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태풍 볼라벤의 중심에 들었던 고흥은 피해가 컸었다. 농사라고 해봐야 고작 텃밭 정도인 우리는 전기가 끊긴 사흘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정도의 불편을 제외하곤 피해랄 것도 없었지만 주변의 피해 규모를 보면서 바람이 그렇게 무서운 존재인 줄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다.
완전 초토화되었다고 생각되었던 그 텃밭에서 꾸준하게 생명을 이어가는 몇 안 되는 작물들을 보면서 자연의 치유능력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 중 고추와 토마토 씨가 떨어져 싹을 얼마나 많이 틔우던지... 가을 작물을 심으면서 수시로 뽑아주어야 했다.
무서리가 내리던 날, 남편이 빈 화분에 흙을 채우더니 고추 세 포기와 토마토 한 포기를 옮겨 심었다. 수시로 쌀뜨물 영양제를 희석해서 분무기로 뿌려 주는 것을 흘낏 보며, 좀 걸리적거릴 것 같기도 했지만 나는 무관심한 척 했다. 베란다라도 있으면 쫓아낼텐데 그럴 수 없으니 이 겨울, 영락없이 녀석들과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실내온도가 그만그만 하니 얘들도 무럭무럭 자라지는 않는 것 같았다. 더구나 토마토는 성장의 기미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고추는 때가 되었는지 화분에 옮기며 뿌리 활착에 도움이 되도록 꽃을 모두 따 주었는데 한 달여 동안 다시 꽃을 피워 열매까지 맺었다.
얘가 제일 큰 넘인데, 얼마쯤 후면 풋고추를 따 먹을 수 있을까...
집이 정남향이라 일조량이 많은 편이다. 낮에는 햇살 제일 많이 받는 창가를 독차지하는 그 틈에서 나는 가끔씩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서로 빛바라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