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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여행

봄, 제주에서 5 - 길 따라 길이 열리고

by 내오랜꿈 2007.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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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길따라 길이 열리고.


-2004년 4월 4일 일정 : 한라산의 도로→신영 영화박물관→성읍민속마을→함덕해수욕장→귀가



주5일제 근무가 일반화되어가는 과정이라 공휴일 하루만 잘 끼면 휴가 내지 않고도 3일 연휴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닌 실정이다. 화창한 봄날의 연휴 탓인지 제주행 비행기는 갈 때부터 몸살을 앓더니 돌아오는 비행기편도 만만치 않았다. 일요일 저녁 서울행 비행기를 예약해둔 뒤에도 월요일 오후 여수행 비행기를 대기신청 했지만 영 싹수가 노란지라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떠나기로 한 셋째날.


일행도 없고 마음이 풀어진 탓인지 느지막히 일어나 렌트카에서 추천한 맛집 중, 오피스텔에서 가까운 한식집에서 오분자기 된장국과 옥돔미역국으로 아침을 먹고 난 후, 예전에 다닌 곳들을 제외하고 나니 딱히 갈 곳이 마땅찮은 빈곤함에, 일단 남은 일정을 정처없이 제주의 도로 곳곳을 달려보기로 했다. 어젯밤의 궂은 날씨에 반해 화창한 햇살이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추고 있어 무엇보다 드라이브 하기에 최적이었다. 제주는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지만, 이곳의 이국적인 분위기와 함께 다양한 길에서 만나는 자연은 나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시켜주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다니다 보니 메모리 부족과 운전대를 잡고 있어서 그 아름다운 길들의 흔적을 남기지 못했음이 큰 아쉬움이 아닐수 없다.


한라산 등반객들에게 익숙한 일명 1100도로를 따라 한라산을 오르다 보면 '도깨비도로'를 지나게 된다. 우리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만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뒤로 걸어도 보고 동전도 굴려보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으니 감이 잘 안 오는지라 남편에게 뭐가 신기하냐는 투로 물으니까 엑셀에서 발을 떼 보라고 한다. 시속 20킬로 정도로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차의 속력이 점점 줄어든다. 분명 눈 앞의 경사는 내리막길로 보이는데 말이다. 안시현인가, LPGA에서 우승한 그 골프장이 제주도에 있는 CJ 뭐 였는데, 그때 골퍼들이 퍼팅에 애를 먹은 이유도 바로 제주도의 이 이상한 경사 때문이라고 남편이 설명해준다. 한라산을 쳐다보고 평평하면 오르막 경사로 봐야 하고 바다쪽을 보고 평평하면 내리막 경사로 봐야 한다나 어쨌다나...


그렇게 도깨비도로를 뒤로 하고 한라산을 오르는 길은 지금이 봄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점점 추워진다. 차의 히터야 진작에 틀고 있었지만 차창을 열면 한겨울의 찬바람이 밀려든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달한 1100고지 휴게소. 잠시 내려 자판기 커피라도 한잔할 요량이었지만, 막상 내려서 사진 한 장 찍고 나니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에 커피고 뭐고 서둘러 다시 차를 몰아 서귀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 10여 분을 달렸을까, 역시나 제주도의 풍광은 완연한 봄이다. 좀전의 그 겨울은 마치 딴세상의 일인 듯 곧게 뻗어 나른함이 몰려드는 1119번 도로를 따라 한라산의 허리를 돌아가는 길 옆의 목장들에선 한우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새삼 제주도의 변덕스러움과 다양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그렇게 찾아간 남원의 신영영화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박물관인 이곳은 그 자체보다 해안경승지(큰엉)와 태평양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총길이 2.2km의 해안 산책로가 더 매력적이었다. 초행의 무지함으로 인해 박물관 주차장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그 옆의 임시주차장에 파킹한 후, 산책로를 따라 박물관에 들어갔다. 프로그램을 쭉 훓으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단위의 관람객이라면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특수 효과를 실습해 볼 수 있는 체험관 등은 입장해 봄 직하다. 벌써 뜨락에 있는 모형 쥬라기만 봐도 아이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지만, 우리는 비싼 요금에 비해 취할 수 있는 부분이 적을 것 같은 얄팍함에 입장권을 끊지 않고 이내 발길을 돌려 다시 산책로로 나왔는데, 이 길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우리처럼 샛길로 들어오지 말고, 정문을 통해 당당히 입장하여 문화시민의 긍지를 지켜주기 바란다는 요지의 박물관 관장백 안내문이 서 있었다. 모르고 밟은 수순이지만, 졸지에 비문화 시민이 되어버린 격이다. 특별히 바쁜 것도 없기에 표선해수욕장까지 난 해안길을 드라이브 한 뒤 예전에 다녀온 곳이지만 점심으로 제주 흑돼지를 먹기 위해 성읍민속 마을로 방향을 잡았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 놓고 한바퀴 휘 돌아보니, 식때를 맞이한 성읍민속마을은 차라리 시장바닥처럼 식당마다 대형 관광버스가 실어온 단체 손님들로 정신이 없었다. 마을 한가운데에 이르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와 팽나무를 위해 한 달에 기백만원의 주사비가 든다고 한참 단체 관광객에게 설명하는 전문 가이드는 손님들의 구미에 맞게 농까지 섞어가며 웃음을 자아낼 만큼 말솜씨가 유려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이 맛있는 흑돼지에 토속주 한잔 걸치는 것이었는데 렌트카 회사에서 제공한 책자에 D/C되는 곳을 찾아 들어간 곳이 신통찮아 잔뜩 실망만 안았다. 역시 관광지에서는 택시가 즐비한 식당을 찾아가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나른한 햇살에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비자림 휴양지를 거쳐 백사장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함덕 해수욕장에 닿으니, 먼저 온 몇몇 쌍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해변의 모래가 곱고 깨끗함은 물론, 에메랄드빛 바다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달러까지 써가며 타국에 갈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을 잠깐 하며, 바닷물 색이 이렇게 다양할수 있다니... 한참 물이 빠진 그 속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 마치 바다가 옥을 품고서 그 빛을 발하는 듯한 착각 마저 들었다. 남제주의 길을 따라 오다 보니 비자림로에서 함덕까지 하루 정도는 두 다리로 꼭 한번 걷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것은 역시 사람이 만든 구경거리는 자연이 만든 작품에 비할 바가 못됨에 대한 감탄이 아니었을까. 이번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고 보니, 다음에 제주에 오면 꼭 관광지 보다는 자연을 많이 보고 느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이렇게 5년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에서 2박3일을 보내고 나니, 설레임으로 왔다가 또다시 추억을 한아름 안고 가는 뿌듯함에 문득 집이 그리웠다. 보편적인 제주도의 인상은 기껏 유행 지난 신혼여행지 정도의 인식이 더 많은것이 사실이지만, 단순히 지나쳐 버리기엔 아까운 곳들이 많은 것 같다. 더더구나 내국이면서 이국적인 분위기에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섬이지만, 4월의 제주도는 하늘, 바다, 유채꽃의 삼원색으로 내 기억속의 동화속 그림처럼 늘 좋은 기억으로 자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written by 느티

2004 04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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