탈환한 후, 전선의 상황을 전하는 종군기자에게 전화상으로 “요새의 가치와 중요성은 그게 우리 손에 있느냐 혹은 적의 손에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완전 딴판이다”란 말로 전쟁에 대한 자신의 근본 철학을 전했다. “뭐라고, 자네 또 까맣게 잊었나? 아, 기자들이란…. 내 말 잘 새겨듣게. 우선 중요한 것은 이 요새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은 잊힌다는 것이고.”(사령관), “이 요새는 우리가 잊지 못할 옛적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자존심 아닙니까?”(기자), “뭐라고? 무엇을 잊지 못해? 별 소리 다하는 군. 잘 듣게, 어쨌건 간에 이 요새는 쇠 쪼가리에 불과한 무용지물일세.”(사령관), “예? 최신식 포병 요새가요?”(기자), “말했잖아, 쇠 쪼가리에 불과하다고, 알겠나?”(사령관)(p.143)


사람들은 언론도 부당함을 일반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그러나 크라우스는 언론 시스템은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을 왜곡시키는 게 아니라 나약한 사람을 쉽게 부도덕한 사람으로 둔갑시키는 능력을 발휘한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일부 기관들은 수시로 일반인들이 도둑놈 심보를 드러내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이다. 풍자가 크라우스는 개인보다는 바로 이러한 기관들을 악당이라 칭하며 이들의 파렴치함을 규탄한다.


뇌르글러는 “악은 이상(理想)이란 기치 아래서 더 번성한다”(p.165)고 했다. 높은 이상은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대학은 터무니없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이상마저도 옹호했다. 크라우스는 독일이 특히 적의 만행의 희생자처럼 행동할 처지가 못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독일은 미련하고 사기근성이 다분한 기자, 문인, 대학교수, 외국인의 피로 보상을 받는 용병 등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 동안 적의 비인간적인 행동을 규탄하던 독일이 의무실을 비롯한 성당과 학교 교실을 폭격하고 어뢰로 병원선을 공격하면 이에 환호했고, 인간 사냥꾼에 받치는 존경의 글도 썼다. 심지어 이들은 같은 페이지에 적을 규탄하는 글과 독일을 찬양하는 글을 동시에 쓰기도 했다.”(6) 크라우스는 자신이 챙기지 못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느낀 것이지 독일의 지성과 다른 국가의 지성, 즉 최고의 시인부터 최악의 리포터까지, 최고의 국제법 교수부터 최악의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유혈사태에서 이득을 챙긴 지식층을 편든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기는 하지만 크라우스는 관련 국가의 군부나 정부가 기자들만큼 황당한 면책특권을 누린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전쟁 기간 내내 열광적으로 국수주의의 기조를 유지하고 끔찍한 전쟁의 현실에 대해 거짓말로 일관하며 전쟁 히스테리를 부렸던 언론의 전사들(기자들)은 가끔 군부나 정치인을 위협한다고 해서 자신들이 곤경에 빠지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과거 무슨 행동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언론은 당연히 모든 전쟁의 기억을 지우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크라우스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세계 전쟁을 발발시키는 데 현격한 공을 세운 모든 종이 신문은 사법적인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신문들은 그 어떤 사죄는 고사하고 심지어 궁색한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신문은 이러한 조직적인 거부 움직임을 통해 결국 전쟁과 전쟁 동기 그리고 전쟁 결과의 현실로부터 벗어났다. 이후 신문은 또 다시 히틀러 정권의 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함으로써, 세계 1차 대전 종식 이후 단지 20여 년 만에 새로운 재난(세계 2차 대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크라우스는 대다수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민과 달리 전쟁과 적대행위에 대한 실제 책임이 이들 두 국가에 있다는 것을 결코 의심해본 적이 없다. 크라우스는 <디 파켈>(7)에 게재한 전쟁과 패망한 오스트리아에 대한 일종의 비문에서 자국의 세르비아 공격과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을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전쟁이 종식되었을 때 크라우스는 전쟁을 원하고, 전쟁을 야기시켰던 정치지도자와 군 지휘관은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처벌받기를 원했다. 이는 크라우스가 국가 간 분쟁을 중재하는 국제연맹과 규율을 어긴 사람들을 재판하거나 이들 간 다툼의 평화적인 해결을 가능케 하는 국제 사법재판소의 출범을 예고한 칸트의 <영구평화론(Vers la paix perpétuelle)>을 읽은 영향이 컸다.


크라우스는 승자에 의해 강요되는 불공정하고 불안한 평화는 결국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당함에 대한 경험이 더 큰 부당함을 저지르게 하는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크라우스가 적군을 옹호했다는 사람들의 비난과 달리, 그는 결코 적군이 잘했다거나, 적군은 잘못이 없다는 말을 결코 한 적이 없다. 그는 “나는 전쟁 중에 ‘모든 영광과 모든 권리는 적군의 것이다’라는 글을 쓴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아군 쪽의 참혹한 불행과 불의를 알리고 고백하는 글, 즉 도덕적 계명을 쓴 적은 있다. 만약 적진에서도 이 같은 의무를 완수한다면, 우리는 인류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의무는 평화가 찾아와도 완수되지 않는다. 적은 상대가 자신에게 가한 것을 잊어야 하고, 자신이 상대방에게 가한 행위는 절대 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적군과 아군 둘 다 이런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했다.(8)


크라우스는 만약 우리가 전쟁을 피하고 싶다면, 전쟁 동기를 확실히 알고 전쟁의 결과를 적군의 악행 탓으로 돌리는 데 만족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물론 이는 전쟁이 적군의 승리로 끝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글‧자크 부브레스제라르 Jacques Bouveresse

철학자로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 명예교수

번역‧조은섭 chosub@hanmail.net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Jean-Louis Besson와 Henri Christophe가 독일어에서 불어로 공동 번역한 Karl Kraus의 <인류 최후의 날들>, Agone, Marseille, 2005년. 별도의 언급이 없으면 이 글에 쓰인 모든 인용문은 이 책에서 인용된 것임

(2) Edward Timms, <Karl Kraus Apocalyptic Satirist, Culture and Catastrophe in Habsburg Vienna>,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et Londres, 1986년

(3) Karl Kraus, ‘새는 자신의 둥지를 더럽힌다’는 <인류 최후의 날들> 서문에 다시 쓰였다. Agone, 2003년

(4) ‘Nachts’, <Die Fackel>, n° 406-412, lieu, 1915년 10월

(5) Pierre Deshusses가 독일어에서 불어로 번역한 Karl Kraus의 <왈푸르기스의 세 번째 밤>, Agone, 2005년

(6) ‘Die Sintflut’, <Die Fackel>, n° 499-500, 1918년 11월 1일

(7) ‘Nachruf’, <Die Fackel>, n° 501-507, 1919년 1월 25일

(8) <Die Fackel>, n° 508-513, 1919년 4월 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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