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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베냐민, 비트겐슈타인

언어공학자, 체벌교사...

by 내오랜꿈 2019.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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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인스, 램지.....

 

비트겐슈타인은 푸흐베르크에도 행복은 고사하고, 고대했던 내적 평화조차 단 한 순간도 누리지 못했다. 학교와 마을에서 그는 이방인으로 머물렀다. 1923년에는 러셀과의 우정조차 끝이 났다. 그러는 사이 오그던이라는 언어학자에 의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적 의미의 토대를 분석한 <의미의 의미>라는 책이 출간된다. 화자와 객체의 의식적 연관성과 인과관계에 대한 언어적 의미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오그던의 해결책은 비트겐슈타인에게 혹평을 받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의미의 진짜 토대를 마련해 주는 논리적 문장구조와 논리적 전개를 통해서는 세계에 대해 의미 있게 말하거나 근거를 댈 수 없고, 오히려 세계는 그저 주어진 것으로 수용되고 기껏해야 감탄 받을 수 있다고 분명하게 서술했다.

 

명제는 실재하는 모든 것을 묘사할 수 있지만, 그것을 묘사할 수 있기 위해 명제가 실재와 공유해야 하는 것, 즉 논리적 형식을 묘사할 수는 없다.

논리적 형식을 묘사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이 명제와 함께 논리의 바깥에, 즉 세계 바깥에 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12)

 

명제는 논리적 형식을 묘사할 수 없다. 논리적 형식은 명제 속에 투영된다.

언어에 투영되는 것을 언어는 묘사할 수 없다.

언어 속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4.121)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 ($4.1212)

 

그러나 오그던은 의미의 인과이론으로 언어에 투영된 것을 언어로 묘사하고자 했다. 게다가 비트겐슈타인의 확신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 즉 인과법칙 같은 것으로 세계를 해명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아무튼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인과법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일 수 있을 것이다: “자연 법칙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6.36)

 

1923, 비트겐슈타인은 케인즈의 후원 아래 케임브리지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나 무산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친구를 원하고, 케이브리지 모임은 세기의 철학 천재를 원했다. 케임브리지 모임은 철학 천재를 얻기 위해 힘닿는 대로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놀라운 유연성을 보여준다. 그는 철학으로의 복귀도 감수할 수 있을 터이다. 어떤 경우든, 외톨이가 된 그의 이성이 그를 영원히 버리거나 무자비하게 배반할 때를, 푸흐베르크 독방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더 나을 테니까. 그게 비록 6년이 걸린다 하더라도.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저택 내 음악 살롱. 아버지는 철강 재벌, 어머니 레오폴디네는 피아니스트이자 예술 후원자였다. 브람스, 클라라 슈만,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비트겐슈타인의 집을 드나들었고 비트겐슈타인의 부모는 쇤베르크, 파블로 카잘스 등을 후원하기도 했다.



$$ 언어공학자, 체벌교사

 

<논리철학논고>의 치유 제안에 관한 한, 그는 환상에 빠지지 않는다. 그가 제시하는 세계를 바르게 보는 방법은 실질적으로 학습될 수 없다. 무엇보다 <논리철학논고>의 사다리 오르기가, 모든 걸 결정하는 출발 부분에서 특정 경험과 통찰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경험과 깨달음의 본질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그리하여 토론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 밖에있다. 그래서 <논고>의 서문에 그것이 명확히 적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교재가 아니다.” <논리철학논고>의 철학적 기원을 형성하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선물 같은 경험일 뿐, 명백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반면에 교육자로서의 비트겐슈타인은 일상 언어 영역에서 치유의 잠재력을 보았다. 새로 태어나는 존재, 어린이들은 아직 각각의 문화와 그것과 연결된 약점과 혼돈에 아직 매여 있지 않다.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숙함에서 벗어나는 탈출구가 계몽인 이상, ‘스스로 초래함의 역할을 교육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칸트가 지적한 스스로 초래함은 세대 간의 관계와 불운으로 보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은 언어와 개념으로 어린이에게 세계관의 기초를 제시하고 가르침으로써, 그들에게도 우리의 미숙함을 공유하게 키운다. 이것은 운명이 아니다. 이것은 바꿀 수 있다.

 

언어에는 내부논리에서 벗어나 문화의 모든 시점과 사태에 맞게 오해와 오류 해석을 치유하는 힘이 있고, 그 힘을 영구적으로 불러내고 생산할 수 있다는 확신은 이미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제안된 치유프로그램의 토대이다. 이것은 또한 1929년부터 시작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 특히 그의 두 번째 작품인 <철학적 탐구>의 주요 가정이다. 대화로 구성된 <철학적 탐구>는 맘껏 캐묻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지배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의 대부분이 철학자와 (상상의, 내면의) 어린아이가 주고받는 끝없는 문답놀이로 구성된다. 이 작품의 대부분은 삶의 형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로 가득한데, 철학자인 아버지는 언어가 무엇이고, 무엇을 토대로 하며 무엇보다 몇몇 중심 단어들이 삶에서 어떤 구실과 의미를 가지는지 아이에게 설명하려 애쓴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에 각인된 말하는 어린이의 모습은, 1920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서 얻은 직접 체험이 철학적 통찰과 만난 것이다. 특히 1924년부터 오터탈에서 보낸 시간이 그랬다. <논리철학논고>를 제외하면 그가 사라 있을 때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유일한 책, <초등학생을 위한 사전>의 중심 물음은 아주 단순하다. 1925년을 사는 오터탈 학생에게 세계를 의미하는 단어 3,000개는 어떤 것들일까?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면, 최대한 신중하게 언어의 한계를 정하고 주시하는 것이 모든 훌륭한 교육자의 의무가 아닐까? 물음 중의 물음. 최종적이고 가치 있는 물음. 비트겐슈타인 테스트는 지금도 유효하다.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단어 3,000개를 말해 보라. 그럼 당신이 누구인지 맞히겠다. ‘사전 프로젝트는 내용과 설명 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전형적인 교육학적 접근법을 내포한다.

 

특이한 사람으로 토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비트겐슈타인은 교육자로서 명확한 견해와 교육 이상을 가졌다. 인간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탐구하기.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경험하기. 공고연한 헛소리와 논리적 오류 피하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말하기. 실재가 이론을 이긴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구원과 치유가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혼이지 전체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사전 출판은 교사로서의 비트겐슈타인에게 너무 늦었다. 집필이 끝난 지 18개월이 지난 1926년 가을에야 출판되었다. 그때 이미 비트겐슈타인은 교사로서의 삶을 마감한 뒤였다. 그 유명한 하이트바우어 사건’. 수업 중 하이트바우어의 뺨을 한두 대 때렸다. 특별히 가혹한 체벌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세찬 따귀였다. 이 학생이 따귀를 맞은 뒤 곧바로 기절하여 몇 분 동안 교실 바닥에 죽은 듯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의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하이트바우어는 이미 의식이 돌아온 상태였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길로 도망치듯 오터탈을 떠났다.

 

교육청은 내부적으로 조사를 마쳤고 교사의 막중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1926410일은 비트겐슈타인이 초등학교 교사로서 근무한 마지막 날이었다. 지역 교육청에서 나온 조사관의, 제발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해보라는 끈질긴 부탁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즉시 교사직에서 물러날 수 있게 조처해 달라 청했다. 그리고 그것은 1926428일에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그의 37번째 생일 이틀 뒤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시골로 들어갔을 때, 당시 부각되던 8시간 근무 또는 가난한 사람들의 물질적 생활 조건 개선 따위는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학생들과의 새로운 치유의 만남이었다.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 정확히 7년 만에, 그는 시골 교사로 사는 인생 설계가 모든 면에서 실패로 끝났음을 인식해야 했다. 또 다른 뭔가가 있기까지는 살아 있는 것이 곧 부끄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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