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천사> 창간 계획에서 <괴테의 친화력>까지
보들레르 번역 출판도, 야심차게 기획했던 잡지 <앙헬루스 노부스:새로운 천사>의 창간도 이뤄지지 않았다. 여러 이유들이 함께한 결과지만 전쟁 후의 인플레이션에 따른 종이 가격의 폭등으로 출판업계 전체가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한 해 동안(1922년) 베냐민은 한 푼도 벌지 못했다. 베냐민에게 ‘일’이란 자신이 고유한 생각을 글로 발달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사태가 아무리 불안정하고 완전히 절망적으로 보였더라도, 여기에는 타협이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교수 자격 취득은 변함없이 그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구원해줄 유일한 타당한 길이었다. 그러므로 1922년 가을에도 베냐민은 여전히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그가 확신했고 공공연히 선언한 것처럼 체계적이고 정교하게 작성된 묵직한 에세이. 괴테의 소설 <친화력>에 대한, 약 100쪽에 달하는 비평이었다.
극도로 정교하고 오늘날까지 베냐민의 주요작으로 꼽히는 <괴테의 친화력>이라는 제목을 단 이 작품은 괴테의 소설 자체가 그렇듯 대단히 포괄적인 비평이고, 심지어 전체 시민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정과 혼인 제도에 대한 숙고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베냐민은, 겉으로는 본질적인 자유와 자기 결정권을 약속하는 근대 시민사회를 실제로 지탱하는 숨겨진 힘과 동력을 폭로한다. 베냐민에게 그것은 결국 ‘신화적’ 힘과 사고 패턴과 역학이며,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불길하고 미숙하고 편협하다. 이것을 토대로 그는 소위 자유롭고 자기 결정권을 가진 주체가 이런 숨겨진 힘과 사상의 효력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나, 진정한 사랑뿐 아니라 어쩌면 더 나아가 만족스러운 혼인 생활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 설명한다.
베냐민은 <괴테의 친화력> 첫 부분에서, 모두 시민교육을 받은 지성인인 괴테 소설의 네 주인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교양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다는 것이 항상 드러남에도, 교양으로 (신화적) 힘을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작 교양이 매우 높은 그들이 이 힘의 지배를 받는다. (<괴테의 친화력>,62 )
근대 주체의 자유의식은, 자기 결정을 완전히 자유롭고 주도적으로 추구한다는 착각에서 나온다. 자유로운 근대 시민 주체의 대표적인 자기 결정 사례가 바로 혼인이다. 괴테의 낭만적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성숙한 주체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가장 친화력이 높은 배우자로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베냐민에 따르면, 근대의 모든 현존재는 ‘자유’와 ‘운명’이라는 두 가지 중심 개념 사이에 있다. 진정한 자유가 있으면, 자유의지 맞은편에 있는 운명은 결국 힘을 쓰지 못한다. 반대로 운명이 우위에 있으면, 모든 자유와 선택은 가짜 개념일 뿐이고 특히 도덕적으로 부과된 ‘죄’의 개념은 쓰임새가 없다. 운명은 죄를 모르고 속죄만 안다. 자유는 속죄를 모르고 책임만 안다.
그러나 <괴테의 친화력>이 베냐민에게 바로 교수 자격을 가져다주진 않았다. 대신 ‘바로크 시대 비애극의 형식’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베냐민은 이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불확실성과 연속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베냐민에게는 교수 자격 취득이 유일한 목표였다. 최소한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 <괴테의 친화력> ▲ <독일 비애극의 원천>
$$ 카프리에서 – 러시아 혁명가 아샤 라치스와의 만남
1924년 봄, 베냐민은 ‘바로크 시대 비애극’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 600여 개의 발췌문을 들고 이탈리아의 섬 카프리에 도착했다. 카프리는 세기 전환기부터 이미, 국제 부르주아 대신에 좌파 지성인들을 자처한 사람들의 갈망과 휴식의 장소였다. 혁명 문학의 아이콘인 막심 고리키는 심지어 이곳에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도 했었다. 이곳에서 베냐민은 러시아에서 온 혁명가, 라치스를 만나게 된다. 살면서 한 번도 사랑에 빠진 적이 없었던 베냐민. 그가 숄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리가에서 온 러시아 혁명가”, “두마 창설 이후 정당 활동을 하는 탁월한 공산주의자”,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여자”라고 칭찬한, 아샤 라치스를 사랑하게 된다.
라치스와의 관계는 베냐민에게 에로틱한 삶, 모든 감각을 충족시키는 사랑의 시작이었다. 신념이 강한 공산주의 활동가와의 대화는 당연히 정신적으로 새로운 지평과 관점을 열어주었다. 이론과 실재, 예술과 정치, 참여와 분석에 대한 라치스의 견해는 베냐민의 그때까지의 견해와 정반대였다. 또한 러시아에서 온 이 여성 활동가는, 혁명의 기운이 넘치는 유럽 한복판에서 하필이면 17세기 독일 바로크 연극에 몰두하는 베냐민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을 터이다. 어쨌거나 당연히, 라치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가 중대한 이론적 대안으로 베냐민의 철학에 침입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접속이 베냐민에게 교수 자격을 가져다 주진 못했다. 1925년 7월,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논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프랑크푸르트 대학 철학 학부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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