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초, 당근을 수확하면서 못난이 당근 일부를 밭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두 가지 목적이었다. 월동이 가능한지와 월동이 된다면 씨앗을 받을 생각으로. 당근은 10℃ 이하의 기온에서 30~60일 정도 지나야 꽃눈 분화가 촉진되는 대표적인 저온감응형 식물이기에 봄재배보다는 월동재배 시 한결 수월하게 씨앗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동안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가는 추위가 올 때면 당근의 상태를 살펴보면서 식물의 환경적응능력에 새삼 감탄하곤 했다. 국화과나 십자화과 식물도 아닌 미나리과 식물이 한겨울 추위에 맞닥뜨려서는 잎줄기가 로제트 식물 형태로 변신하면서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것을 보고서.
▲ 채종용으로 월동시킨 당근인데, 한순간에 생을 마감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생각 못 했기에 찍어둔 사진 하나 없다.
3월 들어 서서히 일어서는 당근 잎줄기를 보면서 곧 춘분이 지나고 장일조건이 되면 이내 꽃눈이 나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뜻밖의 재앙에 마주쳐야 했다. 힘겹게 겨울을 이겨낸 당근이 땅 밖으로 나와 말끔히 씻긴 채 소쿠리에 담겨 간장 항아리 위에 얌전히 앉아 물기를 말리고 있었던 것. 12월에 수확한 당근이 아직도 냉장고 속에 조금 남아 있는데 뭐가 그리 급했는지 옆지기가 씨를 받기 위해 남겨둔 이 당근을 몽땅 뽑아버린 것이다. 좀 어이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당근이 심어져 있던 곳에 가 보니 한 뿌리도 남김없이 잘게 잘린 잎줄기 잔해만이 이랑을 가지런히 덮고 있었다. 완전 '헐~'이다. 아무리 채종용으로 남겨둔 것이라는 말을 해 주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이렇게도 눈치가 없을까? 참 나.....
기왕지사 이리 된 거 맛이나 보자 싶어 작은 거 하나를 깨물었는데 생각보다 식감이 너무나 연하고 아삭하다. 오랫동안 땅 속에 있으면 섬유질이 많아서 좀 질긴 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12월에 수확할 때보다 더 연한 것 같다. 두세 개를 먹어봤지만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올해는 이곳에서도 당근은 충분히 월동이 가능하고 월동시킨 당근의 식감도 훌륭하다는 걸 알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씨앗 채종은 또 이렇게 내년으로 미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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