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아가는 모습/일상

과수원 가는 길

by 내오랜꿈 2007. 9. 23.
728x90
반응형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우리집 과수원의 첫모습은 아래 사진 속의 과수원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먼저 사진 오른쪽의 배밭은 배나무가 아니라 복숭아 나무로 뒤덮여 있었고, 사진 왼쪽 끄트머리에는 딸기밭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딸기밭이 없어지고, 대학교 들어갈 무렵, 복숭아 나무를 베어버리고 배나무를 심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 과수원의 배나무는 40년이 넘은 것부터 20년 남짓한 것도 섞여 있는 셈이다.


그런 과수원이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여야 할 운명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지금까지는 자식들, 주로 누나와 자형의 도움으로 어머님께서 꾸려 오셨지만, 이제는 도저히 힘에 부쳐서 경작하기가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그렇게 말려도 안 들으시던 어머니께서 순순히 올해부터는 안 하신다고 그러는 걸 보면 당신도 어지간히 기력이 딸린다는 걸 아시는 것 같다.


이제 저 과수원은 온전히 남아 있는 당신의 자식들이 책임져야 할텐데, 자식들 그 누구도 이제 와서 농사를 주업으로 하여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저 과수원의 운용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고가고 있는 상황이다. 대체적으로 나오는 의견들이 고구마, 감자, 마늘, 옥수수 등을 심으면서 염소, 닭 등을 풀어 키우자는 안으로 모아지고 있는 중이다.


뭐, 자식 다 키워낸 형제자매들의 소일거리인 이상 무엇을 재배하든 무엇을 키우든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번 기회에 시골집을 다시 짓는다는 것인데, 늘상 전원 생활이 어쩌고 하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저 과수원을 배경 삼아 눌러 앉는 것은 어떠냐는 고민을 시작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아직은 이야기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고 아내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두 마디 의논해본 것에 불과하지만, 요즘 회사일과 관련된 내 신상의 변화 가능성 때문에 갑자기 현실적인 대안의 하나로 부각된 문제라 할 수 있다. 생판 모르는 땅에 새로 집 지어서 농작물 심는 것에 비하면 이미 경작할 모든 것이 갖추어진 저 과수원은 확실히 매력적인 대안이 아닐 수 없다.


아래 글은 아내가 3년 전, 이 즈음에 울산집에 갔다가 쓴 글이다. 저때만 해도 '생생했던' 어머니셨는데, 지금은 몸, 정신 모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고집만 피우신다. 추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즐거운 명절이어야 할텐데..... 


2007년 9월 23일.





일흔 다섯의 노모가 일평생 살림을 불리고, 5남매의 등록금이 되었던 과수원은 집을 나서면 5분 여 거리에 있습니다. 금이 좋았던 과수농사의 옛영화를 뒤로 하고 주변에는 빚만 잔뜩 진 농촌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듯 수지가 안 맞아 방치된 것과는 달리, 쉼없이 오르내리며 어머님의 손길이 닿은 땀의 과수원 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배는 유난히 달고 맛있다고들 합니다. 넘칠 정도로 부지런하신 어머님을 위해 형님댁에서는 서울 근교에 얼마간 텃밭을 사서 모시려고 해도, 자식에게 신세 안지려는 마음만은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대쪽이십니다. 





새해에 갓 태어난 조그만 강아지였던 똘똘이가(시댁에서 기르는 강아지는 죄다 이 이름만 씀) 3개월 사이 훌쩍 자란 모습으로 동행을 청하고, 어느 집 소가 버려진 텃밭에서 한가로이 봄볕을 희롱하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먼저 온 복사꽃은 화사한 자태를 뽐내는데, 아직 배꽃은 저 만큼 더디 오고 있습니다.




흙을 깨우고,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느라 사시사철 새까만 어머니의 손톱을 두 번밖에 깍아드리지 못한 것이 부끄러움이요, 이제는 한가롭게 노니는 저 소처럼, 혹은 다른 어머니들처럼 편안한 여생을 보내실 때도 되었건만 당신 하시는대로 놔두라는 말씀이 자식들에게는 쓰라림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줄당기기에서 결국 자식들의 채근으로 듬성듬성 잘라버린 배나무의 그루 수가 적다고 어머니의 일손이 덜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오랫만에 다니러온 작은 아들이 세찬 바람에도 배나무가 잘 견딜 수 있도록 삼각대를 세우고 야무지게 묶고 있는 중입니다.




여지없이 두꺼운 흙을 뚫고 파랗게 돋아난 산나물입니다. 배나무 베어낸 자리에 어머님은 작년부터 힘들게 산에서 이것들을 캐다 심으셨습니다. 나중에 당신이 안 계시더라도 자식들이 손쉽게 뜯어다 먹게 하기 위한 준비라 하실 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부드럽게 내리쬐는 봄볓을 받아도 이보다 더 따사로울까요?


마치 종합선물 셋트 같은 어머님의 손길이 닿은 먹거리들로 며칠간은 식탁이 봄의 무공해 푸성귀들로 풍성할 것 같습니다.



written by 느티

2004 03 30



728x90
반응형

'살아가는 모습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6월의 순천만 갈대밭 모습  (0) 2009.06.12
“쌀 떨어졌다."  (0) 2007.11.06
경기도 박물관 - 넘나듦의 경계를 보다  (0) 2007.06.08
선창포구  (0) 2007.05.17
참나무 도토리  (0) 2004.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