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비닐 멀칭도 하지 않고 제초제나 농약은 물론 화학비료도 일체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고추를 재배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우려가 컸다. 다른 작물은 몰라도 고추는 "절대" 약 안 치면 안 된다며 초보 농사꾼의 기를 팍팍 죽이는 상처투성이 말들이 난무했으니 말이다. 그런 우려를 뒤로한 채 일반고추 380주, 청양고추 100주 정도의 모종을 심었다. 설혹 주변의 우려대로 무농약 무화학비료 고추 농사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 경험이 곧 공부가 될 것이고, 그것은 평생 농사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매일 새벽 눈 뜨자마자 밭으로 달려가 꽃이 피고 고추가 달리고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식 키우는 것 이상의 애정을 쏟았더랬다. 비록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웃거름 두어 번 주는 것, 수시로 고랑의 풀을 매주는 것 그리고 번식력 왕성한 노린재 등의 벌레를 잡아주는 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한낮의 뙤약볕 아래 고개 숙이고 쪼그리고 앉아서 풀 매거나 벌레 잡는다고 고추밭 한 바퀴 돌고 나면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기 마련이다.
고추에 병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약을 치지 않기로 한 이상 더 이상 번지지나 말기를 기도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더 번지지 않은 것에 감사해 하며 장마철을 보냈다. 고추 농사의 어려움은 수십 년 농사를 지어온 이웃집 고추밭의 1,500 포기가 하루 아침에 내려앉는 것을 보면 실감할 수 있었다(위 사진). 엄청난 양의 퇴비와 요소 비료, 사나흘에 한 번씩 치는 약에도 결국 이웃집 고추밭은 모종을 심은 지 두 달 만에 누렇게 전멸해버렸으니 말이다.
이 빨간 빛을 보려고 그랬는지 올 여름엔 어디 맘 편히 여행 한 번 못 갔다. 그 수고를 고추가 알아주었는지 긴 장마 기간에도 비교적 잘 자라주었다. 건강하게 자라나 빨간 첫물을 안겨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이런 와중에 꿩이나 까치가 먼저 빨간 고추 맛을 보았다. 수고는 내가 했는데, 이놈들이 무슨 자격으로 맛을 보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얼마나 더 피해가 있을지......
지난 주에 딸까 망설이다가 태풍 '무이따'가 지나가는 바람에 남들보다는 조금 첫물이 늦어졌다. 어쩌면 관행농에 비해서 적은 양일지 모르지만 첫수확이기에 설레는 마음이다.
요즘은 힘들게 유기농 재배한 고추를 기계로 건조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올해는 한 번 오리지날 태양초를 만들어보기 위해 이 천막을 샀다. 처음에는 집의 잔디 위에 설치했다가 지난 주말에 다시 밭으로 옮겨왔다. 잠자는 것 외에는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 밭에서 이루어지니까 손보기가 쉬울 거 같아서 말이다.
고추 말리는 일이 고추 농사의 반이라고들 한다.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리라. 그래서 고추 건조대를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잘라왔다. 오늘 내로 완성할 계획이었는데, 오후에 부산에서 친구 부부가 방문하여 내일로 미뤄졌다. 이제부터는 고추 말리는 일이 숙제로 남았다. 날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