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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일상

“쌀 떨어졌다."

by 내오랜꿈 2007.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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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떨어졌다."
“......?”
“......?”
“머리라도 잘라서 팔아 오지 그러냐?”


이 무슨 70년대 연속극도 아니고... 

지난 일요일, 저녁을 먹는 식탁에서 아내가 갑자기 툭 던져 온 말이 ‘쌀 떨어졌다’는 소리였다. 이 무슨 보릿고개 넘던 시절 대화도 아니고, 그래도 명색 수도권 변두리 도시지만 30평대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는 가정에서 나올 법한 소린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다가 답해준 말이 ‘머리카락이라도 좀 잘라서 팔아 오라’는 농담으로 응수했다. 그러고선 둘이서 한참을 웃었다. 

물론 요즘도 이 사회에선 기본 먹거리인 쌀의 부재를 염려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이런 것 하나 해결 못 하면서 국민소득 2만 불 시대를 달성했다(환율 하락 덕분에 2007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불을 초과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자화자찬할 이 우라질 정부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자기 임기 내에 4만 불 달성한다고 설쳐대는 차기정부 구성 1순위 후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내 유년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쌀’이란 존재는 지금처럼 넘쳐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부족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올 해는 풍년이 들어 쌀 몇 천만 석을 수확할 것이란 뉴스가 온 국민의 관심사였다. 우리 집 역시 그 쌀의 존재에서 그렇게 자유롭지는 못했다. 3,000여 평의 논을 경작하고 있어 우리 식구 먹을 식량이 전혀 부족할 리 없는 우리 집에서도 쌀은 늘 부족했다. 내 기억에 우리 집에서 쌀밥을 먹는 날은 설, 추석 그리고 가족 누군가의 생일날이었다. 3,000여 평의 논에서 수확한 쌀은 보리쌀로 대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양만 남긴 채 현금화되어 집안살림살이에 보태졌던 것이다. 아마도 그 덕에 내가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었으리라. 

이런 유년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나조차도 지금은 ‘쌀의 부재’에 대해서는 그리 심각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 나에게 쌀이란 언제든 필요하면 마트에 들러 4kg, 5kg, 10kg짜리로 세분화되어 ‘**햇쌀’, ‘**청정쌀’, ‘**농협쌀’로 브랜드화 된 포장뭉치를 카트에 싣기만 하면 되는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오려면 ‘돈이 떨어졌다’고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오늘 점심 때 장보러 가자고 하니까 아내는 한 번 더 해 먹을 쌀은 남았다면서 내일 가자고 한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쌀 떨어졌다’고 유난을 떨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는 한 아내는 쌀 걱정 해본 적 없는, 나보다는 ‘부르조아 집안’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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