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물의 씨앗은 저마다 발아조건이나 수명이 다르다. 씨앗 수명이 5~6년 이상 되는 작물도 있고, 1년만 지나도 잘 발아하지 않는 작물도 있다. 콩과 작물이나 호박 같은 박과 작물은 배유가 잘 발달되어 있어 대부분 5년이 지나도 발아력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반면에 들깨나 도라지는 1년만 지나도 거의 발아하지 않는다. 이러한 종자의 수명을 두고 장명종자(5~6년 이상), 상명종자(3~4년), 단명종자(1~2년) 등으로 나누는데 작물별로는 자료마다 약간씩 다르게 분류되기도 한다. 예컨대 고추나 상추를 상명종자로 분류하는 자료도 있고 단명종자로 분류하는 자료도 있다. 특이하게도 샐러리나 갓처럼 1년을 묵혀야 발아가 잘 되는 씨앗도 있다.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이론대로 유전자(DNA)의 유일한 목적이 오로지 후손을 남기는 것이라면 씨앗 나름대로 분명 종족번식을 하는 데 있어 유리한 점이 있기에 이런저런 형태로 진화한 것일 텐데 온갖 식물의 유전 정보를 다 알기에는 아직 우리 인간의 지식이 너무나 짧다.
▲ 채종한 지 6년이 지난 씨앗으로 파종한 청상추(위), 적상추(아래). 냉동 보관한 탓인지 대부분 발아한 것 같다.
직접 채종한 씨앗이든 구입한 씨앗이든 쓰고 남은 건 보관해야 하는데, 어떻게 보관하느냐에 따라 씨앗의 수명은 달라지는 것 같다. 나는 주로 잘 마른 씨앗을 밀폐된 비닐봉지에 싸서 냉동 보관한다. 몇 년 동안의 내 경험치에 불과하지만 냉동상태로 보관하면 작물학 교과서에서 말하는 종자수명보다는 발아력이 훨씬 더 오래 지속된다. 봄파종을 위해 냉동실의 씨앗을 정리하다 보니 채종일자가 2011년도로 적힌 상추 씨앗 봉지들이 남아 있다. 진즉에 뿌렸어야 하는데 상추 씨앗 종류가 너무 많다 보니 빠뜨렸던 것 같다. 작년, 재작년에 채종한 씨앗도 있기에 버릴까 하다가 6년이 지난 씨앗도 '발아가 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발아 테스트를 겸해서 텃밭 한편에 이 상추 씨앗들을 파종했다. 아무래도 발아력이 떨어질 것 같아 평소 뿌리던 양보다 제법 많이 뿌렸는데, 십여 일 지나 발아 상태를 보니 거의 대부분 발아한 듯하다. 이 정도라면 작년에 채종한 씨앗과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씨앗 봉지들 사이로 흰찰옥수수 봉지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무래도 채종한 지 최소한 3~4년은 지난 씨앗 같다. 옥수수는 종자 수명이 아주 짧은 단명종자라서 전년도에 채종한 씨앗을 처마 밑에서 말리다 이듬해 봄에 파종하는 패턴을 유지하기에 따로 냉동 보관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버릴려고 했는데 6년 지난 상추 씨앗이 아무 문제없이 발아하는 걸 보니 이것도 정상적으로 발아할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해서 오늘 50여 곳의 파종골을 만들어 점파했다. 아직 지온이 낮을 테니 보름 정도는 지나야 발아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옮겨 심은 지 25일된 양배추(파종 55일째)
▲ 옮겨 심은 지 25일 된 브로콜리(파종 55일째)
▲ 파종 30일째 양배추
▲ 직파한 양배추와 브로콜리(파종 13일째)
3월의 텃밭은 모든 게 더디다. 하루하루를 보면 아무런 변화가 없는 듯한데 십여 일 지나 보면 어느새 이만큼 자랐나 싶을 정도로 색깔이 달라져 있다. 20여 일 전에 옮겨 심은 양배추와 브로콜리도 도무지 자라는 것 같지 않았는데, 처음 심었을 때 사진과 비교해 보니 추운 날씨 속에서도 이제는 완전히 자리 잡은 거 같아 보인다. 1차 파종(55일 전), 2차 파종(25일 전), 직파한 것(10일 전)의 차이가 사진상으로 선명히 드러난다. 어떨 땐 한 달 차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기도 한데 수확할 때 보면 20여 일 차이는 확실히 난다.
▲ 사진상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마늘밭은 두더지 통로 때문에 온통 땅이 갈라져 있다. 수시로 눌러 주지만 그때뿐이다.
그나저나 두더지 등쌀에 마늘, 양파가 생고생이다. 온 밭이 두더지 놀이터다. 비료를 주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병충해도 별다른 문제가 안 되는데 두더지만은 뾰족한 대책이 없다. 수시로 들뜬 두더지 통로를 눌러 주지만 그때뿐, 그저 땅 밑에 산소 공급해 주는 것으로 위안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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