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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베냐민, 비트겐슈타인

존재의 한복판에서 – 나찌당원으로의 길과 전체주의 비판의 길

by 내오랜꿈 2019.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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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재 철학의 진정한 과제

 

1922년 가을, 하이데거는 마르크부르크 대학 교수직을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이라는 논문을 제출한다. 베냐민의 <번역자의 과제>가 보들레르와 무관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논문과 거의 상관없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철학자의 진정한 과제에 대해 물으면서 현존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철학의 연구대상은, 철학으로부터 존재 특성에 관해 질문을 받는 인간 현존재이다. 실질적인 현존재는 언제나 존재한다. 언제나 오로지 완전히 고유한 존재이지 일반적인 어떤 인간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

 

여기서 현존재(Da-Sein)’라는 개념은 세계로부터 언제나 요구받고 도전받는다고 느끼는 인간의 특성으로 이해된다.

 

세계는 언제나 우리를, 요구받는 존재로, 즉 청구 방식으로 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지속적인 자기 조명의 질문 과정이다. 모두가 각자의 장소에서 각자의 시간에서 자신을 조명해야 한다. 실존에는 알리바이가 없다. 아무튼 철학에는 없다. 매우 불편하고 무엇보다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이런 자기 조명의 과정은 당연히 현존재에 의해 거부되거나 기피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이 열려 있지 않다면,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은 존재, 즉 자유가 없는 존재일 터다. 하이데거는 어느 정도 의식적인 이런 거부와 기피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쇠퇴의 의미에 신학적 색깔을 입힌 타락이라는 낱말을 선택했다. 이런 타락은 아주 흔하게 생기는 애석한 일이다.

 

원래 그래야 할 개개인의 실질적인 삶이 대부분 그렇게 되지 않는 까닭은, 이런 타락 성향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

 

하이데거에 의하면, 대다수의 타락 성향은 지적 능력의 부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실존적인 안락함을 추구하는 성향에 그 뿌리가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찾는 것보다 평생 회피하며 사는 걸 선호한다. 의도적인 자기 회피는 특별히 괴롭지도 않고 비열하지도 않다. 아니, 심지어 더 안전하고 일반적인 의미의 행복을 더 확실히 보장한다. 다만 이런 회피는 인간이 본연의 소명대로 살 수 없게 하고, 스스로 선택한 장기적인 자기부정의 길을 걷게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런 삶의 주요 관심은 본래 중요하지도 않고 삶에 기여하지도 않는 사물에 집중한다. 이를테면 물질 영역에서는 유행하는 소비재, 사회 영역에서는 직업적 경력, 관계에서는 진정한 대화와 사랑 없이 반복적인 일상만 공유하는 부부, 종교 영역에서는 진정한 체험 없이 학습한 믿음, 언어 영역에서는 피상적인 문장과 상투적 표현의 남용, 마지막으로 연구 영역에서는 대답을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의 반복.

 

하이데거는 이 모두를 벗어나 현존재의 존재 특성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모든 현존재의 뿌리와 기원에 집중한다. 철학의 본래 질문을 최대한 명확하게 던진다. 개념 측면에서는, 낡고 왜곡되고 무엇보다 당연하게 수용되는 전통 어휘들을 시대에 맞게 갱신하고 현존재의 구체적인 경험에 토대를 둔다. 그것이 비록 개념과 범주의 완전한 파괴와의 대체여야 할지라도.

 

하이데거가 이해하고자 한 것처럼, 철학하기의 목표는 지속적으로 현존재를 진정시키거나 영혼을 편안하게 하는 게 아니다. 그 반대이다. 철학하기는 급진적 물음의 폭풍 속에 끊임없이 자신을 세우는 의지, 한때 안전한 지반을 꿈꾸고 소망했던 바로 그곳에서 끝없는 나락을 인식하려는 용기를 요구한다. 이 길은 결코 쉬워선 안 된다. 최고의 긴장과 위험의 순간이 가장 환영받는다. 이런 태도는 정치 영역으로 이전되어, 진정한 결단과 숙고를 대안 없이 열망하는 최고의 위기와 위험의 예외적 상황을 열렬히 긍정하게 한다. 나찌즘에의 동조로 가는 길?

 

인간은 보호와 본능 없이 이 세계에 오고 무엇보다 아는 게 없이 백지상태로 온다. 이런 근본적인 결핍 때문에 인간은 생각과 행동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방향을 잡아야 하고, 그것이 문화를 낳는다. 이것이 칸트 철학의 원래 출발점이었다.



▲ 한나 아렌트                                      ▲ <전체주의의 기원>  



$$ 존재의 한복판에서 나찌당원으로의 길과 전체주의 비판의 길

 

인간 현존재가 피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반드시 올 것이고 언제든지 올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두려움에서 모든 인간을 구원한다고 약속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것을 의심한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현존재두려움이 그의 강의 주제였고, 거기에는 기독교적 구원의 약속이 스며들 여지가 없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의 진짜 특징은, 복수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현존재는 오직 따로 떨어진 개별 존재이고, 하이데거가 명명한 것처럼 각자인 존재인 것이다. 진정으로 해방하여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면, 자기 자신에게서 완전히 나와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갑자기 다른 현존재 가 하이데거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었다. 한나 아렌트. 하이데거에게, 하이데거의 철학에 뭔가 새로운 사건이 생겼다. 거대한 가 내 안에 들어왔다. 나의 한복판으로, 나의 존재 한복판으로.

 

하이데거는 평생 그 누구보다 한나 아렌트를 사랑했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을 그의 실존에서 가장 어렵고 심오한 도전 과제로 표현했었다. 1925, 하이데거는 아렌트에게 쓴다. 가장 어려운 일 이외의 모든 일에는 방도, 도움, 한계 이해가 있어. 지금 모든 것이 오직 하나를 의미해. 사랑하기=실존으로 떠밀려 들어가기.”

 

이제 하이데거에게 가장 어려운 도전 과제는 사랑 자체이다. 하이데거는 아렌트와의 관계를 통해 피할 수 없이 본래성, 그러니까 실존의 새로운 형식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존재하려면, 바로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었다. 과연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하이데거는 아렌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실존적 해방이라고 맹세했던, 의 악마적 침입을 위해 내어줄 자리를 자신의 철학에서 찾지 못했다.

 

하이데거와 달리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철학 속에서 그 길을 찾아내고자 했다. 1926년 여름, 아렌트는 마르크부르크를 떠나 칼 야스퍼스 밑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시작했다. 그녀가 선택한 논문 주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개념이었다. 이 젊은 철학자의 관심은 현존재가 이미 항상 그리고 제거할 수 없이 다른 실존과 연결되는 사랑 경험이 존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어떻게 보면 하이데거 철학의 출발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그 자리.

 

아렌트의 철학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의 사건과 실존적 관점을 탁월하게 탐지하고 드러내고 작업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해내지 못한 일인데, 하이데거는 추방과 고향 없음, 그러니까 디아스포라를 무릅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바로 이 역할을 평생의 소명으로 이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출발점에서 한 사람은 나찌당원이 되는 길로, 한 사람은 전체주의의 기원폭력의 본질을 파헤치는 길로 나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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