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노동4>, 2013- 한효정 |
2013년 가을 우리나라 인문학계는 지젝과 바디우의 방한으로 뜨거웠다. 이러한 현상 자체는 물론 환영할 만한 일이다. 철학이라는 죽어가는 불씨를 다시 일으킨 놀라운 현상이다. 지젝의 인기가 가장 좋은 나라는 단연 우리나라일 것이다. 지젝은 이미 약 10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특히 인문, 예술, 영화분야의 연구자와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 중 하나로 각광 받아왔으며, 얼마 전부터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급진적 좌파이론가, 공산주의자로 우리나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해왔다. 그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라는 놀라운 수식어를 동반한 평가를 받고 있는 철학자이다.
하지만 지젝이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조금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지젝 이론의 의미에 대해 평가해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유명한 외국 철학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겠는가? 사실 필자를 포함해 여러 이론가들이 종종 지젝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해왔지만 ‘지젝의 인기에 눌려’ 그 비판의 내용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비교적 잘 알려진 촘스키의 지젝 비판을 예로 들어보자. 그의 지젝 비판의 요지는, 지젝의 이론이 한 마디로 너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이론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means nothing)”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필자는 촘스키의 지젝 비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지젝이 앞뒤가 맞지 않는 이론가가 되었는지 촘스키가 제시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촘스키는 지젝이 그렇게 된 것이 프랑스 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필자는 지젝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공산주의라는 틀에 맞추어서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론적,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철학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젝은 ‘라캉주의자’가 아니다
촘스키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촘스키가 여기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프랑스 철학자는 공교롭게도 지젝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라캉이다. 실제로 촘스키는 라캉을 만난 적이 있다. 라캉이 미국 대학을 방문해 강연했을 때이다. 그때 라캉은 네 개의 고리를 가진 보로매우스 매듭을 가지고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과 그의 심리구조를 분석하는 강연을 했는데 아마도 촘스키는 라캉의 강연의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촘스키가 지젝이 프랑스 철학(특히 라캉)의 영향을 받아서 무의미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이론을 전개한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에피소드와 무관하지 않다. 촘스키와 지젝의 ‘설전’의 배후에 라캉이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필자는 라캉의 조이스 분석은 논리적으로 매우 치밀하고 정합적이라고 생각한다.(1) 뛰어난 조이스 전문가들조차도 라캉의 조이스 해석을 대단히 창조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필자가 촘스키의 지젝 비판은 옳지만 그 비판의 이유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지젝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멘토인 라캉을 제대로 이해했는가? 지면이 많지 않으므로 단적으로 말하자. 많은 사람들이 지젝은 라캉주의자이며, 더 나아가 라캉 정신분석을 바탕으로 헤겔, 유대-기독교 전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종합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필자는 지젝이 ‘궁극적으로’ 라캉주의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방금 언급한 다양한 사상을 종합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라는 주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젝은 라캉, 헤겔, 유대-기독교 전통 등을 자신의 논의에 끌어들였지만, 지젝의 이러한 사상 원용 방식은 지극히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것들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폭력적 혁명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고자 노력한 사상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젝은 자신이 이론의 근거로 삼는 다양한 사상적 유산들을 공산주의라는 ‘내용 없는 기표’를 중심으로 짜 맞추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위선적인 이데올로기의 환상
지젝이 라캉이나 헤겔, 혹은 그밖의 다른 이론이나 문화 이해에 공헌한 부분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지젝이 라캉 혹은 헤겔, 혹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이해에 기여한 ‘독창적인’ 부분은 매우 적으며, 상당 부분은 이미 라캉 혹은 프로이트 연구자, 헤겔 연구자, 기독교 신학자들이 제시한 내용들을 ‘필요에 따라’, 즉 마르크스-레닌적 혁명 이데올로기의 전파를 위해 ‘취사선택적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매우 핵심적인 문제는 그가 진정한 레닌주의자인지도 또한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편의주의적으로’ 기존의 연구들을, 심지어 공산주의 이론조차 적절히 짜깁기하는 혼합주의자, 에피고네(Epigone)에 불과하다. 그가 ‘위선적인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 제시하는 실천적 대안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공산주의는 결코 위험하지 않다. 다만 공허할 뿐이다.
지젝에 대한 필자의 비판의 논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방금 언급했듯이 철학자로서 지젝은 다양한 사상사의 흐름들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편의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철학자로서의 지젝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 이러한 점을 조목조목 언급해야 하겠지만(2) 여기에서 이를 종합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여기에서는 두 번째 논점, 즉 지젝이 바디우와 함께 던지는 공산주의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비판의 핵심적인 내용은, 지젝이 공산주의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실제적 내용이 없는 구호에 불과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위선’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실천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좀더 단적으로 말하면, 그는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가운데, 이것의 유일한 대안은 공산주의 밖에 없다는 공허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계속해서 재생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분법은 항상 위험한 것이지만, 특히 정치의 분야에서 이데올로기적 이분법은 ‘자본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다’라는 모습으로 우리의 정치적 사유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서 진정한 위험은 공산주의라는 환상이 우리의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의 폭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에 있다. 여기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다. 지젝을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레닌을 따라 사회민주주의를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이고, 공산주의의 반대는 신자유주의라는 무의미한 이분법만을 제시할 뿐 서민을 위한, 진정한 진보정치를 위한 공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공산주의와 이론적으로 단절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지젝의 최근 책을 먼저 접한 독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지젝이 처음부터 공산주의를 표방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영어로 발표한 최초의 저서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에서 (자유주의는 물론)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자유주의도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도 아닌 진보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지젝은 자신이 주장하는 급진적인 민주주의의 구체적 모습이 무엇인지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라캉과 헤겔 이론을 깊이 있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라캉과 헤겔의 이론을 사실상 자유주의적 이론, 그것도 사회순응적 혹은 패배주의적 이론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잘못 해석한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젝은 “무의미한 야생적 현실을 우리 자신의 작품으로 떠맡고 인정하게 하는 ‘공허한 제스처’”가 다름 아닌 라캉(그리고 헤겔) 이론이라고 말이다.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억압적 현실을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무의미한’ 논제로, 패배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결론으로 자신의 최초의 책을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지젝은 여러 진보적인 학자들의 비판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보다 진보적인 이론을 모색하는 가운데 라캉과 헤겔의 이론을 다시 해석하고자 시도하는데, 바로 이때 그가 처음에는 거부했던 공산주의 이론을 다시 받아들인다. 이러한 변화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의 2판 서문에서 서서히 시작된다. 그 이후 지젝은 본격적으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전향(혹은 복귀)하는 ‘손쉬운 해결책’을 취한다. 마르크스-레닌을 이야기하면 왠지 진보적이라는 아우라가 생기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 지젝이 걸어간 길이다.
그리하여 지젝은 레닌에 관한 책을 저술하고 거기에서 레닌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의 <지젝이 만난 레닌>과 같은 책을 읽으면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젝은 그 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책의 말미에 매우 모호한 말을 덧붙인다. 문자 그대로의 레닌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레닌주의자인가 그렇지 않은가? 바로 여기에서도 지젝 이론의 모호함이 생겨난다. 지젝의 공산주의는 어떤 공산주의인가? 지젝은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분명하게 명명하지만 그의 공산주의의 내용은 모호함 그 자체라는 것이다.
지젝은 탁월한 ‘전략가’였다
이러한 지젝의 입장은 지젝 수용자들에게 동상이몽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이들에게는 지젝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여서 좋고, 어떤 이들은 그가 레닌을 인용하지만 레닌주의자가 아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지젝이 폭력혁명을 지지해서 좋고, 어떤 이들은 그가 말하는 폭력혁명은 진짜 폭력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폭력이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뿐이며 그러한 속시원한 은유가 제공하는 카타르시스의 느낌이 좋아서 지젝을 좋아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저서 <폭력이란 무엇인가>는 혁명을 위한 폭력적 행위를 진지하게 옹호하기 위해서 쓴 책이다. 예컨대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바로 이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이다. 십수 년 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일어난 사태를 상기해보자. 빈민가의 군중들이 도심의 부유층의 거리로 가서 슈퍼마켓을 마구 약탈하고 방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적 폭력이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죄를 벌주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메뚜기떼 같았다.”
하지만 지젝은 필요할 때에는, 즉 신문 기고문과 같은 진정한 대중적인 글에서는 마치 자신이 ‘합리적인’ 공산주의자라도 되는 것 같은 인상을 남긴다. 거기에서는 ‘위험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그는 이론적인 책과, 대중강연 혹은 신문이나 잡지 기고문의 내용을 잘 구분해서 쓸 줄 아는 ‘전략가’이기도 한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10월호에 실린 글을 봐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지젝이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건국대학교에서 행한 강연에서, 어떤 외국인 청중이 폭력 문제에 대해 질문하자 지젝은 비폭력주의자 간디에 대해서만 언급함으로써 폭력의 문제를 슬쩍 비켜갔다. 그래서 지젝의 강의를 들은 많은 청중들은 지젝은 마르크스-레닌과 달리 비폭력주의자라는 인상을 갖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지젝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기도 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니기도 한, ‘전능하며’, 그래서 ‘위험한’ 공산주의자로 대중적으로, 그리고 문화산업적으로 소비된다. 그리하여 지젝은 위험한 철학자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그리고 결코 위험하지 않은 철학자로 다시 한 번 각광받게 된다.
민중의 삶 소외시키는 지식인의 오만
이렇듯 지젝은 의도적으로 개념들을 모호하게 사용할 줄 아는 ‘뛰어난 대중심리학자’다. 이러한 모호함은 이택광의 글에서도 드러난다. 예컨대 역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10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이택광은 “레닌이 실천하고자 했던 공산주의가 실질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지젝의 공산주의를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공산주의의 이념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요지이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공산주의 이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과거에) 실패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미래에) 성공시키기 위해서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물론 이택광은 공산주의 이념과 이론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게 지젝의 이야기라고 계속 이야기하지만, 도대체 지젝이 이야기하는 공산주의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택광 자신이 지젝의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공산주의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공산주의라는 내용 없는 공허한 기표만 계속 등장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는 문제라는 말만 반복할 뿐 공산주의의 구체적 내용은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이택광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다. 또 다른 곳에서 이택광은 사회민주주의는 기껏해야 복지국가 밖에 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기껏해야 복지국가라니! 얼마나 무의미하고 오만한 비판인가. 물론 지젝이 자신의 책 속에서 무수히 반복해 말했듯이 지젝에게도 사회민주주의는 진보를 방해하는 주적이다. 이러한 논리 속에는 공산주의가 되지 않으면 그밖의 다른 실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흑백 논리가 깔려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의 진보적인 지식인, 학생, 연구자들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금기로 삼아왔고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를 진보의 배신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의 현 시점에서는 오히려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이 더 진보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서로 갈등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잘 알려져 있듯이 스웨덴은 가장 모범적인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다. 1930년대 스웨덴의 사민당은 총선을 통해 집권했는데, 그 당시 사민당 지도부는 당 강령에 따라 국유화를 심각히 고려해야만 했다. 그러나 사민당 지도부는 오랜 논쟁을 통해 국유화 혹은 계획경제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체제는 실현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복잡하고 다양한 경제활동 및 국민의 욕구와 취향을 반영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명시적으로 사회민주주의로 전환했다. 만약 그 당시에 스웨덴이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구소련처럼 공산주의 체제를 택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서민을 위한 진정한 구체적인 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스웨덴은 물론 유럽의 여러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에서처럼 공산주의와 이론적, 실천적으로 단절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공산주의라는 공허한 기표만을 외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진보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과정이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처럼 이러한 과정을 분명히 거친 후 우리는 ‘공산주의’라는 기표를 유토피아적 원리, 칸트식으로 말하면 ‘규제적 이념’으로 활용할 수는 있다. 논리는 간단하다. 마르크스에 대한 향수 때문에 공산주의라는 기표를 여전히 사용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사회민주주의를 경유해 공산주의를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동독에는 복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잘 사는 멋진 공산주의 국가에 복지가 왜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정작 동독 국민은 모두가 잘 사는 유토피아인 공산주의 국가에 저항하며, “우리가 민중이다!(Wir sind das Volk!)”라고 외쳤다. 보편적 복지 개념 없는 공산주의 사회, 모두가 잘 사는 멋진 사회라는 것은 지식인과 몽상가의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적나라한 허구이며, 지식인의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 지젝은 스웨덴은 물론 다른 모범적인 사회민주주의 국가조차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암시하는데,(3) 물론 그 비판은 옳다. 완전한 국가가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당연히 비판은 항상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정치적, 경제적, 인구학적 변화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도 거대한 변화과정에 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어떠한 관점에서 비판하는가가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신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 모두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해왔다. 신자유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사람이 살 만한 정치, 경제체제를 만들어낸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데서는 서로 뜻을 같이 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심지어 진보적 자유주의자들도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한다.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비판을 하는 논자도 있다. 국민들이 사회민주주의를 “빨갱이”로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를 통한 복지정책은 반드시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민주의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의 우파와 (구)좌파는 모두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없어지기를 내심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를 싫어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모두 목소리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서민을 위한, 혹은 ‘팔루스를 박탈당한’(라캉) 사람들을 위한 구체적인 복지정책의 발전이 더뎌졌고 OECD 국가 중 복지지출이 꼴찌에 속하는 나라가 되었다.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이 없는 한 정치가가 바뀌는 것은 이제 큰 상관이 없는 시점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필자가 지젝(그리고 바디우)의 방한이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또한 우리가 공산주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 이유이다. 이제 우리는 공산주의에 열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젝이 폄하하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심지어 진보적 자유주의자까지도 모두가 비판하는 사회민주주주의에 대해 종합적으로 토론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움직임이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선적인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은 민주시민과 지식인의 의무다. 오늘날 정치의 과제는, 그리고 향후 진보적 지식인의 과제는 신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가장 현실적으로, 그리고 가장 진보적으로 정치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글·홍준기 독일 브레멘대학교와 파리10대학에서 수학한 후 브레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프로이트 라캉 정신분석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라캉과 현대철학>,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 등이 있다.
(1) 홍준기, ‘조이스의 증상(sinthome):라캉의 정신병 임상과 조이스 증상의 윤리성’, 〈라캉과 현대정신분석〉(2013년 8월) 참조. (2) 예컨대 지젝의 라캉 수용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로는 홍준기, ‘욕망과 충동, 안티고네와 시뉴에 대한 라캉의 견해:슬로베니아 학파의 라캉 해석에 관한 비판적 고찰’, 〈시대와 철학〉(2009년 6월) 참조. (3) 하지만 지젝은 훌륭한 정치의 한 예로 오바마의 의료개혁을 든다. 누가 이 말에 반대하겠는가? 오바마의 개혁은 미국인이 그것에 어떤 명칭을 부여하는지에 상관없이 매우 사회민주주의적인 발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 지젝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젝의 다른 글을 접하지 않고 이 글만 읽은 사람들은 지젝이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착각한다(필자는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보았다).
이 글은 지난 10~11월, 본지에 게재된 슬라보예 지젝과 이택광 교수의 글에 대한 홍준기 박사의 반론입니다. 본지는 또한 홍준기 박사의 글에 대한 또다른 반론이 있을 경우, 이에 대한 지면을 할애할 것입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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