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도 없던 남한산성에 다녀왔다. 요즘은 주로 입으로만 산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광교산에서부터 지리산, 소백산, 월악산, 민둥산... 지난 몇 주일 동안 우리 부부가 입으로 다녀온 산들의 목록이다. 실제로 갈려고 계획했다 여건이 맞지 않아 포기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즉흥적으로 입에 올리다 계획한 전날에 이런저런 핑계로 유야무야 된 게 대부분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도 않고 노트북을 켰다. 하루 사이에 몇 백만 원이 눈 앞에서 왔다갔다 한다고 아내에게 말을 걸며 주식 관련 정보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어제 올랐던 주가가 아침부터 폭락하고 있었던 것. 그때 갑자기 아내가 남이섬을 가고 싶다고 한다. 한번도 가지 않았다면서. 사실 아내의 남이섬 타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다. 아마도 남이섬은 아내가 품고 있는 영원한 '이니스프리'인지도 모르겠다. 가 보지는 않았지만 항상 '좋더라'란 감탄과 함께 시작되는 것을 보면...
굳이 못 갈 이유도 없기에 가자고 하니까 아내는 왠지 미적미적한다. 머냐, 어디로 가느냐, 얼마나 걸리냐 같은 의미없는 물음들을 던지며. 그 와중에 지도책을 펴고 남이섬이 있는 가평 가는 46번 도로를 찾다 남한산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아내에게 '남이섬이 멀면 남한산성을 갈까'라고 하니 좋다고 거든다. 그래서 나서게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다.
며칠째 붙박이로 꽂아 둔 카오디오에서 들려나오는 <라디오 스타> OST를 지겨운 줄 모르고 반복해서 듣고 부르며, 분당시내를 가로지르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 산성의 남문에 이르렀다. 이 길은 서울 생활하면서 외로운 '솔로'들이 모여 일요일이면 들락거렸던 길이다. 막걸리에 닭백숙, 그 뻔한 메뉴를 참 지겹게도 먹어댔던 시절. 꼽아 보니 불과 10여 년 전이다. 그때 함께 했던 후배놈들이 갑자기 생각난다. 애들 키우느라 정신없는 안타까운 인생들.
그렇게 오른 남문 입구. 사진을 찍기 위해 차를 주차하고 내리니 커다란 플랭카드가 걸려 있다. "소설 <남한산성> 작가 김훈 초청 사인회". 그 플랭카드는 우리가 조금 후면 도착할 산성 안 로타리 주변에도 붙어 있었다. 솔직히 짜증이 팍 솟았다. 불과 두어 달 전에 방송, 신문 등 온갖 언론 매체가 지원하는 홍보성 이벤트를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한단 말인가? 좀 그만 울궈 먹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시작부터 약간은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남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점심을 먹기로 한, 인터넷에서 잘 알려진 한 식당을 찾아 나섰다. 몇 번을 이리저리 돌아본 끝에 '오복'이라는 상호를 보고 '저기다'라며 들어섰다.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손두부와 막걸리를 주문하고 점심으로는 산채 비빔밥을 시켰다. 하지만 산행을 한 뒤 돌아본 주차장에서 전혀 엉뚱한 집이었음이 밝혀진다.
점심을 먹고 로타리 주차장에 차를 박아두고, 북문-연주봉옹성-서문-수어장대-남문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잡았다. 손바닥 만한 산성인지라 무슨 코스 운운하는 게 어색할 정도다. 일주한다고 해도 두어 시간이면 족할 그런 산성이기에. 그렇게 오르게 된 산성안 단풍은 이미 절정을 지나 있었다. 더군다나 하늘조차 우리들의 늦어버린, 게으런 단풍놀이를 도와주지 않았다. 원래 이 곳의 視界가 그런 것인가. 날씨는 그닥 나쁘지 않았는데, 희뿌연 공기가 시야를 흐린다. 게다가 걷는 내내 손두부를 곁들여 아내와 나눠 마신 동동주 한 통에 속이 부대껴서 고생을 하고 보니, 오랜 만에 찾은 가을날의 남한산성이 그리 오래 기억될 것 같지 않다.
▲ 산성 북문으로 오르는 길 옆 어느 식당의 단풍나무.
▲ 북문에 걸터앉아 노래자랑 퍼레이드 중인 할머니들.
▲ 걸음은 건들건들, 동동주가 위에서 발효하는 신호를 자꾸 보내니 어쩔 수 없이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내가 벤취에 누워 자는 사이 아내가 몰래 찍은 사진들
▲ 북문에서 연주봉옹성에 이르는 중에 잠시 휴식.
▲ 시계가 좋지 않아 별 감흥을 못 일으키는 만추의 가을산/옹성에서 바라본 서울 모처.
▲ 이제부터 썩어져 내년을 준비할 낙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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