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탐라의 자연을 가까이
-2004년 4월 3일 일정 : 도두항→제주 위성섬 해상일주→제주대학→산굼부리→자연사박물관
오전의 일정과는 달리 디카의 밧데리도 빵빵했건만, 산굼부리에 도착했을 때는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며 주변이 어둑어둑 해지고 추위와 배고픔까지 더해 사진이고 뭐고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점심 먹을 곳을 찾을 요량으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포기하고 저녁에 좋은 것 먹자는 합의에 도달한 뒤 한참을 달리기만 한 터이라 다급해진 화장실을 찾은 사이, 남자들이 매점에서 건넨 보리빵에 따끈한 커피 한잔의 맛은 환상 그 자체였다. 그 짧은 시간에도 주변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 마치 귀신이라도 출몰할 것 같은 분위기에 보태어 건축물 또한 온통 검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으스스한 분위기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먼저 정상에 올라가기 전에 잠깐 공부한 바에 따르면, 산굼부리란 산에 생긴 구멍(굼)이라는 뜻을 가진 제주 사투리다. 이곳은 제주의 360여 개 기생화산과 달리 밑에서 폭발하여 폭발물이 쌓이지 않고 다 분출되어 뻥 뚫린 분화구로 형성된 폭렬공 기생화산이라고 한다. 산굼부리 분화구는 화구의 깊이가 약 100m, 화구연의 지름이 600∼650m로 한라산 분화구인 백록담보다 조금 더 크고 깊고, 아무리 비가 와도 물을 빨아들여 화구안에는 물이 고이지 않는다고 한다. 해발 308m이며 붉가시나무, 나도밤나무, 야생란, 양치류 등 420여 종의 희귀한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상록활엽수림과 낙엽활엽수림이 공존하고 있어 학문적으로 희귀한 연구대상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직접 들어갈 수는 없어 가까운 곳에 설치해 놓은 전망경을 통해 산굼부리의 실체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 규모와 특이성은 제주의 화산활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앞마당에 전시된 용암수형석과 화산탄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위의 오른쪽 사진들을 더블클릭 하면 된다. 얼마 전 블로그를 돌아다니다 보니,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33곳 중에 이 산굼부리가 끼어 있던데, 그것은 아마 은빛 물결의 갈대가 장관인 가을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오늘의 산굼부리행은 솔직히 추워서 제대로 오름들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기도 하지만 산굼부리의 봄풍경은 그다지 내 가슴에 와닿지 않는, 그저 그런 맛이었다.
검은 현무암 계단길을 따라 걸으면 정상인 '산굼부리' 표시석에 이른다.
장장 백여 미터가 넘는 깊이와 둘레가 2Km가 넘는 터라 움푹 패인 분화구를 렌즈로 한 눈에 다 넣지는 못했지만, 그 거대한 구멍 사이로 몸을 날려 뛰어 들고 싶은 유혹을 잠깐 느끼기도 했다. 처음에는 추운 날씨에 빨리 나가고픈 마음밖에 없었는데 정상을 정복하고 나니, 다소 마음의 여유가 생겨 몇 장의 사진을 더 눌러보았는데 제주에서 흔히 볼수 있는 무덤이야 그렇다쳐도 사슴동상이 왜 그곳에 있는지 모를 일이다.
막 구경이 끝난 싯점에 빗방울에 제법 굵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형님 내외는 서울가는 마지막 비행기표를 예약해 놓은 터라 제주 시내에서 한군데 더 들리기로 하고 '제주 자연사 박물관'으로 갔다. 느즈막히 금요일 오후에 도착한 사람들이 비가 와서 실내로 모이다 보니 북적거렸는데 타인의 관람에 방해 될까봐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제주 고유의 민속 유물과 동식물, 지질 및 해양 생물에 관한 자연사 자료를 수집, 종합 전시하고 있는 제주 민속자연사박물관은 탐라 전체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제주가 아닌가 하여 꼭 한번 들릴 만한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특히 각처에서 기증한 것을 박제한 각종 해양동물은 어른인 나에게도 신기했으니까. 박물관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안내서를 열심히 뒤적거리는데 웬 남정네가 이쪽저쪽으로 자꾸 걸음을 방해하여 올려다보니, 세상에나~ 이 멀리까지와서 아는 이를 만나다니.. 행여라도 나쁜 짓 하면 안될 것 같다.^^
형님 내외와 마지막으로 공항에서 가까운 라마다 호텔 건너편에 있는 전복요리 전문식당(아침 먹은곳에 다시 감)에서 전복회를 2접시나 시켜놓고 아쉬움을 달랬다. 그 좋은 안주에 운전을 해야 하는 나는 음주를 꾹 참았고 두 형제는 제법 부어라 마셔라 한 후 공항까지 배웅해 드렸다. 우리 부부는 공항 뒤편으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면서 곳곳에 설치된 형형색색 조명이 연출하는 밤바다의 풍광에 잠시 눈을 적시다가 조명 비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적당한 카페에 들어가서 와인 한 병을 시켜 가볍게 마시며 분위기를 냈고, 제주에서의 둘째날 밤이 그렇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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