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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베냐민, 비트겐슈타인

내일도 태양이 뜰까?

by 내오랜꿈 2019.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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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태양이 뜰까?

 

비트겐슈타인은 교사 생활 첫 2년 동안, 자지 자신에 대한 증오와 타인에 대한 증오가 상호 강화하는 염세적인 침체 상태에 갇혀 있었다. 그 와중인 19221115일경, <논리철학논고>가 독일어와 영어로 출판되었다. 이제 그의 논문을 이해할 첫 번째 독자, 즉 이 논문의 본래 목표인 삶의 목표를 이해하게 될 가능성을 기다리는 일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새롭게 주어졌다.

 

목표는 단순히 세계를 바르게 봄으로써”, 의미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명확한 관점으로 명확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데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무어의 제안을 받아들여 책 제목을 <논리철학논고>라고 한 것 역시 이런 목표 때문으로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논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스피노자에게 철학은, 혼란을 초래하는 잘못된 가정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해명하여 혼란의 정체를 폭로하고, 세계의 일부로서 인간이 마침내 바르게 볼 수 있게하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보는 잘못된 가정은 종교적 신념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근대과학의 계몽된 세계관의 지침 원리였다. 이런 세계관은, 완벽하게 증명 가능하다는 극도로 원초적인 확신, 즉 계몽된 종교적 믿음 이전으로 복귀한 미개한 확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발생할 일이 발생했다는 인과관계적 설명과 앞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진단하는 필연적 자연법칙의 절대적 효력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가진, 과학적으로 계몽된 근대성은 개념적 착각에 기반을 두었다. ‘논리적 필연성개념을 자연법칙의 필연성에서 말끔하게 분리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도 태양이 떠오르리라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즉 태양이 뜰지 안 뜰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6.36311)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어나야 한다는 강제성은 없다.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 있다.(&6.37)

 

근대적 세계관 전체에는 소위 자연법칙들은 자연현상에 관한 설명들이라는 착각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6.371)

 

그래서 그들은 어떤 범할 수 없는 것 앞에서처럼 자연법칙들 앞에 멈춰 선다 ; 마치 고대인이 신과 운명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실로 둘 다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다만 근대적 체계에서는 마치 모든 것이 해명된 듯 보이게 하는 데 반해, 고대인의 경우는 분명한 종점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고대인이 더 명료하다.($6.372)

 

그러나 실상은 아무것도 해명되지 못하고, 특히 우리가 묘사할 수 있는 규칙성을 가진 이 세계가 왜 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지를 해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결코 해명될 수 없을 터인데, 그것에 대한 모든 해명은 이 세계의 밖에있는 뭔가에 의존해야 하고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헛소리를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경계 밖에 있는 것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경계 밖에 있는 것을 상황에 따라 모든 확정성과 확실성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 이 세계에 해당하는 근거나 해명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다음의 명제가 더 객관적으로 또는 더 윤리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밖에 있어야 한다.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세계 속에는 어떠한 가치도 없다. 그리고 만일 가치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가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다.

가치라고 할 만한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일어나는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밖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적이기 때문이다.($6.41)

 


▲ 시골초등학교 교사시절 학생들과 함께한 사진(1922년) - 위키백과



선택결단의 차이 - 사다리를 차버렸다면, 이제는.....

 

<논리철학논고>의 모든 명제는 비트겐슈타인의 기준에 따르면, 완전히 무의미하다. 마지막에 오로지 남은 것은, 인식을 도왔던 명제 사다리뿐이다. 그리고 이제 <논리철학논고>를 힘겹게 오르는 데 썼던 이 사다리를 마지막에는 미련 없이 차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새롭게 도달한 높이에서 사다리 없이 무엇을 할까? 다시 든든한 토대를 찾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나뿐이다. 도약! 믿음을 향해! 진정한 윤리적 실존을 향해! 자유를 향해! 자신의 근본적인 토대 없음과 기반 없음을 이해하고 의도적으로 뛰어오르는 도약. 세계 안에 있는 어떤실질적인 것이 근거 또는 사실을 뜻하는 한, 무에서 뛰어오르는 도약. 토대 없는 도약이 비로소 진정한 믿음을 부여한다. 그것만이 경험적 의미, 정의, 영혼치유, 무한성 또는 고전적 종교적 전망에 근거를 두는 모든 기대를 단념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해야 한다라는 형식의 윤리 법칙이 세워졌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상벌과 무관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행위의 결과들에 관한 이런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 최소한 이 결과들이 사건들이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그러한 물음에도 무엇인가 올바른 것이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비록 일종의 윤리적 상벌이 존재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 상벌은 행위 자체에 있어야 한다.($6.422)

 

만약 그렇다면, 자유로운 삶에서 윤리적 결정의 가치는 지금의 삶을 경험적으로 사는 것 자체에서 입증된다. 그리고 다른 삶 또는 이후의 삶 또는 심지어 영원한 삶이 아니라, 구체적인 지금의 삶으로 도약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 영혼의 시간적 불멸성, 즉 죽은 후에도 인간 영혼이 영원히 산다는 가정은 어떤 방식으로도 보증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정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늘 그런 가정으로 달성하고자 한 것을 전혀 성취하지 못한다. 내가 영원히 산다고 해서 수수께끼가 풀릴까? 도대체 이 영원한 삶이란 현재의 삶과 똑같이 수수께끼 같지 않은가?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공간과 시간 밖에놓여 있다.(($6.4312)

 

믿음으로의 도약 결단, 넓게 보면, 진정한 윤리적 실존으로서의 도약은 삶 자체의 완전성이라는 보장과 토대를 추구한다. 도대체 왜 그런 삶을 결정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이런 도약의 요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튼,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보았다.

 

선택은 예상 가능한 결과에서 정당성을 찾고, 결단은 그렇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선택은 언제나 조건이 있고, 결단은 무조건적이고 그래서 정말 자유롭다. 선택은 신화적으로 엮여 있지만, 결단은 (이상적인 경우) 원인과 결과, 운명과 필연, 죄와 속죄라는, 실존을 지배하는 합리적 논리에서 돌파해 나온다. 바로 이것이 결단에 고유한 신성함을 부여한다.

 

비트겐슈타인이 1919년에 스스로 결단한 초등학교 교사라는 새로운 삶으로의 도약을 완전히 인식했더라도, 한 가지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런 새로운 삶의 의미가 일상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의미를 얻지 못했고, 구원의 도피라는 자신의 결단으로 희망했던 의미를 매일 매주 마비된 공허함 속에서 잃어갔다. 그는 그냥 견디며 살았다. 1922년과 1923, 그는 끔찍하게 외로웠다.

 

<논고>의 출판도 그의 외로움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허름한 작은 방에서 매일 반복해서 자신의 논문을 읽을수록, 고유한 근심에서 그를 해방하는 독창적인 탈출 철학이 세계와의 경계를 더욱 명확하고 확고하게 긋는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이었다. 공유할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세계를 바르게 보는 것이무슨 소용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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