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갈을 담글 때 물이나 소주를 넣는 행위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우스꽝스런 행위가 숙성된 젓갈을 무작정 달이는 것이다. 온갖 미생물이 살아 숨 쉬는 잘 숙성된 젓갈을 끓여서 각종 유익한 균들을 깡그리 죽여버리고 먹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젓갈은 기본적으로 원재료인 어육의 단백질이 가수분해되어 액체로 된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젓갈의 숙성이니 어쩌니 하는 게 사실은 어육이 연화, 분해되어 그 형체를 잃고 액체 상태가 되어 구수한 감칠맛을 내는 과정을 일컫는 것이다. 이 과정도 두 단계로 나뉘는데 생선에 포함된 소화효소가 자가소화를 일으키는 과정과 외부에서 유입된 미생물이 단백질 가수분해효소를 생성하여 어육을 분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실제로 소화효소가 많이 포함된 생선의 내장기관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젓갈을 담그면 숙성이 늦어지고 생선 고유의 냄새와 맛이 없어진다. 곧 젓갈이 숙성되는 초기에는 생선 내장에 많이 포함된 소화효소에 의한 자가소화를 통해 미생물이 활동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단백질 가수분해효소에 의하여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우리가 젓갈을 담글 때 생선의 내장을 손질하지 않고 통째로 담그는 건 이렇듯 과학적인 이유가 있는 셈이다.
▲ 담근 지 2년 된 잘 숙성된 멸치 젓갈
가수분해(효소) 어쩌고 하니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우리가 먹는 밥(녹말), 고기(단백질) 등의 유기화합물은 모두 우리 몸의 소화기 내에서 가수분해되어 성분이 분해되거나 변형된 뒤에 흡수된다. 예를 들면 녹말은 아밀라아제의 작용으로 가수분해되어 말토스가 되고, 이 말토스는 다시 말타아제의 작용으로 가수분해되어 포도당으로 변한 뒤 비로소 흡수된다. 이른바 당화(糖化)라고 하는 과정이다. 병원에서 대부분의 위급한 환자한테 포도당 주사부터 놓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단백질은 트립신 등의 효소작용으로 가수분해되어 아미노산이 된 후 흡수된다. 콩이 가지고 있는 단백질 성분을, 생콩보다는 삶은 콩에서 삶은 콩보다는 두부에서, 우리 몸이 훨씬 더 많이 흡수하는 이유는 콩이 두부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콩 단백질 성분이 그만큼 더 많이 아미노산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수분해 과정은 대개의 경우 촉매가 있으면 반응속도가 빨라지는데, 생물체 내에서의 가수분해에는 많은 종류의 가수분해효소가 촉매작용을 한다. 마치 젓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생선 내장에 많이 함유된 미생물이 그러하듯 우리 몸의 소화기관에 들어있는 각종 유산균들이 그러하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멸치젓갈이나 까나리젓갈이 숙성되어 액체화되면 젓갈 용기(주로 항아리)에 용수를 박아 맑은 액젓을 얻는다. 어느 정도 맑은 액젓을 얻고 나면 생선 살이나 뼈 찌꺼기가 남는데 이 건더기를 그냥 버리지 않고 가마솥에 넣어 적정량의 물과 소금을 더해 한두 시간 끓이면 젓갈과는 또 다른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어간장을 만들 수 있다. 젓갈 원액이 염도가 높고 향(비린내)이 진한 까닭에 김치 등 저장음식을 만들 때 주로 사용한다면 어간장은 염도도 낮고 향도 연하기에 각종 무침 요리나 국의 간을 맞출 때 부담없이 사용할 수 있다. 용수를 박아 맑은 액젓을 얻지 않더라도 숙성된 젓갈을 한지나 광목천을 체에 받쳐 거르면 맑은 액젓과 건더기로 구분된다. 원칙적으로는 이렇게 걸러낸 맑은 액젓을 '어간장(fish sauce)', 남은 건더기를 '어된장(fish paste)'이라 한다. 요즘이야 언제든 마트에서 상품화된 젓갈이나 어간장을 사 먹는 게 대세인 시대니 젓갈 건더기를 보는 것조차 생소하겠지만 먹을 게 부족했던 시절, 젓갈 건더기인 어된장을 그냥 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재활용하는 건 당연지사.
▲ 멸치젓갈 건더기를 활용한 어간장 만들기
아무리 세월이 변했다고는 하나 변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냥 버리기 아까운 젓갈 건더기를 재활용하느라 시도됐던 젓갈 달이기가 그 의미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숙성된 젓갈을 무작정 끓이는 게 당연한 일인 양 본말이 뒤바뀐 채 유포되고 있다. 물론 필요에 따라, 용도에 따라 젓갈을 부분적으로 끓여서 사용할 수는 있다. 만들고자 하는 음식에 따라서는 농도나 색깔이 옅은 맑은 액젓이 필요할 수도 있기에 적당량의 젓갈을 들어내 물을 첨가한 뒤 한 번 끓여서 걸러내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어간장을 만들어 쓰는 이유, 방법과 모두 유사하다. 이런 쓰임새의 어간장은 젓갈 건더기를 활용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기에 멀쩡한 젓갈을 통째로 끓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시 말해 젓갈을 달인다는 것은 잘 숙성된 멀쩡한 젓갈을 무턱대고 달이는 게 아니라 숙성된 젓갈에서 맑은 액젓을 얻고 남은 건더기를 재활용하는 방편의 일환이었다. 상식적으로도 상온에서 잘 숙성된 젓갈은 그 자체로 온갖 영양분과 미생물이 살아 숨 쉬는 완전 식품인데 그걸 끓여서 균들을 죽여버리는 게 과연 온전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일까? 혹시라도 끓이면 변질의 위험이 없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조차 명백한 오산이다. 젓갈의 변질 여부는 젓갈 염도가 좌우하지 끓이고 안 끓이고는 전혀 상관없다. 젓갈이 하루 이틀에 다 먹을 음식은 아니지 않은가.
몸에 좋으라고 장에 좋다는 온갖 발효 제품들, 그러나 사실은 거의 설탕물에 불과한 요구르트 종류는 돈 주고 사 먹으면서 인간의 장에 꼭 있어야 할 유익한 미생물들이 살아있는 젓갈은 굳이 끓여서 균들을 다 죽여버리고 먹다니... 원숭이도 하지 않을 짓을 원숭이보다 똑똑하다는 인간들은 남들이 한다고 아무 생각없이 따라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SNS를 비롯한 인터넷 상에서 '남이 장에 가니 거름 지고 장에 간다'고, 그 의미도 모른 채 멀쩡한 젓갈 달이는 걸 자랑인 양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도무지 이해불가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이란 동물은 참으로 오묘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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