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하고 끈적끈적한 날씨가 연일 계속 되지만 고추 농사를 짓는 입장에서는 쨍쨍한 더위가 마냥 고맙기만 하다. 과수원에는 오래 전 전기가 끊어져 선풍기 하나 틀 수 없으니 아무리 더워도 오로지 자연바람에 의지하여 원두막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땀으로 목욕하는 일이 다반사지만 어느덧 익숙해져 가는 느낌이다. 밭에서 딴 수박이 그래서 더 달고 시원한 맛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장마가 끝나고 한창 풀들이 기승을 부릴 무렵에 그만 철근에 발바닥을 찔려 응급실에 가서 꿰매고 치료받는 10여 일 가량, 과수원은 온통 풀 천지로 변해 버렸다. 호박은 열매가 달리자마자 그만 땅에 똑 떨어진다. 긴 장마와 풀에 점령당해 습함을 견디지 못한 탓인 듯 싶다.
발바닥 실밥을 푼 기념으로 오늘은 풀 잡기에 나섰다. 남들은 비닐을 덮고 제초제를 뿌려 풀을 고사시키는데, 유기농을 고집하는 입장에서는 낫과 호미로 풀을 잡는다. 작물이 싹을 돋운 초기에는 호미로 풀을 잡고, 어느 정도 풀에게 지지 않을 만큼 자라면 낫으로 베어 그 자리에 풀을 깐다. 그래서 우리 밭은 온통 지렁이들의 천국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 풀 덕분에 퇴비를 많이 쓰지 않고도 건강하게 작물이 자랄 수 있다.
낫을 시퍼렇게 갈고 먼저 원두막 주변 정리에 나섰다.
내가 낫으로 풀을 베어 눞히는 동안 아내는 호미를 들고 갓 올라온 팥 밭 정리에 들어갔다. 다른 일 한다고 미적거리다가는 며칠 내로 저 바랭이가 주인 노릇 톡톡히 할 것이기에.
바랭이의 무서움은 감자 농사를 지으며 절실히 경험했다. 이곳이 감자 캐낸 자리인데, 초기에 한 번 풀을 잡고 내버려두었더니 저렇게 되었다. 감자 캐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던지... 일부는 메주콩을 심었고, 나머지는 가을배추 심을려고 시간나는 대로 밭을 만들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발바닥 부상으로 잠시 휴업 상태다.
풀 매는 일이 말할 수 없이 몸은 힘들지만 아무 생각이 안 나서 그런대로 할 만하다. 노력한 만큼 바로 성과가 보이는 일이기도 하고...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좀 늦었지만 토마토와 파밭까지 말끔히 정리했다. 일을 마치고 보니 벌써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오늘도 늦은 저녁을 먹어야 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