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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빛 바랜 보편주의

by 내오랜꿈 2014.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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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빛 바랜 보편주의


출처:르몽드 디플로마티크[68호] 

일시:2014년 04월 28일 (월)

비벡 치버 Vivek Chibber / <뉴욕대 사회학과 객원교수>



 
 

수많은 나라를 산업개발 도상에 내 던짐으로써, 탈식민주의는 엄청나게 많은 프롤레타리아를 양산해 냈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투쟁의 힘이 분산되었다. 몇몇 급진주의 지식인들은, 서구의 대장간에서 만들어진 계급이나 자본주의 개념들을 서구 아닌 다른 사회에 적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들은 남반부의 주민들이 우선적으로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엄청난 논쟁을 일으킨 저서를 통해 비벡 치버가 급진주의 지식인들에게 이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겨울이 지난 후,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세계적인 저항이 회귀하고 있음을, 적어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세계적인 저항이 회귀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이런 유형의 운동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강력하게 솟아난지가 40년이 넘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세상 이곳저곳에서 시장 규칙의 가혹한 확산에 반기를 든 자잘한 저항사건들과 간헐적인 동요가 발생했었다. 그런데 2010년부터 우리는 유럽, 근동, 아메리카 대륙에서 전대미문의 저항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저항의 분출은 동시에 지난 30년간 사회주의 운동의 후퇴에 의해 야기된 커다란 피해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들이 엄청나게 빈약해졌고, 노동조합과 정당 같은 좌파의 조직들이 사실상 공동화되어 버렸다.


그리고 좌파의 빈약함은 단지 정치적이나 조직적인 측면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그만큼의 빈약성이 확인되고 있다. 좌파이론은 사실상 지적으로 엄청난 집중포화를 받으면서 허허벌판에서 연속적으로 패배를 당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미국의 수많은 대학에서 진보적 혹은 급진적 지성인들이 계속해서 강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변화 사상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변한 것은 정치적 급진사회주의의 의미 자체다. 후기구조주의*(별표들은 용어사전 참조)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전통의 기본 개념들이 의심받고 있고, 심지어 위험한 개념들이 되어버렸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겠다. 자본주의가 각 개인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실질적인 강압구조를 내포하고 있고, 사회 계급의 개념이 매우 명백한 착취 관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노동계가 공동체 조직 형태를 모방하는 데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기본 개념들과 2세기 동안 좌파에게 명백하게 여겨졌던 수많은 분석들이 오늘날 아주 낡아빠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후기구조주의학파에 의해 시작된 유물론 및 정치경제학에 대한 거부는 최근 흐름에서 하나의 법이 돼버린다. 이런 거부는 오늘날 학계에서 탈식민주의 연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지난 20년 동안 좌파의 개념적 유산을 공격하는 진영이 바뀌었다. 다시 말해 프랑스의 철학적 전통을 남아시아와 ‘남반부’ 출신의 수많은 비서구 이론가들이 빼앗아가 버렸다.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혹은 가장 눈에 띄는 사람들) 중에는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 호미 바바(Homi Bhabha), 라나지트 구하(Ranajit Guha), 인도의 서벌턴 연구 그룹(subaltern studies, 하층민 연구*)과 더불어 콜롬비아 출신 인류학자 아르투로 에스코바르(Arturo Escobar), 페루 출신 사회학자 아니발 키하노(Anibal Quijano), 아르헨티나 출신 월터 미뇰로(Walter Mignolo)가 포함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계몽주의 시대의 전통을 거부하는 데, 그 이유는 계몽주의 전통이 지역 문화 및 그 특수성과 무관하게 몇몇 범주들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보편주의를 옹호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데, 그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런 지적(知的) 무분별의 조숙한 형태를 허용하고 있다고 이들이 의심하기 때문이다.


 보편주의를 거부한 탈식민주의 연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 자본주의, 착취의 개념들이 모든 문화와 모든 장소에 타당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런 개념들이 사회관계를 포착하는데 있어서, 기독교의 유럽 뿐만 아니라 힌두교의 인도, 이슬람의 이집트에서도 적절히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반면 탈식민주의 이론 지지자들은 이런 개념 범주들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할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분석틀로 제시된 이 개념 범주들이 잘못 설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개념 범주들이, 정치 주체들의 자유와 창조성을 거부하기 때문에, 정치 주체들로부터 행동에 절대 불가결한 지적 자원들을 박탈해 가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마르크시즘이 지역의 특수성들을 유럽의 토양에서 만들어진 경직된 굴레 속에 가두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탈식민주의 이론은 단지 계몽주의 전통을 비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전통을 대신하려고 한다. 저명한 탈식민주의 저서중 한 권은 “보편주의에 대한 가정은 식민 권력의 초석들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인간성과 연관된 ‘보편주의적’ 특성들을 소유한 사람들이 사실상 지배자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준다. 보편주의(보편자를 개별자보다 상위에 두고, 개별자는 보편자와의 관계에서만 그 존재이유와 의의를 가진다고 하는 입장-편주)는, 유럽에서 통용되는 특수한 자질들이 인류 전체에 대해서도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지배를 공고화할 것이다. 이런 처방들에 맞지 않는 문화들은 필연적으로 열등한 지위를 갖게 되고, 지배자들을 암묵적인 지도자로 받아들이게 하고, 스스로를 지배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탈식민주의 저서의 저자들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편성의 신화는 ‘유럽’이 ‘보편성’을 의미한다는 기본 가정을 당연시 여기는 제국주의 전략의 한 구성물이다.”(1) 이 논거는 탈식민주의 사상의 핵심에 있는 두 가지 관점을 조합한 것이다.


첫 번째 관점은, 형식적인 측면에 속하는 것으로, 보편주의가 사회의 이질성을 무시하고 ‘규정에 맞지 않다’고 판단된 실천이나 관습을 주변부화 한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주변부화 한다는 것은 바로 지배를 행사하는 것이다. 더 본질적인 두 번째 관점은 보편주의가 유럽의 헤게모니 획득 과정의 중요 수단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상계가 주로 서구에서 만들어진 이론들을 중심으로 조직되기 때문에, 이런 사상들이 정치 활동에 양분을 제공하는 이론들과 지적 성찰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탈식민주의 이론은 이런 사상들의 집요함과 그 효과들을 명백히 밝히면서 그 유전적 결함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탈식민주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와 좌파의 사상에 연관된 ‘거대 서사’를 적대시하는 것이다.


탈식민주의 사상은 파편, 주변부, 지정학적 혹은 문화적 특수성에 뿌리를 둔 실천과 규범에 역점을 두는 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총체적 분석들을 회피하게 돼버린다. 현재는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가 지역의 ‘이질성과 약분 불가능성’이라 부른 개념 속에서 정치적 활동 수단들을 찾고 있다.(2)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로부터 생겨난 정치적 전통은 두 가지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첫 번째 전제는,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자본주의가 자신의 그물망에 걸리는 모든 이들에게 자본주의의 제약들을 강요한다는 점을 가정한다. 아시아든 라틴 아메리카든 아프리카든, 자본주의가 정착되는 곳은 어디든지 그 생산 과정이 똑같은 규칙들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경제 발전 양상들과 성장 리듬이 다르다 해도, 그것들이 자본주의 내부의 깊숙한 구조들 안에 기재된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전제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논리와 지배를 강요함에 따라, 이르든 늦든 간에 노동자들의 저항을 유발시킨다는 점을 당연한 사실로 간주한다. 자본주의의 포식에 대해, 종교적 혹은 문화적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저항 운동이 이 두 명의 독일 이론가들이 옳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지역의 ‘약분 불가능성들’이 아주 이질적이고 엄청나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기본 욕구를 공략한다.결과적으로 자본주의가 촉발시키는 반항이란 것들은 자본주의의 재생산 법칙만큼이나 거의 차이가 없다. 저항의 양태들을 장소에 따라 바꾸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저항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동기 역시 각 개인의 행복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보편적인 것이다.


  마르크시즘을 유죄판결한 탈식민주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 두 가지 전제는 한 세기 이상 분석과 혁명적 실천의 디딤돌로 사용되었다. 이들의 뻔뻔스런 보편주의 사상을 참을 수 없었던 탈식민주의 이론이 이들을 통째로 유죄판결하자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급진적 비판자들의 이론적 도구 세트에서 반자본주의를 제거한다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만약 우리가 경제의 운행을 결정하는 냉혹한 이윤추구 경쟁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2007년부터 전 세계를 휩쓴 위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긴축정책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만약 우리가 카이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뉴욕 혹은 마드리드에서 표명된 보편적 관심사들을 보길 거부한다면, 이런 도시들에서 똑같은 슬로건을 울려 퍼지게 한 지구적 차원의 저항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모든 보편주의적 범주들을 거부한다면 과연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가능한 일인가?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우리는, 적어도 자본주의와 사회 계급이라는 개념들만이라도 인정해 주는, 탈식민주의 이론 신봉자들을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개념들을 충분히 효율적인 개념들로 판단하여 그들이 이 개념들을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에서 꼭 풀어주면 좋겠다. 그런데 그들은 이 개념들에서 아무런 매력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개념들을 마르크스 이론의 조잡하고 부질없는 요소들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지안 프라카시(Gyan Prakash)는 “자본주의를 역사 분석의 근거로 삼는 것은 여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역사를 동질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조금씩 사라질 수밖에 없는 찌꺼기 형태 이외에는, 자본주의의 역동성 외부에 존재하는 실천들을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구조들이 자체로 반영하는 경제적 역동성-바로 사회구조들의 생산양식을 말함-이라는 기준에 의해 분석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는 잘못 된 것일 뿐만 아니라, 유럽중심주의 사고에 얼룩져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제국주의적 지배의 형태와 공모를 하고 있는 것이다. 프라카시는 “다른 수많은 유럽적 사고들처럼, 역사를 생산 양식의 계승으로 보는 유럽중심주의 서사(敍事)는 19세기 영토 제국주의와 짝을 이루고 있다”고 단언한다.(3) 차크라바르티 역시 자신의 영향력 있는 저서 <유럽을 시골뜨기로 만들다>(4)에서 같은 논거를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확장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보편주의 이론은 지역의 역동성을 똑같은 테마에 대한 단순한 변주(變奏)로 축소해 버린다.


다시 말해 각 국가가 어떤 개념적 추상에 일치하는 정도(程度)에 의해서만 정의되기 때문에, 각 국가의 고유 역사가 유럽이 겪은 거대 서사시의 주석(註釋) 정도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세상의 변화에 대한 자신들의 분석에서 모든 우연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비극적 오류를 저질렀다. 자본의 보편적 역동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신뢰는 ‘역사 과정에서의 비연속성, 단절, 변화’의 가능성들에 대해 눈멀게 만들었다. 인류를 특징짓는 자유의지에 내재된 불확실성에서 해방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역사는 필연적으로 정해진 결말에 이르는 곧은 직선과 닮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개념은 받아들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위험한 개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개념은 비서구 사회들로부터 자신들 고유의 미래를 건설할 능력을 박탈해 가버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기 동안 자본주의가, 예전에 식민지화된 국가들의 거의 모든 영역에 뒤얽히면서, 지구 전체에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자본주의가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를 필두로 하여 새로운 지역들에서 뿌리를 내렸다면,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사회적·제도적 모습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자본의 축적 논리가 지역의 경제뿐만 아니라, 이렇게 밀려오는 압력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 하는 비경제분야들에도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의 억압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차크라바르티가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기에서 세계의 보편주의 형태를 읽어내길 거부한다.


그는, 모든 사회적 실천이 자본의 규칙에 종속된 경우에만 오직 그런 경우에만, 자본주의가 진정으로 보편화의 매개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본의 어떤 역사적 형태도, 비록 그 형태가 세계적 영향력을 가졌다 해도, 결코 보편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자본의 유형이 세계적 규모이든 국지적 규모이든 간에, 어떤 자본의 유형도 자본의 보편적 논리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결정된 모든 자본의 형태는 자본의 패권적 열망과 지역의 완고한 관습 및 관례 사이의 일시적 타협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에서 결론을 내린다면, 자본이 모든 사회관계에서 모든 형태의 자율성을 박탈하면서 모든 사회관계를 정복했을 때에만 우리가 보편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사회적 실천이 자본주의자들의 고유 이익과 양립하는 지를 측정하기 위해 자본주의 관리자들이 손에 정치적인 가이거 측정기(Compteur Geiger)를 들고 지구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자신들의 투자에 대해 최고의 수익을 보장받기 위해 노력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것도 여기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한, 그들은 지역의 관례와 도덕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 중재를 받아들이게 할 필요성이 생기는 때는, 경우에 따라서 사회적 관례를 뒤집을 필요성이 생기는 때는, 바로 환경이 노동자들의 불복종을 자극하고 자본주의자들의 시장 성장을 방해함으로써 자본주의자들의 목표에 걸림돌이 될 때 뿐이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그 어떤 지방에서든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들’은 자본주의자들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한다. 세계화가 기막힌 기교를 부리기 때문에 그것이 세계의 보편화 형태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곳곳에서 드러나는 실천들이 당당하게 자본주의적 실천들로 묘사될 수 있는 순간부터, 그 실천들은 진짜로 보편적인 것이 돼버린다. 자본은 전진하고, 점점 더 많은 대중을 노예로 만든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본은 모두에게 타당한 하나의 서사, 보편적 역사인 자본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세계 자본주의 지배를 인정한 탈식민주의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의 실체를 부인하면서도, 말로는 세계적 자본주의의 지배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더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유물론적 분석의 두 번째 구성성분인 저항 현상과 관계된다. 자본주의가 증식함에 따라 자본주의가 폭동을 파종한다는 점을 그들도 기꺼이 인정한다. 탈식민주의 문헌은 거의 의무적으로 노동자, 농민 혹은 원주민의 투쟁을 환영한다. 이 점은 마르크스주의자의 분석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의 분석이 피지배층의 저항을 계급이익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반면, 탈식민주의 이론은 위험을 무릅쓸 망정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힘의 관계를 일부러 고려하지 않는다. 탈식민주의 이론은 모든 저항이 문화·역사·해당 영토에 특수한 국지적 현상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지, 결코 인류 전체를 특징지을 수 있는 어떤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차크라바르티의 입장에서 사회적 투쟁을 물질적 이득에 연결시키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부르주아의 합리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혹은 어떤 대상, 어떤 관계, 어떤 제도 등)의 ‘경제적 유용성’이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것은 그런 합리성의 시스템 틀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5) 에스코바르(Escobar)도 “후기구조주의 이론은 따로 분리된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으로서의 주체에 대한 자유주의적 사고를 포기하게 만든다. 주체는 수많은 영역에서 역사적으로 결정된 실천들과 담론의 산물이다”(6)라고 기술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이의를 제기할 때, 이런 이의 제기는 특별한 상황에 한정된 욕구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욕구는 역사와 지정학에 의해서도 만들어지고, 계몽주의의 보편주의 서사를 주입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는 우주생성론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각 개인의 관심과 욕망이 문화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는 탈식민주의 이론가들과 더 전통적인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예를 하나만 들어 본다면, 세상의 어떤 문화도 주체들이 자신들의 물질적 행복에 무관심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음식, 주택, 안전 등과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욕구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필수불가결하게 충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에 대한 욕구 충족은 모든 문화의 재생산에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약 인간 행위의 몇 가지 양상들이 어떤 공동체에만 특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 몇 가지 양상들이 문화라는 대장간 너머에 위치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 양상들은 어떤 시대나 어떤 장소에만 특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심성으로서 인간 본성의 구성성분들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음식, 우리의 의복 취향 혹은 주택에 대한 우리의 선호가 전체적인 문화 특질 및 역사적 우연성과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문화주의 신봉자들은, 우리 욕구가 문화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증거로 소비형태의 다양성을 당연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똑같이 자명한 이치인데도 불구하고 기아·추위·절망으로 죽고 싶지 않은 인간의 공통된 열망에 대해서는 그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도입된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것은 바로 행복에 대한 인간의 관심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관찰했던 것처럼, 노동자들은 ‘경제적 수입에 대한 음울한 의무감’ 때문에 착취의 그물망에 걸려들게 된다. 이런 현상은 사실상 문화 및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발생한다. 노동자들은 노동력(그 외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 그 노동력을 팔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최소 수준의 행복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유일한 옵션이 노동력이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들의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사장을 부자로 만드는 것을 만류한다면, 당연히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엥겔스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노동자들이 배고파 죽는 것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7)


 요원한 국제 좌파의 부흥


인간 본성의 이런 측면이 착취의 근간으로 이용되지만, 이 측면이 마찬가지로 저항의 양분을 공급해 준다. 인간이 노동력을 자본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내맡기고 동시에 노동력을 이용해 예속 관계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바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적 욕구 때문인데,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이윤에 대한 탐욕 때문에 고용주들이 생산 비용을 끊임없이 삭감하려고 하며 또 임금총량을 줄이려고 한다. 노동조합이 있거나 혹은 아주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 분야에서는 이윤의 극대화가 어떤 한계를 넘지는 않을 것이다. 이 한계 내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활수준에 대해 염려를 하지만, 일상적인 생존을 위해 투쟁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남반부’라고 불리는 곳과 산업계의 다른 수많은 분야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임금의 삭감은 흔히 또 다른 형태의 이윤 추구와 결합된다. 마지막 작동 순간까지 이윤을 내려고 연한을 초과한 장비를 계속 사용하고, 과중한 노동 업무를 부과하고, 시간 외 업무를 늘리고, 병가를 무급으로 처리하고, 사고를 전혀 고려치 않으며, 퇴직 연금과 실업수당이 없는 것 등이 다른 형태의 이윤 추구에 해당한다. 자본이 번성하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본축적의 논리가 노동자들의 행복에 대한 소망을 체계적으로 짓밟아 버린다.


저항운동은 흔히,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최소 생계비를 요구하기 위해 발발한다. 마치 온당한 삶의 조건이 상상할 수 없는 호화 생활인 것처럼 말이다. 고용 계약의 준수라는 자본주의 과정의 첫 번째 단계를 통해 자본주의는 세상 어디에서든지 뿌리를 내리고 피어날 수 있게 된다. 착취에 저항하는 두 번째 단계는 자본주의가 눈독을 들이는 모든 지역에서 계급투쟁을 낳게 된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해 투쟁할 ‘동기’를 낳게 된다. 이런 동기가 단체 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다양한 우연적 요인들에 달려 있다. 어쨌든지 간에 자본의 보편화는 자신들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보편적 투쟁을 필연적으로 낳게 된다. 두 가지 형태의 보편주의를 인간 본성에 내재한 똑같은 구성성분에서 끄집어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대부분의 진보주의자들 입장에서는 또 다른 성분들과 또 다른 욕구들이 개입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아주 쉽게 문화적 장벽들을 뛰어 넘는다. 예를 들어 자유에 대한 갈망, 창조에 대한 갈망 혹은 존엄성에 대한 갈망이 이에 해당된다.


인간성이란 것이 생물학적 욕구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런 생물학적 욕구가 다른 욕구들보다 덜 고상해 보일지라도, 이런 욕구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고, 사회 변혁의 계획 속에 그것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이런 명백한 사실을 우리가 단념해 버리는 것은 좌파의 지적 문화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식민주의 연구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역할을 했다. 탈식민주의 연구는 남반구 국가들에서 문학작품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데 공헌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지적인 연구가 후퇴하고 있을 때, 탈식민주의 연구는 반식민주의의 불꽃을 다시 일으켰으며, 제국주의 비판에 대해 타당성을 다시 부여했다. 유럽중심주의적 오만에 대한 이들의 공격이 적절치 못한 효과들만을 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가도 심각하다. 기력을 회복한 자본주의가 더욱 맹렬하게 그 파괴적 힘을 내뿜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위기를 이해하고 전략적 예측을 다듬게 해 줄 상당수 개념 도구들을 해체하는 이론이 오히려 미국 대학들에서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탈식민주의 선도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가상의 적과 싸우느라 엄청난 힘을 낭비했다. 그래서 탈식민주의 선도자들은 생득설(인간의 지식이나 관념 및 표상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공통적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그 성질을 띠게 한다는 학설-편주)과 오리엔탈리즘*이 다시 출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셈이었다.


정치 행동의 유일한 동력 축으로 제시된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그들의 강박관념적인 예찬이 역설적으로, 식민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정복 행위에 갖다 붙인 다른 문화의 이국적이고 경멸적인 이미지를 다시 유행시켰다. 20세기 내내, 반식민주의 운동은, 억압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열망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억압이 창궐하는 모든 곳에서 억압을 규탄했다. 탈식민주의 연구는, 반(反)유럽중심주의라는 이름을 앞세워, 좌파가 바로 제국주의 지배의 이데올로기적 디딤돌로 간주했던 문화적 본질주의를 그대로 되뇌고 있다. 보편적 권리라는 사상 자체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지역 문화를 상기시키는 것보다 자국 국민들의 권리를 짓밟는 독재자들에게 더 좋은 선물이 있을까? 민주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좌파의 부흥은, 우리가 이런 케케묵은 표현들을 쓸어 내버리지도 못하고, 자본주의의 위협과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보편주의를 재확인하지 못하는 한,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으로 남게 될 것이다.



글·비벡 치버 Vivek Chibber


<탈식민주의 이론과 자본의 망령>(버소, 런던, 2013년)의 저자. 이 텍스트는 좌파 지식인 잡지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머린 프레스, 월간 리뷰프레스 앤 펀우드 퍼블리싱, 2013)의 2014년판에도 출간됨.


번역·고광식


(1) 빌 애쉬크로프트(Bill Ashcroft), 개레스 그리핀스(Gareth Griffins), 헬렌 트리핀(Helen Triffin), <탈식민지 연구 리더(The Postcolonial Studies Reader)>, 루트리지, 런던, 1995년.

(2)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유럽을 시골뜨기로 만들다. 탈식민주의 사상과 역사적 차이>, 암스테르담 출판사, 파리, 2009년.

(3) 지안 프라카시, “탈식민주의 비평과 인도의 역사기록학”, <소셜 텍스트(Social Text)>, 31-32호, 두르함(북 캐롤라인), 1992년.

(4)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유럽을 시골뜨기로 만들다>, 위의 책.

(5)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노동계급 역사를 재고하다: 벵골 1890-1940>, 프린스턴 대학 출판사, 1989년. (6) 아르투로 에스코바르(Arturo Escobar), “순리: 반(反)본질주의 정치 생태학으로 가는 단계”, <커런트 앤스로폴로지(Current Anthropology)>, 40권, 1호, 시카고, 1999년 2월.

(7)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국 노동 계급의 상황>, 에디시옹 소시알, 파리, 1960년(초판:1844년).


용어설명


  구조주의인본주의 철학과 전쟁 후 유행한 주체의 자유 철학(장 폴 사르트르)과 대립하여 구조주의는 개인들이 필연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개인들에게 부과되는 객관적인 구조규칙성을 추출하려고 노력한다이 조류는 1950년대에 프랑스의 여러 학문분야에서먼저 언어학에서(페르디낭 드 소쉬르), 연이어 인류학(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역사학(장피에르 베르낭), 철학(루이 알튀세), 심리학(자크 라캉등에서 발전했다.


  후기구조주의일의적(一義的진리성을 가정한다고 의심받는 현대 인문과학과는 달리후기구조주의는 사물과 그룹이 완전한 본성’ 혹은 본질과 같은 진실성을 갖고 있다는 모든 주장을 거부한다후기구조주의는 사실의 구성적’ 특성을 가정하는데이 경우 사실이란 것은 해체해야 할 복잡한 담론에 불과한 것이다프랑스 철학자들(자크 데리다와 미셀 푸코)에게서 영감을 받은 후기구조주의는 1980년대에 미국 대학들에서특히 철학문학미학 분야에서 발전한다후기구조주의는 특히 페미니스트 운동,동성애 운동흑인 운동이라는 몇몇 아카데미 분파에 영양분을 공급했다.


  탈식민주의 연구3세계의 해방투쟁 과정에서역사가들인류학자들문학연구자들은 식민지화된 주민들의 민족성정체성문화의 문제들을 재고해 보기 위해 후기구조주의 개념 틀을 독점적으로 사용한다마찬가지로 텍스트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 조류는 서구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지배자적 사고방식과 단절하고자 하며피지배민족의 문화적 저항을 강조한다.


  오리엔탈리즘동양은 불가피하게 서구와 다르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필두로 하여미술문학과 같은 서구 문화에 전달된 고정관념들이 드러난 동양에 대한 기술을 의미한다. 1978년 출간된 비교문학 연구자인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의 <오리엔탈리즘서양에 의해 만들어진 동양>이 흔히프란츠 파농의 저서들과 더불어탈식민주의 연구의 기본 텍스트로 인용된다.


  서벌턴 연구탈식민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적종교적성적(性的등의 측면에 대해 지배당하고 무시당한 하층민 그룹의 관점에서 인도 역사를 재해석하는 역사의 연구 조류를 말한다파르타 채터지,호미 바바디페시 차크라바르티 교수가 3명의 저명인사들이다서벌턴 연구 초창기인 1980년대에 라나지트 구하와 가야트리 스피박에 의해 활성화된 서벌턴 연구 그룹은대부분의 후기모더니스트 지식인들과는 반대로안토니오 그람시의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한다.


  문화주의사회적경제적정치적 및 그 밖의 변수들을 고려치 않고한 인간 그룹의 문화를 신성하고 고정된 소여(所與)로 간주하고또 그 문화를 이 인간 그룹의 역사에 대한 주요 설명 요인으로 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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